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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동 몽돌 해수욕장의 아침 풍경
학동 몽돌 해수욕장의 아침 풍경 ⓒ 안병기
파도 소리에 눈을 떴다. 민박집 창을 열고 바라보니 일출을 보긴 힘들만큼 하늘이 흐려 있었다. 가만히 문을 열고 나와 바닷가를 거닐었다. 전봇대 위나 여기저기 널린 어구들 위에 까마귀들이 날아와 까악까악 소리를 낸다. 서둘러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선다. 버스는 해안도로를 구비구비 돌아 구조라, 미조라, 장승포를 거쳐 옥포 대우 조선소에 도착했다.

옥포 대우조선소 골리앗 크레인. 크레인 안에는 대형버스 3대가 주차할 공간이 있다고 한다.
옥포 대우조선소 골리앗 크레인. 크레인 안에는 대형버스 3대가 주차할 공간이 있다고 한다. ⓒ 안병기
정문에서 안내원이 버스에 올라 친절히 안내했지만 잠수함 등 군사기밀 때문이라며 조선소 견학이래야 버스에 앉은 채로 조선소를 한 바퀴빙 도는 것이 전부였다. 주마간선(走馬看船) 이랄까. 대우 조선소 견학은 겨우 10분만에 싱겁게 끝나버렸다.

미륵도 관광특구 지도
미륵도 관광특구 지도 ⓒ 안병기
버스는 어느 새 통영에 도착했다. 세병관 충렬사를 지나치는가 싶더니 어느새 충무교를 건너 미륵도 관광특구로 들어선다. 미래사를 옆으로 스쳐가는 버스를 원망했다 .미래사는 법정 스님, 고은 시인 등을 상좌로 두기도 했던 근대의 선지식 효봉스님이 주석했던 가람이다.효봉스님에 대해 알게 된 이래 25년 동안 언젠가는 꼭 미래사에 가보리라 마음 먹었던 곳이었다. 마음 속으로 '내 언젠가 다시 오리라'라고 다짐했다. 잠시 후 버스는 통영수산과학관에 도착했다.

달아공원에서 바라 본 통영수산과학관
달아공원에서 바라 본 통영수산과학관 ⓒ 안병기
통영수산과학관 기획 전시실에는 옛 문헌 대로 복원한 통영의 전래배인 통밍구이가 전시되어 있어 눈길을 붙잡는다.

재현된 통영의 전래배 통밍구이
재현된 통영의 전래배 통밍구이 ⓒ 안병기
이층에 있는 전시실들을 차례로 둘러 보고 내려오다가 기획 전시실 한 구석에 전시된 투구게에 시선이 가 닿았다.

황지우의 시에도 나오는 투구게
황지우의 시에도 나오는 투구게 ⓒ 안병기
1

처음 본 모르는 불꽃이여, 이름을 받고 싶겠구나
내 마음 어디에 자리하고 싶은가
이름 부르며 마음과 교미하는 기간,
나는 또 하품을 한다

모르는 풀꽃이여, 내 마음은 너무 빨리
식은 돌이 된다, 그대 이름에 내가 걸려 자빠지고
흔들리는 풀꽃은 냉동된 돌 속에서도 흔들린다
나는 정신병에 걸릴 수도 있는 짐승이다

흔들리는 풀꽃이여, 유명해졌구나
그대가 사람을 만났구나
돌 속에 추억에 의해 부는 바람,
흔들리는 풀꽃이 마음을 흔든다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그대가 있다
불을 기억하고 있는 까마득한 석기 시대,
돌을 깨뜨려 불을 꺼내듯
내 마음 깨드려 이름을 빼내가라

2

게 눈 속에 연꽃은 없었다
晋光의 거품인 양
눈꼽낀 눈으로
게가 뻐끔뻐끔 담배연기를 피워올렸다
눈 속에 들어갈 수 없는 연꽃을
게는, 그러나, 볼 수 있었다

3

투구를 쓴 제가
바다로 가네

포크레인 같은 발로
걸어온 뻘밭

들고 나고 들고 나고
죽고 낳고 죽고 낳고

바다 한가운데에는
바다가 없네

사다리를 타는 게,
게座에 앉네

황지우 <게 눈 속의 연꽃>


바다로 가고 싶은데, 바다로 가서 살아야 하는데 바다로 갈 수 없었던 투구게는 뻘밭이나 기어다니다가 일생을 마친다. 죽어서까지 우리네 일상의 부질없음을 계몽하는 통영수산과학관의 투구게는 거룩하기 짝이 없다.

