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표 연출가이자 극작가인 이윤택이 대중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로 관객을 찾았다. 방송국에서 주최하는 대규모 악극이 중년 이상의 관객을 대상으로 한 효도 상품으로 각광 받는 상황에서 문화 게릴라로 불리는 이윤택의 신파극 도전은 의외로 보인다.
그러나 이윤택은 신파극에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던 90년대 초부터 이 작품을 연구해 왔다. 90년대 초반 부산의 가마골 소극장에서 '연희단 거리패'의 공연이 있었고 1995년에는 동양극장 개관 60주년 기념으로 문화일보홀(구동양극장)에서 이윤택 연출로 공연되었다.
| 이윤택 인터뷰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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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윤택 인터뷰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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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방송국이 주최하는 악극이 기본이 되어있지 않은 쇼에 불과하다며 악극을 하려면 제대로 하라고 일침을 놓는다. 그리고 연희단 거리패의 이번 공연은 신파극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줄 수 있는 기본에 충실한 공연이라고 말한다.
그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10여년 간의 다듬질을 통해 <오구>, <어머니>처럼 '연희단 거리패'의 영원한 레퍼토리가 되었다고 한다.
6일 오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공연되고 있는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연출가 이윤택을 만났다.
- 어느 강연에서 '제 연극이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시를 쓰듯 연극을 했기 때문이다'라고 했는데 '시를 쓰듯 연극을 한다'는 말의 의미를 설명해 달라.
"시적(詩的)이라는 것은 꼭 글로 쓴 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직장 생활하고, 밥 먹고, 결혼하고 하는 이런 현실적인 부분을 산문적이라고 보았을 때 현실을 뛰어넘는 초현실이나 자신만의 꿈과 같은 현실이 아닌 세계, 바꾸어 말하면 한 개인이 열망하는 꿈꾸는 세계가 바로 시적인 세계라고 생각한다.
연극은 결국 현실을 이야기하기보다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꿈을 제공하는 그러한 매체라 생각한다. 이것은 연극이건, 영화이건, 문학이건 마찬가지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편의 시를 쓰듯 연극을 한다라고 말한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인간은 현실만 가지고 살수 없다. 꿈을 먹고살아야 한다. 그 꿈이 바로 시(詩)이고 연극이라고 생각한다."
- 연극을 하기 위해 연극학교에 들어갔다가 그만 두고 13년이 지난 후 다시 연극을 시작했다. 연극을 다시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현실 생활은 단순 반복되기 때문에 따분하다. 단순 반복되는 일상적인 생활이 싫었다. 연극은 한 편, 한 편 할 때마다 인생이 바뀐다. 내가 만약에 백 편의 연극을 하면 백 사람의 인생을 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연극을 했는데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다.
현실 속에서 13년이라는 기간동안 온갖 직장을 다 다녔다. 마지막 직장이 신문기자였다. 직장을 한 열번 이상 옮겨 다니면서 생각한 끝에 난 도저히 직장생활을 하면서 현실 속에서 살아가기 힘들구나 생각했다. 그렇게 다시 연극을 시작했다. 서른 다섯 살에 연극을 다시 시작했다."
- 이윤택을 이야기 할 때 '연희단 거리패', '우리극 연구소', '밀양 연극촌' 이 세 가지를 빼고 이야기 할 수 없다. 특히, '연희단 거리패'는 부산에서 연극을 시작했을 때부터 같이 해왔다. 이윤택의 연극이 만들어지는 '연희단 거리패'에 대해 설명해달라
"한국 전통 연극은 극이라 하지 않고 연희라고 한다. 그래서 '극단'이라고 하지 않고 '연희단'이라고 했다. '거리패'라는 것은 영어로 하면 '스트리트 씨어터'(street theatre)이다. 길거리에서 하는 연극을 말한다. 제가 꿈꿨던 것이 유랑극단이다. 어떤 극장이나 제도에 묶여 있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그러한 극단이다. 그래서 이름을 '연희단 거리패'라고 했다.
단원들도 연극을 전공한 그런 사람보다는 연극은 굉장히 하고 싶은데 연극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 예를 들어 대학극회 출신 사람들이라든지, 아니면 승려라든지, 수녀라든지 이런 연극을 가까이 접할 수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주축이 되었다.
이런 사람들을 모아서 극단을 만들었고 극단을 운영 방식도 같이 먹고, 같이 자고 하는 대단히 강력한 연극 집단이다. 결국은 이상주의 연극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극단과는 다른 자기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생활공간을 확보하고 가족을 떠나서, 집을 떠나서 같이 돌아다니면서 연극하는 그러한 이상적인 유랑극단 형태가 '연희단 거리패'이다.
