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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미스(C. Douglas Lummis)는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에서 두 가지 얘기를 합니다. 하나는 해외로 군대를 보내기 위해 일본헌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을 비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와 발전에 대한 잘못된 상식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 책표지
ⓒ 녹색평론사
지금 이 순간에도 이라크 사람들의 머리 위로 폭탄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목표물을 정확하게 조준해서 떨어뜨린다 해도 어긋날 수 있고 정확히 떨어진다 해도 그 파편이 주변에 사는 민간인들을 덮칩니다. 군수시설만 파괴한다 해도 땅은 그 공장 속의 화학물질로 오염되고 더럽혀져 생물이 자랄 수 없게 됩니다. 전기가 끊어진 캄캄한 어둠 속에서 사람들은 언제 죽음이 찾아올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며 살아야 합니다. 이보다 더 끔찍한 현실이 있을까요?

전쟁이 좋은 뜻을 품을 수 있을까요? 러미스는 냉전 이후 전쟁에 대한 공포가 더욱 늘어나는 이상한 현상을 지적합니다.

“1989년부터 1998년까지 10년간 108건의 무력분쟁이 세계에서 일어났습니다. 국제법에서는 내정간섭에 대한 강력한 금지를 명시하고 있지만, 그것은 약화되어, 예전이라면 ‘침략’이라고 불렸던 행동도 지금은 ‘인도적 개입’이라고 불려지게 되었습니다”(15쪽).

‘평화를 위한 전쟁’, ‘대량살상무기를 없애기 위한 대량살상무기의 동원’이라니, 모순된 말의 잔치입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 나오는 빅 브라더처럼 부시는 사람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전쟁에는 결코 인도(人道)나 선(善), 정의(正義)가 있을 수 없습니다.

정말 인도나 정의를 추구한다면 폭탄이 아니라 빵을 투하해야 합니다. 걸프전 이후 무역금지조치로 12년 동안 굶주려 온 이라크 국민들에게는 하나에 수백만 달러나 하는 크루즈 미사일이 아니라 단돈 몇 푼에 불과한 빵이 더 절실히 필요합니다. 폭격과 화염이 아니라 빵이 이라크 국민들에게 자유를 향한 의지와 힘을 줄 겁니다.

부시는 이번 전쟁에 ‘이라크 자유작전(?)’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름을 갖다 붙였습니다. 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입니까? 자유는 누가 누구에게, 강자가 약자에게 선물로 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자신의 힘으로 찾고 실현할 때에만 진정한 자유가 될 수 있습니다. 그와 비슷한 말이 ‘발전’입니다. “영어의 develop(발전한다)는 본래는 자동사입니다. 타동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언어로서 적당치 않게 들립니다. 국가 A가 국가 B의 ‘발전’을 정책으로 삼고 있는데 그 표현은, 자동사라니, 이것은 큰 모순입니다”(62쪽). 발전도 스스로 이루는 것이지 남이 만들어주는 게 아닙니다.

서구가 선물로 주겠다고 약속하는 자유와 발전은 똑같이 잘못된 착각일 뿐입니다. 자유와 발전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가는 겁니다.

글쓴이 소개

글쓴이/ 더글러스 러미스(C. Douglas Lummis): 1936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출생.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분교 졸업. 정치사상 전공. 1960년에 미해병대에 입대하여 오키나와에서 근무. 1961년에 제대 후, 버클리로 되돌아가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 다시 70년대 초 일본으로 와서 활동을 시작함. 1980년에 도쿄에 있는 쓰다(津田塾) 대학 교수가 되어 2000년 3월 정년퇴임. 현재는 오키나와에 거주하면서 집필과 강연을 중심으로 사회운동을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래디칼 데모크라시>, <래디칼한 일본국 헌법>, <헌법과 전쟁>, <이데올로기로서의 영어회화> 등이 있다.
옮긴이/ 김종철: 1947년 경남 출생. 영남대학교 영문과 교수. 격월간 <녹색평론> 발행-편집인.
이반: 1956년 출생. 충북 제천시 백운면 거주.
러미스는 하와이 대학의 럼멜(R.J. Rummel)이라는 사람의 얘기를 빌어 전쟁을 반대합니다. 럼멜 사람의 주장에 따르면, 20세기 동안 2억331만9000명이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100년 동안 약 2억 명이 살해당했다니 믿을 수 없는 숫자죠.(이 숫자에는 나치 독일이 살해한 600만 명, 스탈린이 살해한 사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떤 기준을 들이대는가에 따라 다른 통계가 나올 수 있기에 백 프로 믿지 못할지라도 전쟁의 비극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국가간의 전쟁에서도 군인이 죽는 수보다도 비전투원 사망자 수가 반드시 더 많습니다.…비전투원은 무기도 갖고 있지 않고, 자기방어 훈련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몸을 지킬 방법을 모릅니다. 전장에서 되는 대로 도망가지만, 매우 죽이기 쉽습니다”(35쪽). 하물며 수십,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날아가는 미사일은 군인과 민간인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이번 전쟁의 뒷배경에 석유를 둘러싼 이권이 숨어있다고 합니다. 중동과 세계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욕심, 신무기의 성능을 자랑해 무기시장을 장악하려는 의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약한 자를 짓밟고 쥐어짜서 자기 배를 채우려는 더러운 욕심이 숨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침략과 전쟁만 있는 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침략과 정복도 있습니다.

러미스는 소위 ‘발전 이데올로기’가 그런 보이지 않는 침략과 정복을 대표한다고 얘기합니다.

