지난달 28일 정부로 이송된 '대북송금 특검'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공론이 정치권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특히 민주당 신주류는 3월 1∼2일 이틀간의 연휴를 거치면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에서 긍정적인 입장으로 돌아서고 있다. 이렇게 변화를 보이는 이유는 대북송금에 대한 국민 여론이 무조건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 같지는 않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신주류 일각에서는 이번 특검법이 민주당이 빠진 상태에서 한나라당에 의해 강행됐다는 점을 들어 원만한 국회 재합의를 요구하는 '조건부 거부권' 주장이 제기되고 있어 주목된다.
민주당은 지난달 26일 특검법안의 국회 통과 이후 28일까지 3일 연속 의원총회를 열어 대책을 논의했지만, 대통령의 거부권 문제에 대해서는 구주류와 신주류 사이에 미묘한 의견 차이를 보인 바 있어 연휴 후의 이런 기류는 새로운 변화다.
또한 김원웅 개혁국민정당 대표도 2일 오후 전화통화에서 "우방간에 오간 외교문서도 국가이익을 해칠 수 있다는 이유로 공개하지 않으면서, 하물며 50년간 적대적 관계를 지속해온 북한과 오간 관계를 특검을 통해 소상히 밝히자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다"며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지난 65년 체결된 한일조약의 외교문서도 40년 가까이 일체 공개가 안되고 있고, 60년대 미국과 맺은 월남 파병과 관련한 외교문서도 일체 공개가 안되고 있다"라며 "우방과의 관계도 그런데, 북한과 오간 준외교적 관계는 민족 전체의 이익이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헌법 제52조에는 '국회에서 본회의 의결을 거쳐 법안이 정부로 이송되면 대통령은 15일 내에 이의서를 붙여 국회로 환부, 재의를 요구할 수 있다'며 대통령의 거부권을 보장하고 있다. 지난달 26일 국회를 통과한 대북송금 특검법은 28일 오전 정부로 이송됐기 때문에 노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간은 3월 14일까지다.
민주당 신주류, 특검 대통령 거부권 '긍정론' 확산
연휴 마지막날인 2일 민주당 김영환·김근태·김상현·김경천·장성원·전갑길·심재권·이창복 의원 등 8명은 성명을 통해 노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공개적으로 촉구했다.
이들은 "대북송금사건은 결코 비리사건이 아니다. 우리와 특수관계에 있는 북한을 전쟁이 아닌 평화적 방법으로 변화시키려했던 평화비용이다"라며 "대북송금사건은 법률적 잣대가 아니라 민족화해의 잣대, 한반도 평화의 잣대, 그리고 역사의 잣대로 판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이제 대통령께서 결단해야 한다"면서 "다시 국회에서 논의될 수 있도록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재정 의원은 2일 오후 전화통화에서 "지금 북미 관계가 긴장상태인데 특검 수사로 인해 과거 조문사태처럼 남북 관계까지 긴장상태로 바뀌면 누가 사태를 해결하겠느냐"면서 "대통령은 당연히 거부권을 행사해 이 사안을 수사대상으로 넘기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이 의원은 "한나라당이 수에 의해서 법안을 통과시켰듯이, 대통령도 무슨 초법적인 권한 행사가 아니라 헌법에 보장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라며 "남북관계야말로 대통령의 의지"라고 강조했다.
천정배 의원은 2일 저녁 전화통화에서 "이전에는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정치적인 부담이 너무 크고 국민이 납득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여론이 조금씩 호전되는 것 같다"면서 "이제는 거부권 행사를 신중히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상수 사무총장도 2일 늦은 밤 전화통화에서 "사무총장으로서 의사표명은 자제하고 지켜만 보고 있다"면서도 "지금 시점에서는 거부권을 행사해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건부 거부권론 대두
특히 이 사무총장은 '조건부 거부권론'을 제기했다. 그는 "나는 특검 자체를 절대 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 아니다. 처음부터 특검도 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면서 "우선 여야가 합의해서 국회 조사도 해보고, 미진하면 합의에 의해 잘 다듬어진 법을 만들어 특검을 하자는, 일종의 '조건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조건부 거부권의 명분은 현재 국회를 통과한 특검법이 여야간 합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민주당이 빠진 상태에서 한나라당이 강행한 법안이라는 점. 이 사무총장은 "여야가 합의해서 기간과 수사 대상을 줄이고, 더 나아가 중간에 수사결과를 발표하면 처벌하는 규정을 두는 것이 필요하다"며 "현 법안으로 특검을 하기에는 부담스러운 면이 있다"고 말했다.
김경재 의원도 같은 주장을 펼쳤다. 지역구에 내려가 있던 김 의원은 2일 낮 전화통화에서 대통령의 거부권에 대한 질문에 "조건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 여야 합의가 없는 특검은 없었다"면서 "여야 합의로 특검법을 만드는 조건으로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 의원은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직접 촉구하는 것은 대통령의 고유권한에 대한 침해이기 때문에 적절치 않다"며 "그보다는 우리는 새로운 특검 개정안을 국회에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나라당 "거부권 행사하면 국민과 함께 투쟁"
이런 움직임에 대해 한나라당은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박종희 한나라당 대변인은 2일 '거부권 행사 있을 수 없다'는 논평을 통해 "만일 노 대통령이 상황을 오판해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우리당은 모든 당력을 결집해 국민과 함께 투쟁에 나설 것"이라고 거부권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박 대변인은 "노 대통령은 가뜩이나 경제와 민생이 불안한 상황에서 국정혼란과 극한대립을 자초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면서 "민주당은 대북 뒷거래 사건과 관련한 모든 것을 중립적인 특검에 맡기고 정치권은 본연의 업무에 전념하자는 우리당의 충정을 깊이 헤아려 억지와 생떼쓰기를 그만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배용수 한나라당 부대변인도 논평을 통해 "거부권 행사 운운은 특검제를 막아보려는 불장난"이라고 비판했다. 배 부대변인은 "이번 특검법 통과는 거부할 명분이 없던 민주당만 본회의장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고 이는 여당 스스로 국정에 대한 책임 포기였다"며 "의장이 국회법에 따라 사회를 보고 '다수결의 원칙'을 적용한 것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