연희단거리패가 제일 처음 생긴 곳이 부산의 '가마골 소극장'이다. 지금도 있다. 서울의 '우리극 연구소'를 세우고 밀양에 '밀양 연극촌'을 세웠다. 그래서 우리극단 단원들은 부산에 가면 '가마골 소극장', 밀양에 가면 '밀양 연극촌', 서울에 가면 '우리극 연구소', 이렇게 돌아다니고 있다."
- 1988년 '연희단 거리패'를 이끌고 서울로 올라왔다. '연희단 거리패'가 부산의 대표적 극단이었는데 지역에서 연극을 하지 않고 서울로 올라온 이유가 있다면.
"지역문화라는 것이 너무나 폐쇄적이다. 지역문화인들 스스로가 그 지역 속에 갇혀 있으려고 한다. 또 중앙문화라고 불리는 서울 사람들은 지역을 무시한다. 이것은 대단한 불평등 구조이다. 명색이 민주주의 국가에서 문화가 이렇게 불평등한 구조로 되어있다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아무리 좋은 연극을 만들어도 지역연극은 무시하고 아무리 연극을 날림으로 만들어도 서울연극은 좋다고 한다. 이것은 잘못된 구조라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 공연을 가자고 했다.
그때 후배 시인인 죽은 기형도 시인이 '이윤택 서울입성' 이렇게 썼다. 그러니까 서울을 공격한다는 뜻이다. 그런 분위기였다. 서울공연을 88년도 <산씻김>, 89년 <시민 K>, 90년 <오구> 이렇게 삼연타석 홈런을 쳤다.
이러니까 서울 분들은 '왜 지방에서 연극 만들지 왜 서울 오느냐' 하고 나는 '평론가나, 언론매체나, 특히 관객들이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서울은 시장이다. 너희들만의 시장이 아니고 모든 대한민국 문화인들이 다 사용할 수 있는 유통시장인데 내가 여기에 연극을 팔러 왔는데 왜 너희들이 텃세 부리냐' 했다. 부산지역에서는 또 '이윤택이가 출세하려고 서울 갔다'고 했다. 이러한 양쪽의 잘못된 편견 속에서 우리 극단이 끊임없이 서울공연을 하고, 그러면서도 결코 서울에 안주하지 않고 고향인 부산에 '가마골 소극장', 밀양에 연극촌을 세우며 그렇게 18년 동안 했다."
- 서울에 본거지가 없는 상황에서 힘들었을 것 같다. 서울에서 공연하면서 도움을 받은 분이 있다면?
"많다. 제가 88년에 서울에서 <산씻김>을 공연하기 위해 왔을 때는 연극인들이 아무도 몰랐다. 내가 원래 시를 썼기 때문에 문인들이 도와주었다. 소설 쓰는 신경숙씨가 표도 많이 팔아주고, <시민K> 공연 때는 문화부장관으로 있는 이창동 감독이 그때 소설가였는데 <시민K>론을 써주었다. 문인들이 많이 도와주었다.
89년도 <시민K> 했을 때는 연극인들이 많이 알았다. 지금 연극원 원장으로 계시는 김광림 형이 '동숭연극제'에 <시민K>를 초청해 주었고, 채윤일 선배가 <오구>를 처음 연출했고 제가 작가로 참여했다. 이런 식으로 해서 김광림, 채윤일, 산울림 소극장의 임영웅 선생, 현대극장의 김의경 선생 이런 연극계의 선배나 원로들이 지역에서 올라온 촌놈이 똑똑하다고 잘 봐주었다."
- '우리극 연구소'는 어떻게 만들었는가?
"제가 1952년에 태어났는데 벌써 50대가 되었는데 1994년도 그때는 우리 세대가 혈기 방장한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였다. 그때는 이렇게 생각했다.
우리 연극사에서 1920년대 30년대 신극운동이 일어났다. 우리는 1930년대 극예술연구회 중심으로 일어났던 근대극 운동에 버금가는 진정한 현대극 운동을 생각했다. 진정한 현대극 운동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1930년대 일어났던 근대극 운동은 서양연극을 수입하는 수입문화사이고 우리가 1994년에 일으켰던 '우리극 연구소'의 연극운동은 현대적이면서도 한국적인 이제 비로소 우리 연극을 찾는 운동이라는 선언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때 연극원 원장으로 계신 김광림 선생, 그리고 현재 국립극장장으로 있는 김명곤 형도 같이 대화를 했고, 용인대학의 윤광진 교수, 연출가 이병훈, 저 이런 같은 또래의 극작가, 연극연출가들이 모여서 동인 체제로 만들었다."