“이 새로운 학문분야는 이른바 미국정부의 정책 변화에 따라 창립되었다고 보면 좋습니다. 그런 학자들은 자신의 학문분야가 중립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지만 실은 지극히 정치적인 정책에 의해 생긴 분야입니다. 그 일을 위해 막대한 돈이 투입됐습니다.…국방성 장학금의 조건은 정부가 정한 ‘전략적으로 중요한 언어’를 하나 공부하는 것, 즉 정부가 배우길 바라는 제3세계의 언어를 어느 것이나 하나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경제발전 이데올로기를 공부합니다. 그러면 3년간 생활비와 학비를 대줍니다. 대단히 많은 액수의 장학금이었습니다. 내 동료 중에도 자신의 흥미나 관심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면 돈이 들어오기 때문에 전공을 바꾼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학문분야를 돈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남(南)’의 국가에서 온 젊고 유능한 사람들을 불러 미국의 대학에서 박사가 될 때까지 길러,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를 집어넣은 다음 그의 나라로 돌려보냅니다. 각 나라의 ‘경제발전 엘리트’를 길렀던 것입니다. 그것도 의도적인 국가정책이었습니다. 그에 따라 발전 이데올로기는 엄청난 힘을 지닌 이데올로기로 변해갔습니다”
(76쪽).

자유와 발전이라는 잘 포장된 껍데기는 약자의 희생과 착취를 감춥니다. 멕시코 정글에서 말과 무기로 싸우고 있는 사빠띠스따의 마르코스는 미국의 주도하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유고의 코소보에서 벌였던 전쟁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 전쟁에서 돈은 우리 모두에게 밀로세비치의 ‘인종 청소’ 전쟁을 지지하든가 아니면 NATO의 ‘인도주의’ 전쟁을 지지하라며 어느 한쪽 편을 들라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과 평화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두 전쟁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은 돈이 부리는 술수일 뿐입니다. 권력이 시장화된 세계에 내놓는 것은 똑같은 전쟁을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시킨 것뿐입니다.

그것은 온갖 취향과 온갖 호주머니를 만족시킬 수 있는 온갖 색깔과 맛, 크기, 형태로 나옵니다. 하지만 결과는 항상 똑같습니다. 항상 파괴뿐이고, 항상 고통뿐이고, 항상 죽음뿐입니다”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에서).

이제 권력과 자본이 만든 논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입니다.

러미스는 비판만이 아니라 자기 나름의 대안을 제시합니다(하지만 조금 공허하게 느껴집니다. 허공을 맴돌다 금새 흩어져 버릴 것 같은).

그의 첫 번째 해법은 민주주의에 힘을 실어주는 겁니다. 러미스는 풍요롭게 사는 비결이 전쟁이나 경제발전이 아니라 정의(正義)를 실현하는 정치에 있다고 봅니다.

“빈부의 차이란 경제발전에 따라 해소되는 것이 아닙니다. 빈부의 차이는 정의(正義)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경제학의 입장에서 보면, 빈부의 차이가 나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정의라는 말은 경제학의 용어가 아닙니다.…‘정의’란 정치용어입니다. 빈부의 차이는 경제활동으로 고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빈부의 차이를 고치려고 한다면 정치활동, 즉 의논하고 정책을 결정하여, 그것을 없앨 수 있는 사회나 경제구조로 바꾸지 않으면 안됩니다”(92쪽).

또 다른 대안은 분별없고 파괴적인 경제성장을 중단하는 ‘제로성장’입니다.

“제로성장을 환영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나 집이 없어 떠도는 사람, 직장을 잃은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 정책은 오히려 그런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구조, 곧 안전망 만들기를 목표로 삼습니다. 오늘날의 경쟁사회를 상호부조라고 할까, 예컨대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는 살기 좋은 사회로 바꿔간다는 것을 뜻합니다”(97쪽).

지금 우리의 정치는 어떤가요? 노무현 정부는 ‘국익’을 위해서 ‘더러운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합니다. 마치 기업처럼 이익을 좇는 태도입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당장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그 사람의 목숨과 내 이익을 바꾼다면, 나중에 우리가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나 몰라라 하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러미스는 지금의 세계를 타이타닉호에 비유합니다. 눈 앞에 빙산이 덮쳐오는데도 절대 침몰하지 않는다고 허풍을 떨며 파멸을 향해 나아가는 타이타닉호.

“근본적인 해결을 구하는 사람들은 유토피아주의자, 꿈을 꾸고 있는 사람, 낭만주의자, 상아탑 속의 사람이라고 불려지고, 현상을 그대로 계속할 것을 말하는 사람이 ‘현실주의자’가 됩니다.…오늘날 이 지구라는 타이타닉호에 타고 있는 우리들은 빙산을 향해서 가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선내방송에서 몇 번이나 “빙산에 부딪힙니다”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모두가 귀에 못이 박힐 만큼 들어왔습니다. 그 말이 진부할 정도로, 더 듣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 말을 하면 사람들은 “또 그 얘기?”라고 합니다”(16쪽).

침몰하지 않으려면 지금 여기서 멈춰야 합니다. 전쟁을 막아야 할 뿐 아니라 다시는 전쟁을 벌일 수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무한경쟁과 끝없는 이윤추구를 그만 둬야 할 뿐 아니라 경제라는 개념 자체를 다시 한번 생각하고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노력과 실천은 ‘지금 당장’ 필요합니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 개정판

C. 더글러스 러미스 지음, 이반.김종철 옮김, 녹색평론사(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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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고 싶어서 가입을 했습니다. 인터넷 한겨레 하니리포터에도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기자라는 거창한(?) 호칭은 싫어합니다. 책읽기를 좋아하는지라 주로 책동네에 글을 쓰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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