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60-70년대 건강, 미용, 육아, 음식 등을 망라한 여성생활백과를 흔히 보았다. 많은 미혼여성들은 이 여성생활백과를 보며 시집갈 꿈을 꾸었고, 이 전집은 혼수일 정도로 중요한 책이었다. 하지만 80년대 이후 이 여성생활백과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고등교육을 받으면서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이 여성생활백과가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이름은 <규합총서(閨閤叢書)>인데 1809년(순종 9년) 빙허각(憑虛閣) 이씨(李氏)가 부녀자를 위하여 엮은 책이다. 이 규합총서는 실제 살림을 맡았던 안방마님이 직접 한글로 쓴 것이다. 현재 목판본 1책(가람문고본), 필사본(2권 1책)으로 된 부인필지(1권 1책,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및 개인소장본(필사본 6권) 등이 전해지고 있다.
글쓴이 빙허각 이씨는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 서유구(徐有)의 형수이다. 빙허각은 여사(女士:여자선비)라 불릴 정도로 총명하고 학문에도 능해 시동생인 서유구를 가르쳤음은 물론 평생을 남편과 학문적인 토론을 나누고, 시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빙허각은 자신의 경험과 옛 글 그리고 주변 여성들의 지혜로운 생활 방식들을 모아 자신의 딸들에게 주고자 규합총서를 서술하였다.
규합총서는 가정살림에 대한 책으로 ‘주식의(酒食議)’, ‘봉임측(縫姙測)’, ‘산가락(山家樂)’, ‘청낭결(靑囊訣)’, ‘술수략(術數略)’ 등으로 나누어 써있다. ‘주식의’에는 장 담그기, 술 빚기, 밥, 떡, 과줄(약과), 반찬 만들기가 들어 있다. 또 ‘봉임측’에는 옷 만들기, 물들이기, 길쌈, 수놓기, 누에치기, 그릇 때우기, 불 켜기 등이, ‘산가락’에는 밭 갈고 작물 키우기, 가축 기르기 등 농가 생활에 필요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또 ‘청낭결’에는 산모와 아기에 관한 기록
이 규합총서를 보면 조선시대 우리 조상들의 삶을 되돌아보고, 귀중한 지혜를 얻게 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한글로 되었다 해도 옛글과 현대어가 달라진 것이 많아 이해하기도 어려울뿐더러 구체적인 방법은 알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규합총서 현대판의 출간이야말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즈음 한국전통음식연구소 윤숙자 소장이 규합총서 중 ‘주식의’편을 골라 현대에 맞게 재현해 음식을 만들고 사진을 찍어 누구나 쉽게 전통음식을 접할 수 있도록 한 책을 펴냈다.
"규합총서(閨閤叢書)는 저에게 우리 전통음식의 매력에 푹 빠지게 한 책입니다. 200여 년이 흐른 옛날 책을 현대판으로 재현하다 보니 부족한 점도 있지만 전통음식에 관심이 많은 후배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윤 소장은 어떻게 이 책을 만들게 되었을까? 윤 소장은 배화여자대학 전통조리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규합총서란 과목으로 10여 년 동안 강의를 했다. 그러나 한글 고어체로 쓰인 책을 가지고 우리 음식의 우수성을 전달하는데 한계를 느꼈고, 그래서 전통음식연구소를 차려 규합총서 재현을 최우선 과제로 꼽아 2년간 집중 작업한 끝에 완성했다고 한다.
윤 소장이 새로 낸 '규합총서'는 제 1 부엔 ‘오가피주’, ‘과하주’ 등 술 16종, 제 2 부엔 ‘팥물밥’, ‘삼합미음’ 등 밥과 죽 종류 11종, 제 3 부엔 어육장, 전복김치 등 장과 김치 13종, 제 4 부엔 준치탕, 메추라기찜, 송이찜 등 생선붙이(생선류), 고기반찬, 나무새붙이(채소류) 등 37종, 제 5 부엔 원소병, 두떱떡 등 떡, 과줄붙이(약과류) 28종 등 모두 1백38가지 음식을 소개하고 있다.
원문에는 간략하고 추상적으로 써있지만 계량단위를 현대식으로 바꾸고, 만드는 법도 번호를 달아 쉽게 정리했다. 보는 이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재현한 음식의 천연색 사진과 더불어 전통 부엌의 살림살이와 각종 조리기구를 함께 실었다. 또 책 뒤에는 <규합총서> ‘원문영인본’과 찾아보기를 달아 충실을 기했다.
이 책은 도서출판 ‘질시루’가 펴냈으며, 358쪽 전면 천연색(올칼라) 인쇄 값은 28,000원이다. 전통음식을 연구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우리 민족이면 모두가 소장해도 좋을만한 소중한 책이라는 확신을 준다.
여기서 참고로 ‘한국전통음식연구소’와 부설기관들도 아울러 소개해본다.
부설기관들은 ‘떡연구실’이 있으며, 한국전통음식을 대중화하고, 일반인에게 전수, 보급하기 위한 교육사업을 하는 ‘평생교육원’이 있다. 이 ‘평생교육원’은 떡, 한과, 전통음식, 장류, 장아찌 등을 주 1회 배우는 반과 차, 음청류, 전통주를 주 1회 수업하는 반이 있다. 1기에 무려 700여명이 공부를 하고 있다고 윤소장은 귀띔한다.
여기에 조리학계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4년제 학사과정 ‘전통조리학과’ 과정이 있고, 외국인들을 위한 ‘전통음식문화 체험장’이 있다. 또 개인이 차리기엔 쉽지 않은 박물관이 2개나 있다. 그 하나는 ‘부엌살림박물관’이며, 또 하나는 ‘떡박물관’이다.