- 80년대까지 정치 사회적 현실을 고발하는 '상황극'을 만들다가 90년대 들어 '한국적 소재'를 연극 속에 접목시키는 작업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정치적 상황이 바뀐 이유도 있었겠지만 특별히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는가?
"1980년도에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광주민중항쟁도 있었고 그 전에 부마항쟁도 있었고, 당시 제가 신문기자 생활을 했다. 86년까지 신문기자를 하면서 받았던 지식인으로서의 책무의식이라든지, 스트레스가 대단했다. 그리고 '80년대 상황에 연극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젊은 지식인으로서 과연 세상을 어떻게 견뎌야 하고 어떤 발언을 해야 하는가' 하는 심각한 사회적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상황극'이다. 제가 한 것은 '소시민들이 어떻게 이 소시민성을 극복하고 역사의 시대 정신 앞에 정의로울 수 있을까'하는 일련의 상황극들을 만들었다.
그런데 90년대가 되니까 적들이 다 없어졌다. 문민시대라는 것이 정말 웃기는 시대이다.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정치적인 신념 체계가 다른 적들이 어떻게 같이 어울릴 수 있는지 아직까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90년대 들어 정치적 허무가 왔다. 삼당 합당으로 적과 우군이 다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또 일상이라는 것, 대중이라는 무서운 기세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제는 과연 연극이 대중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진정한 대중성, 건강한 대중성으로 연극이 존재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고, 그러면서 우리의 전통을 오늘의 대중적인 정서, 동시대와 전통을 어떻게 함께 할 것인가. 이런 쪽으로 쭉 해왔고, 지금도 그 작업은 계속 되고 있다. 내가 우려했던 소모적이고 말초적인 역대중성이 21세기 본격적으로 대두되고 있어서 연극하기가 갈수록 힘들다."
-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공연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 나는 저항이라 본다. 왜 저항이냐 하면 요즘 악극이라고 많이 한다. 대형 방송국에서 주최해서 나이 드신 분들 돈을 긁어모으는 그것은 연극이 아니다. 정말로 조악한, 조잡한 쇼이다. 그러면서 우리 악극이라고 하는데 분명히 예전에는 악극의 공연형태가 있었다.
아주 세련된 오케스트라와 댄서들이 있었고, 잘 훈련된 배우들이 있었다. 무대 전문 배우들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무대 전문 배우들보다는 탤런트라든지, 무대 경험이 적은 인기 있는 사람들을 같이 모아서 그것을 악극이라고 한다. 아주 불쾌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 근대 대중극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대중극을 하려면 제대로 하자. 바른 것은 바른 것이고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내 나름대로 옛날에 우리가 느꼈던,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정서를 제대로 만들려고 노력해본 것이다.
또 하나는 요즘 영화에서 심한데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해서 대중의 악취미, 엽기적인 것이 유행하고 있다. 엽기라는 것은 사실 사회적 상황이 긴장되어 있을 때는 필요하다. 사회가 긴장되어 그 긴장을 풀기 위한 저항적인 기재로 사용되어야 엽기다운 것이지 사회적 긴장해소가 아니라 엽기 그 자체로 악취미를 하는 것은 대단히 안 좋은 세기말적인 현상이다. 이런 것들이 대중문화의 탈을 쓰고 횡횡하니까 옛 것을 가지고 나와서 옛 것이 이런 정서가 있다라고 하는 것이다."
- 작년에 '연극성을 찾아서'라는 이름으로 체홉의 <하녀들>, 이오네스코의 <수업>,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와 같은 일련의 연극 고전을 공연했다. 이것은 '연극을 하려면 제대로 하자'라는 앞의 이야기와 관련 있는가?
"그렇다. 클래식이라고 한다. 내가 몇 일 전에 2030세대와의 토론회에 나가서 내가 했던 말은 동시대의 예술은 누가 뭐라 하던 젊은이들의 몫이다. 지금 20, 30대 세대들이 지금 세상의 주역들이다. 이 사람들은 이 세상을 잘 경영해야 하고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젊은 세대에게 기본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연극을 하더라도 '연극의 기본이 이것이다'라는 제대로 된 연극을 해야한다.
또 명색이 배운자라면 지식인으로서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자기 역할을 수행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지식인의 역할이다. 그래서 내가 연극인이라면 바로 이런 근대 대중극이라든지, 세계적 고전이라든지, 이런 지난 것들, 지난 것들이지만 시간을 더하면서 영원할 수 있는 작품들을 계속 공연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것이 교과서가 되는 것이니까.
