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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보훈가족'이 되었다. 국가보훈처(홍성지청)에서 보내 주는 <報勳新聞>을 받아서 읽게 되니 내가 보훈가족이 된 사실이 좀더 실감되는 것 같고 여러 가지 보훈 관련 사항들에 대해서도 자연히 많은 관심을 갖게 된다.

몸에 여러 가지 심각한 질병들을 안고 산다. 평생 동안 애써 관리를 하며 살아야 할 병들이다.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그 좋아하던 술도 거의 끊고(어느 자리에서든 소주 딱 1잔으로 음주 욕구를 위무하고 해결한다), 음식 조절에 최대한 신경을 쓰고, 매일같이 오후에는 백화산을 오른다. 먹고 마시는 기본적인 재미와 즐거움을 스스로 억제하며 살아야 하는 비애와 쓸쓸함 속에서 나 자신이 좀더 진지해지고 명료해지는 듯한 새로운 기쁨들을 얻어 가고 있다.

내 몸에 질병이 찾아든 것을 안 지는 꽤 오래 되었다. 베트남 전쟁에 함께 참전했던 주위 동료들의 권유로 지난 1999년 여름 천안 순천향병원의 진단서를 얻어다가 국가보훈처 홍성지청에 '고엽제 후유증' 검진 신청을 했다. 그 후 아무런 연락이 없어서 나도 별 생각 없이 바쁘게 살다보니 금세 몇 년이 지나가 버렸다.

그러다가 지난해 말 딸아이의 고교 진학 문제로 딸아이와 함께 천안엘 갔다 오다가 서해안고속도로 서산휴게소에서 파월전우인 김용순(태안천주교회 사목회장)씨를 만난 것이 나로서는 큰 행운이었다. 태안 성당 교우로서 내 경제 형편과 건강 상태를 잘 알고 있는 김용순씨는 앞으로의 큰 교육비 부담을 걱정하는 내게 고엽제 후유증 검진 관련 사항을 물었다. 그 동안 교회에서 수없이 만나고 살면서도, 전에는 서로 한 번도 화제로 삼지 않았던 사항이었다.

김용순씨로부터 핀잔을 듣고 채근을 받은 나는 집에 오는 즉시 홍성보훈지청으로 전화를 걸어 여러 가지 사항들을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서둘러 서류를 갖추어 홍성으로 달려갔다. 연말의 바쁜 상황 속에서도 참으로 친절하고 상세하게 안내를 해주고 서류를 접수해 준 홍성보훈지청 직원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으로 나는 묵은 한해를 기쁘게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나는 금년 2월 4일 대전보훈병원에 가서 정밀 검진을 받았다. 여러 가지 종합 검진을 받는 동안 나를 포함한 왕년의 파월 장병들(이제는 건강을 잃고 불우한 처지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최선을 다해 친절하게 대해 준 보훈병원 의료진과 관계자들에게 감사하는 마음 크다.

그리고 지난 3월 3일 딸아이의 고교 입학식 관계로 천안에 갔을 때 나는 홍성보훈지청 관계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내가 제7급 '국가유공자'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그것을 하느님께서 내게 베푸신 크신 은덕으로 생각한다.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월남전 고엽제 후유증 보상 관련법을 제정해 준 정치권 인사들, 국가보훈처 홍성지청과 대전보훈병원 직원들, 참전군인회 관계자들, 파월전우이며 교우인 김용순씨와 내 딸아이에게도 깊이 감사했다.

국가유공자에 대한 여러 가지 보상들 중에서도 아이들의 학교 수업료를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전액 면제받게 된 것이, 결혼을 워낙 늦게 하여 아직 아이들이 어린 나로서는 무엇보다도 다행스런 일이었다. 가난한 소설가인 아빠에게 경제적 부담을 많이 안기게 된 것을 미안해하는 딸아이는 한 시름을 놓은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요즘 내 건강에 대해서 신경을 더 많이 쓴다. 새벽부터 오전 내내 컴퓨터 앞에서 작업을 하고 나면 오후에는 건강 관리에 많은 시간을 투여한다. 건강이 더 악화되면 국가유공자 등급이 상향 조절될 수도 있겠지만, 현재의 7급에다가 나를 단단히 묶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요즘은 '보훈'이라는 말의 의미와 질감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곤 한다. 보훈 대상자들에 대한 보훈 업무를 담당하는 국가보훈처의 원래 이름이 '원호처'였음을 기억하고 있다. 원호처가 1985년 국가보훈처로 개칭되고 장관급 부서로 승격한 일은 참으로 옳은 일이었다. 돕고 보호한다는 뜻의 '원호'보다는 보답을 한다는 뜻의 '보훈'이라는 말이 더욱 적극적이고 명확하며, 그것을 시행하는 국가나 향유하는 국민 모두 위신이 한결 떳떳해지고 커지는 이치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장관급 부서였던 국가보훈처가 김영삼 '문민정부' 시절인 1995년 차관급 기관으로 낮추어진 것은 생각하면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국가와 국민의 위신을 스스로 낮춘 염치없는 짓이었다. 국가유공자들에 대한 보훈을 전담하면서 그와 관련하는 포괄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부서의 위상을 낮춘 것은 김영삼 문민정부의 중대한 실책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상황을 겪었으면서도 국가 위신을 확실하게 세워주는 보훈의 실체는 국가보훈처 직원들의 자존심을 지닌 적극적인 업무 태도에서도 잘 드러난다고 느껴진다.

김대중 '국민의 정부' 시절에도 국가보훈처의 위상과 국가 위신의 상관성에 대한 별다른 의식이 정권 담당자들에게 없었음을 아쉽게 생각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에서는 보훈에 대한 확실한 가치인식의 진전이 있기를 기대하며, 더불어 보훈의 실체가 더욱 명확하고 발전적이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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