먼저 2층에 있는 ‘부엌살림박물관’에 들어서면 우선 ‘오첩반상’과 우리의 향수를 자극하는 ‘장독대’가 맞아준다. 여기엔 주발을 비롯한 막사기, 종지, 수저 등의 식기류와 두부틀 등의 조리용 도구 및 기구류, 막소반, 두리반 등의 상과 소반류, 각종 세시풍속의 의례용구, 장독 등 저장발효용기류, 다구(茶具:차도구) 및 의료용 약기류 등이 전시돼 있다. 그런가하면 세시풍속과 명절에 즐기는 음식들을 재현에 놓았다.
박물관을 돌아보면 ‘두견화전’, ‘진달래화채’, 등 보기에 아름다운 음식이나 ‘개장국’, ‘초교탕’ 등 평상시에 쉽게 볼 수 없었던 음식들이 설날, 대보름, 삼짇날, 초파일, 유두, 삼복, 추석, 중양절, 동지 등의 명절에 맞춰 재현해 놓아 옛 전통을 살리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잇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3층으로 올라가면 ‘떡박물관’이 떡 버티고 나의 입속에 침을 고이게 한다. ‘떡박물관’에는 떡을 만드는 방법에 따라 ‘찐떡’, ‘친떡(시루떡)’, ‘지진떡’, ‘삶은떡’과 만드는 과정에 필요한 ‘떡살’, ‘다식판’, ‘약과틀’, ‘떡메’, ‘떡틀’ ‘떡목판’, ‘떡가위’, ‘멧돌’, ‘시루’, ‘절구’, ‘체’ 등 기구들, 떡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전통차와 전통주 등을 전시하고 있다.
우리는 ‘무시루떡’, ‘느티떡’, ‘차륜병’, ‘부꾸미’, ‘오메기떡’, ‘닭알떡’ 등의 이름이 생소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박물관에 가보면 이러한 떡들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 그저 우리 몸에 잘 맞지 않는 서양식의 빵이 아닌 조상 대대로 우리 몸에 맞춰온 훌륭한 음식인 떡과 그 떡을 만드는 기구들을 새롭게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1층에 가면 이 떡들을 그대로 시식할 수 있는 현대식 떡 카페가 있다. 이곳은 그저 전통식으로 카페를 만든 것이 아니라 전통을 현대화한 실내장식으로 꾸미고 있다. 옛날식의 대들보가 아닌 현대감각을 살린 대들보를 볼 수 있으며, 벽은 옛집의 돌담을 연상케하는 구조로 되었다. 식탁과 의자는 역시 음향오행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져 있다고 설명한다.
나는 이 떡 카페를 보면서 아름다운 실내장식과 훌륭한 음식이 조화된 대단한 카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프랜차이즈 사업이 어떠냐고 물으니 떡의 특성 때문에 많은 연구가 필요하여 시간이 걸릴 것이란다.
윤 소장은 어떻게 이런 전통음식을 좋아하고, 전통음식의 전승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저의 친정은 개성입니다. 어머니께서 음식을 아주 잘 하셨고, 좋아하셨지요. 그런 어머니 밑에서 저는 늘 좋은 전통음식을 향유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서울의 13대 토박이에게 시집와보니 시할머니께서 역시 음식을 하는데 아주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이셨지요.
자연스럽게 친정어머니와 시할머니의 두 분의 능력을 모두 이어받게 되고, 그것이 상승효과를 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할머니께서 하라는 대로 음식을 하니 고기가 맛있고, 연하고 깔끔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우리의 전통음식들을 제대로 연구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겨 공부를 하게 되었지요.”
윤 소장은 전통음식을 공부하면서 개성과 서울 음식만이 아닌 온 나라의 음식을 알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음식을 잘하는 분이 있다면 그 분을 찾아 전국을 누비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부엌살림과 조리기구 등을 모으게 되었으며, 이것들을 혼자 보기에는 아까워 박물관을 만들게 되었다고 말한다. 나는 이 말을 들으며, 이런 박물관은 소중한 것인데 개인이 운영하기는 벅찬 것이어서 정부가 많은 지원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윤 소장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저는 떡에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 전통음식 중 김치 다음으로 좋은 것인데 이 떡에는 과일, 채소, 오곡, 한약재 등이 들어가는 약이 되는 식품입니다. 떡과 한과를 집중적으로 많이 가르쳐 떡집, 떡 카페가 많이 생겨 온 국민이 떡을 많이 먹도록 할 계획입니다.”
마지막으로 나는 전통음식연구소장으로서 우리 국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주문했다.
“ 우리 것, 즉 한복, 음식 등이 좋다는 것은 한국 사람이면 모두가 공통적으로 느낄 것입니다. 그런데 좋다고만 생각하고, 그것을 생활에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국민들입니다. 따라서 자라나는 아이들과 식구들에게 우리 것이 귀중하다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윤 소장은 내가 방문했을 때인 늦은 1시 30분까지도 식사를 못하고 있었다. 많은 수강생들이 소장과 직접 면담하기를 원해 마음이 여린 윤 소장이 거절하지 못하고 모두 만나주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최정환 전통음식연구소 후원회장의 이야기이다.
나는 윤 소장을 인터뷰하면서 지도자과정을 수료한 사람들이 만든 귀중한 구절판 음식을 맛본다. 취재를 다니면서 흔히 받는 대접은 커피나 녹차에 불과하다. 역시 ‘한국전통음식연구소’의 접대문화도 참 독특하고, 전통적이란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