그러한 기본적인 것, 고전적인 것 클래식한 것이 이런 것들이 존재하면서 새로운 실험이나 새로운 젊음이 등장해야지 그런 것이 싸그리 사라진 상태에서 젊은 사람들의 대중적 문화만 성행한다면 이것은 대단히 어두운 시대라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역할은 좀 클래식한 것, 고전적인 것, 옛 것, 이런 것들을 계속 막을 올리는 것이다."
- 1999년부터 '밀양 연극촌'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밀양 연극촌을 만든 이유가 궁금하다.
"서울이건 부산이건 대도시에서 연극을 한다는 것이 점점 어려워 졌다. 첫째는 물가가 비싸고, 둘째는 요즘 젊은이들이 좋은 의미건 나쁜 의미건 대단히 개인주의적이다. 연극은 공동체가 필요하다. 연극을 하기 위해 젊은 친구들을 응집시키기가 굉장히 힘들다. 그래서 아예 이런 개인적 풍토가 만연하는 대도시에 있을 것이 아니고 서로가 공동체를 이루어서 같이 먹고, 같이 자고 같이 작업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지 못하면 제대로 된 연극을 하기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장소를 찾게 됐고 마침 밀양시에서 학교를 제공해 주어서 하게 됐다. "
- '밀양 연극촌'은 어떻게 운영되는가?
"5,000평정도 되는 폐교이다. 큰 학교이다. 그 학교는 밀양시로부터 무상으로 임대한 것이고, 그 외 지원은 없다. 우리가 서울공연, 순회공연을 하면서 먹고사는 것은 우리가 벌어서 충당하고 있다.
매년 7월에 밀양여름 공연예술축제를 벌인다. 그때는 전국에서 젊은 연출가들이 모인다. 그때는 페스티벌을 하고 상도 준다. 올해는 문화관광부에서 해외 공연을 초청하라는 5,000만원의 지원금이 나왔고 밀양시에서도 5,000만원의 지원금이 나와서 비록 작은 규모지만 여름축제가 진행되고 있다."
- 올해 5월에 독일에서 희곡집이 출간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올해 5월에 독일에서 내 희곡집이 출간된다. 전문 연극 전문 출판사에서 최초로 출간된 영광스런 일이다. 출판사가 연극 전문 출판사니까 그쪽에서 희곡 독해를 하자고 제안을 했다.
제가 마침 5월에 베를린 연극제에 참가를 한다. 독일어권 배우들에게 내가 알고 있는 한국 전통의 호흡, 신체, 소리의 연기술을 가르쳐 주는 워크샵을 하기 위해 간다. 그것을 하러 가는 김에 그곳에서 내 책이 출간되고 연극 독해가 이루어지고 그러는 것이다."
- 현재 공연중인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대중극이라 이름 붙혔는데 대중극이 무엇인지 왜 대중극이라 이름 붙혔는지 설명해 달라.
"우리나라만 대중극에 대한 장르 개념이 안된 것 같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대중극이라는 장르가 있고, 지성인과 교양인을 위한 연극 이 두 가지가 다 있다. 그런데 유독 우리나라만 지성인과 교양인을 위한 연극만 연극이라고 치부하고 대중극은 연극이라고 생각 안 한다.
예를 들어 옛날의 탈춤이라든지, 판소리라든지 이런 것이 다 대중극이다. 우리 전통극은 다 대중극이다. 그리고 근대 대중극들 신파극, 악극, 가극이라고 불리었던 그것 모두가 다 대중극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연극사가 너무 지식인 위주의 연극만 연극사로 다루고 대중적인 정서를 다루는 작품은 연극사에 넣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대단히 선민의식에 가득찬 연극사였기 때문에 내가 거기에 대한 반성적 입장에서 대중극이라 이름 붙혔다."
-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대표적 신파극이다. 그 이유 말고 특별히 이 작품을 공연하게 된 이유가 있다면
"이 작품이 요즘하는 신파극, 악극 레퍼토리와 다르다. 요즘 하는 것들은 효, 이별 이런 것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금지 작품이었다. 불온 희곡이었다. 물론 임선규라는 작가가 월북작가이기도 하지만 이 내용이 유산자제와 무산자제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마르크스의 계급주의 관점으로 분석이 가능한 사회적 전형이 강한 작품이다.
