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으로 넘어가는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대로변의 한 비닐하우스 단지가 화재로 앙상한 뼈대를 들어내고 있다. 대부분의 비닐하우스는 화재로 주저앉아 버렸고 주변은 소방차가 뿜었을 축축한 물기로 덮여있었다. 바로 옆에 위치한 산으로 불이 번졌으면 큰 산불이 날 뻔한 아찔한 사건이다.
더 가까이 다가가 봤다. 자세히 살펴보니 노란색의 경찰 저지선으로 둘러싸인 현장에서 타다만 옷가지와 이불들이 매케한 냄새 속에 드러나 보였다. 그 비참한 화재의 현장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사는 곳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무너진 하우스의 한 가운데에는 경찰 감식반이 한창 조사를 벌이고 있었다. 산불을 걱정할 게 아니었다. 바로 그 장소에서 한 생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 거동이 불편했던 신분호(84) 할머니가 미처 화재를 피하지 못하고 팔과 다리가 모두 탄 채로 숨져있었던 것이다.
그곳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사건은 19일 새벽 2시경 모두가 잠든 밤에 벌어졌다. 내곡동 화훼단지 농가에 방화로 보이는 화재가 발생하여 5동의 비닐하우스(10세대 주거용)가 전소되고 신 할머니가 사망하는 인명피해가 났다. 새벽기도를 드리고 있던 한 주민이 일찍 화재를 발견해 그 곳에 살던 주민 40여명은 다행히 모두 빠져 나왔다.
화재가 진압되고 날이 밝았지만 갈 곳 없는 주민들은 옷가지 하나 건질 것 없는 현장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속옷에 벗은 발로 뛰쳐 나와야했던 주민들은 친척들에게서 신발이며 옷을 다 빌려 입고 있는 실정이었다.
비록 그 곳에 살지는 않았지만 삶의 터전을 잃은 주민보다 더 가슴아픈 사람은 화마에 어머니를 잃은 조상영(여, 48)씨였다. 경찰 조사를 받는 사이 신 할머니의 시신이 경찰에 의해 수습되었다는 사실을 안 조씨는 "경찰이 가족의 동의도 없이 어머니의 시신을 훔쳐갔다"며 애타고 억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초소 만들고 방범 서지 않았다면 다 죽었을 거야"
예전에 하던 꽃 농장도 어려워져 그만둔 뒤로 더욱 궁핍해졌다는 주민들은 없는 돈을 모아서 마을 입구에 컨테이너 초소까지 마련해 놓고있었다. 매일같이 3명씩 조를 이뤄 밤 10시부터 아침 6시까지 방범을 서고 자체 순찰까지 돌았다고 한다. 이유는 올해만 5번 일어난 화재때문이다.
초소 안에 있는 게시판에는 순번대로 매일 세 명씩의 주민 이름이 적혀있었다. 주민들은 이런 상황에서 벌어진 이 모든 화재가 자신들을 내쫓기 위한 고의적인 방화라고 굳게 믿고 있다. 한 주민은 "이렇게까지 대비하지 않았다면 간밤에 주민들이 다 죽고 이 사건을 맡은 경찰은 전기합선에 의한 단순사고라고 발표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민들에 의하면 지난 1월부터 지금까지 사전 예고도 없이 3월 31일까지 모두 나가달라는 내용증명서가 땅주인으로부터 3번 날아왔다고 한다. 신충식(여, 55)씨는 땅 주인이 보낸 사람이 여기까지 찾아와선 "3월말까지 집을 안 비우면 무력행사 합니다. 불조심하세요. 걱정됩니다"고 말했다며 땅주인 쪽에서 강제로 철거할 의사까지 내비쳤다고 한다.
20년 전부터 이곳에 산 이후로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는 화재가 불과 20여일 사이에 무려 4차례나 발생했다는 사실 앞에서 방화를 의심하지 않을 주민들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주민 임종선씨도 "갈 곳 없는 사람들한테 돈 많은 땅주인이 인도적으로도 할 수 있는데 이럴 수가 있냐"며 "그 동안 불이 또 날까봐 신발도 신은 채 자고 물탱크에 물도 가득 채우고 살아왔다"고 하소연했다.
임씨는 또 "서울에만 1만 명이 넘는 집 없는 사람들이 비닐하우스에 살고 있다"면서 "재개발이다, 관공서 입주다 해서 그들도 우리와 같은 땅주인에 의한 방화사건을 겪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태를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땅주인으로부터 3번의 내용증명을 받은 주민 장병창 목사는 "처음 이곳에 살게 되었을 때는 꼬박 월세를 내왔기 때문에 사실상 주거가 인정돼 왔었는데 현 땅주인으로 바뀌고 나서부터는 주는 돈도 안 받았다"며 정당한 보상도 없이 자신들을 내보내려 하는 땅주인 쪽의 처사를 비난했다.
"갈 곳 없는 주민들은 불안합니다"
땅을 소유한 모 회사 쪽으로부터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 부속시설의 건립과 관련한 토지매입 소문을 들은 주민들은 국정원으로 이에 대한 질의서와 진정서를 3월 15일에 보냈다고 한다.
주민들은 진정서에 '저희 주민들은 이곳을 생활터전으로 20여 년간 평온하게 살아 왔으나 1)지주의 철거 통고 2)잇따른 방화사건 3)국정원 부속시설 건립 소문 등으로 주민들은 생활터전의 박탈 우려와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습니다'고 적은 후 그간에 벌어진 4차례의 화재사건의 경과를 자세히 밝혀 놓았다.
그 후 며칠이 지나지도 않아서 주민들이 우려했던 5번째 화재가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발생했다. 그것도 무고한 한 할머니의 목숨을 앗아간 사태였기 때문에 살아남은 주민들의 슬픔과 분노가 더 커 보였다.
접수된 진정서에 대해서 국정원 관계자는 "국정원 건물 설립과 관련한 내용은 국가기밀 사항이기 때문에 확인해 줄 수가 없다"고 밝힌 후 "내곡동 주민들 문제는 땅 주인과 관련된 민사상의 사건이라 국정원이 관여할 입장이 아니다"고 말했다.
20일 현재 조상영씨는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강남성모병원 영안실에 안치되어 있는 신 할머니에 대한 장례식을 거부하고 있다. 아직까지 경찰은 '이번 화재가 방화인지 단순화재인지는 더 조사해봐야 알 수 있다'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