통영수산과학관을 나와 버스는 한려수도를 관망하기 제일 좋다는 달아공원으로 향한다. 달아라는 이름은 이곳 지형이 코끼리 어금니와 닮았다고 해서 붙여졌다는데 지금은 달구경하기 좋은 곳이라는 뜻으로 쓰인다고 한다. 꼭대기로 오르는 길에도 서서히 동백꽃 망울이 터지고 있었다.

달아공원서 바라 본 한산도(뒷쪽)
달아공원서 바라 본 한산도(뒷쪽) ⓒ 안병기
멀리 저도·송도·학림도·연대도·추도등이 보인다.
멀리 저도·송도·학림도·연대도·추도등이 보인다. ⓒ 안병기
버스는 달아공원을 빠져나와 산양일주도로를 달린다.구불구불한 리아스식 해안이 만들어내는 평화가 내 마음의 사구(沙丘)에 와 모래알처럼 쌓여갔다.


K. 어제는 거제도 몽돌 해수욕장의 민박집에서 하루를 자고 아침에 썰물 들이닥치는 소리에 눈을 떴다네. 이미 창 밖은 환히 밝아 있더군.난 대충 옷을 주워입고 바닷가로 나가 오래도록 수평선을 바라 봤다네. 수평선과 맞다은 하늘은 일출을 보긴 힘들 정도로 온통 먹빛에 젖어있었지. 구름이 비껴선 하늘 한켠엔 초생달이 조용히 떠 있고.

날씨 참 오사게 좋군이라고 중얼거리는 순간 도회의 창틀에 갖혀 있을 그대가 떠 오르더군. 혼자만 이 풍광좋은 바닷가에 와 있다는 게 미안하더라구. 거제도 해안도로를 한 바퀴 돌아 통영 그리고 이젠 육지가 돼버린 미륵도로 향했다네. 아름다운 섬 미륵도는 두 가지를 기다리고 있었어. 56억 7천만년 후에 올 미륵과 이제 한송이씩 피기 시작하는 동백꽃이 보여줄 황홀경을 말야.

미륵도에 가게 되면 꼭 가보리라 마음먹었던 곳이 있었지만 이번 여행길엔 들리지 못해 서운했었네. 근대의 선지식이었던 효봉선사가 오랫동안 주석했던 미래사 거기 가고 싶었거든. 혹시 구산, 법정, 고은 등을 상좌로 거느렸던 효봉스님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서였지. 자연이 안겨주는 풍경도 좋지만 높은 정신의 세계를 거닐었던 선지식의 마음의 여로를 따라가는 여행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일 아니던가.그러나 무정한 버스는 내 마음을 배반한 채 달아공원이라는 곳에 내려놓더군. 한려수도의 여러 섬들이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지.

그곳 관해정에 올라서서 오래도록 바다를 바라 보았어. 대장재도·소장재도와 저도·송도·학림도·연대도·추도 등과 함께 또 하나의 섬인 그대도 함께 떠 오르더군. 순간 나라는 존재의 무거움과 그대라는 존재의 뜨거움이 부딪쳐 내 가슴이 뭉클했지. 그대에겐지 나에겐지 모르지만 아무튼 나는 중얼거렸다네.

"에이, 짠한 사람"

일종의 버릇일테지만 황홀한 경승에 취할 때면 난 늘 존재의 안스러움을 함께 떠올리곤 한다네. 아무 것도 아닌 삶의 맹목성과 허덕임을 생각하지.

아름다운 리아스식 해안선을 졸레졸레 따라니와 다시 통영으로 와 고속도로를 달려 집으로 향했지. 버스가 산청을 지나자 산 기슭에 옹기종기 모여사는 집들. 그 집들을 향하여 구불구불 이어진 산길이 두 눈을 꽉 채우고 그 곡선이 안겨주는 평화가 서서히 마음을 적셔오더군.앞으로는 그대도 내게 그렇게 곡선으로 왔으면 싶었지. 사무치는 직선이 아닌 깊고 유현한 슬픔으로 내게 다가 왔으면 하고 말야.

k
이틀 동안의 여독이 서서히 덮쳐오네. 참, 그대가 좋아하던 매화는 아직 활짝 피지 않았더군. 매화 향기 아득하니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리라던 이육사의 시 한 귀절을 생각했다네. 노래가 되지 못한 향기는 얼마나 맵싸한 것인가. 소음만이 들끓는 내 마음 속으로 참으로 걱정스러운 봄날이 다가오고 있네. 마음 단단히 여미며 사세.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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