다시 말하면 이 작품은 단순한 대중극이 아니고 아주 심각한 사회극이다. 사회 계급의 갈등, 충돌, 배신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요즘 악극에서 다루고 있는 볼거리와는 다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회의 불평등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대단히 잘 쓴 작품이다. 이 작품은 연극학자들도 우리나라의 대표 희곡 중 하나로 이미 인정한 작품이다."
-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연출함에 있어서 1930년대 동양극장에서 공연했던 연극 그대로를 충실히 따랐는가 아니면 이윤택식으로 재창조했는가?
"화술이라든지 연기론, 연기적 양식 같은 것은 대단히 충실하려고 했다. 예전에 했던 분들에게 고증도 받고 훈련도 받고 그랬다. 그러나 연출 스타일은 전혀 다르다. 연출을 하는 입장은 요즘의 관점에서 하려고 했다. 특히 젊은이들 정서에 통할 수 있도록 했다.
요즘 악극들은 관객이 나이든 사람들만 온다. 제가하는 이 연극은 관객층이 다양하다. 젊은 대학생들, 중학생들, 고등학생들, 물론 나이드신 분들까지. 제가 지금 하려는 것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눈물을 자극하려는 것이 아니고 예전의 대중극이지만 지금 21세기에 봐도 어린이부터 청소년 어른까지 다 같이 즐길 수 있는 오늘의 공연양식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 내 입장이다. 연기방식은 이어받으면서 연출은 재창조했다."
- 90년대 초부터 '연희단 거리패'에서 이 작품을 연구해 온 것으로 안다. 이 작품이 <오구>나 <어머니>처럼 '연희단 거리패'의 레파토리가 될 것인가?
"<오구>, <어머니>처럼 이제는 레퍼토리화 될 수 있을 것 같다. <오구> 같은 작품은 대학생들이 연극을 해도 재밌다. 하지만 이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배우들이 전문성을 갖추지 않으면 재미가 없다. <오구>는 희곡 연출의 힘으로 가지만 이 작품은 배우들이 준비가 안 돼면 못 간다. 그래서 이 작품은 10년 가까이 연희단거리패에서 도전해온 작품이다. 지금에 와서야 이 정도되면 클래식한 미학을 지키고 젊은층부터 나이드신 분들까지 볼 수 있겠구나. 그런 전력을 갖추었구나 하는 단계에 왔다. 이제는 우리극단의 영원한 레퍼토리로 남을 것이다."
- <오구>를 영화화 한 <잘가세요>는 어디까지 진행되었는가?
"촬영 다 끝났다. CG작업, 특수촬영까지 어제(3월 5일) 다 끝났다. 그리고 원일이라는 작곡가가 이번 토요일날(3월 7일) 녹음 들어간다. 3월 15일까지 일단 녹음을 끝내고 개봉은 5월 말쯤 개봉할 것이다.
3월 15일날 끝내고 나서 이제 자막처리도 해야되고 해외 영화제도 보내야 되고 홍보, 마케팅도 해야된다. 그러다 보면 아마 5월 말, 6월 정도에 개봉 할 것이다. 그때가 마침 블록버스터 매트릭스나 이런 영화들이 나올 것 같은데 같이 붙을 것 같다. "
- <잘가세요> 이후 계속 영화를 연출할 계획인가?
"여건이 된다면. 내가 만든 오구가 최소한 손해보지 않고, 영화사를 망하지 않게 하고 오늘의 영화 매니아들에게, 관객들에게 사랑 받는다면 아주 조심스럽게 영화를 하고 싶다."
- 이후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가?
"올해 원로 작가이신 차범석 선생님이 쓰신 신작 희곡을 연출하게 되고 제 은사분이신 윤대성 선생님이 쓰신 명동 블루스, 대중극인데 그 작품을 연출하게 된다. 대 원로분과 제 은사분의 작품을 연출가로서 연출하게 된다. 그리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연출할 것이다.
내가 연출하지 않지만 직접 제작하는 작품으로 '우리극 연구소' 윤광진 교수가 연출하는 체홉의 <갈매기>, 젊은 연출가들이 준비하는 창작극 두 편, 이것이 내가 올해 제작할 작품들이다. 지금 내가 다 연출하는 것이 아니라 창작극은 젊은 연출가들이 하게 하고, 체홉 같은 경우는 그런 작품을 잘 할 수 있는 연출가에게 맡기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셰익스피어 좋아하니까 셰익스피어작품을 연출한다.
그리고 국립극단에서 연출의뢰가 들어왔다. 9월에 국립극장 해오름 극장에서 공연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공연정보>
공 연 명 :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공연기간 : 2003 3. 1 ~ 3. 23
공연장소 :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
문의전화 : 02)790-62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