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면 벚꽃도 좋고, 멀리 제주도엔 유채꽃이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올해 벚꽃은 이상한 날씨 탓에 제대로 피었는지 조차 의문이고, 제주도로 유채꽃을 보러가기엔 시간과 돈이 너무나 빠듯합니다. 그러던 중,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포항 호미곶에 유채꽃이 만발했다는 사진뉴스를 봤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말에는 멀리 갈 것 없이 울산에서 경주, 감포를 거쳐 포항으로 이어지는 해안도로를 따라 가보기로 했습니다. 종착지는 호미곶에 만발했다는 유채꽃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한동안 겨울이 다시 시작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춥더니, 금요일 쯤엔 비가 꽤 많이도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러다가 내일 유채꽃을 찾아가는 여행은 접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토요일 아침 잠에서 깨어나 보니 비온 뒤의 청량함과 함께 밝고 따뜻한 봄날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31번 국도를 타고 바다를 보며 가는 길은 전혀 지루하지 않습니다. 중간중간에 만나는 작은 포구도 정겹고, 드넓은 바다와 갈매기떼를 보는 것도 운치 가득합니다. 그리고 곳곳에 있는 신라시대의 문화유적지를 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이 길을 따라 가다 보면 제일먼저 만날 수 있는 유적지가 대왕암입니다. 옛날 자신이 죽으면 바다의 용이 되어 침범하는 왜구를 막겠노라는 신라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왕이 잠들어 있다는 곳이 바로 대왕암입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하는 연구도 있었다고 하네요. 그렇지만 진위 여부를 떠나 잠시나마 옛이야기에 취할 수 있는 곳임은 분명합니다.
대왕암은 이견대에서 보면 더욱 좋습니다. 이견대는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의 모습이 보였다는 곳으로, 아들 신문왕이 천금의 보배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얻었다는 곳이라고 하죠. 깔끔하게 정비된 것이 최근에 다시 보수된 것 같네요.
이까지 온 김에 길을 조금 둘러 가 감은사지까지 가보기로 합니다. 감은사는 용이 된 아버지 문무왕이 편히 쉴 수 있게 아들 신문왕이 지은 절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금당터와 동서양탑만 남아 있습니다. 훼손이 심하다고는 하지만,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는 두 기의 탑은 언제봐도 늠름합니다. 그리고 금당터 밑부분엔 꽤 넓은 공간이 있습니다. 실제로 용이 이 곳을 드나들며 쉬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옛날 이야기를 생각하니 많은 그림이 떠오르는군요.
감은사와 대종천(大鐘川) 사이로 난 감포가도를 따라 기림사까지 가보기로 했습니다. 신라 신문왕 이전부터 있었다고 하니 어림잡아 1400년 가까이 된 절입니다. 흔히들 천년고찰이라고 해 유서깊은 절을 이르는데 기림사가 바로 그런 절입니다. 들리는 말로는 옛날 기림사가 본사고 불국사가 말사였다고 하니 꽤 큰 절이었던 셈이죠.
중건에 중건을 거듭해 지금은 말끔하게 정비돼 있어 천년고찰에 어울릴 법한 고풍스런 분위기는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드넓은 가람배치와 경내 곳곳에 피어있는 벚꽃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습니다. 시간이 멈춘 듯 하다는 느낌은 바로 이런 때 쓰는 것일까요. 긴의자에 앉아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있으니 사르르 잠이 옵니다.
다시 차를 돌려 오늘의 종착지인 호미곶을 따라 갑니다. 해마다 1월 1일이 되면 이 도로는 거대한 주차장으로 변한답니다. 동해를 뚫고 힘차게 솟아 오르는 새해 첫해를 보려는 사람들이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죠. 한적한 어촌이었던 이 곳이 이제는 전국적인 명소가 된 것입니다.
옛날 제가 국민학교(지금은 초등학교죠)에 다니던 시절 토끼 꼬리라고 배웠던 곳이 바로 이 곳입니다. 요즘은 토끼꼬리라고 하면 아마 큰일 날 겁니다. 호랑이 꼬리죠. 그래서 이 곳의 이름도 호미곶(虎尾串)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처음 지어졌다는 등대박물관도 여기에 있습니다.
호미곶에는 해맞이 광장이 조성돼 있습니다. 오늘의 종착지인 유채꽃도 바로 광장 옆에 피어 있습니다. 제주도엔 한번도 가본 적이 없어 사실 유채꽃이 이렇게 장관을 이루고 있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이었습니다. 노란 유채꽃이 발디딜틈 없이 피어 있더군요. 멀리 보이는 파란 바다와 노란 유채꽃 바다가 한 데 어우러져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두고 장관이라고 하는 것이구나 하는 느낌이 절로 들었습니다.
봄이면 왠지 마음이 들뜹니다. 사람들의 물결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피곤할 것이 분명한 벚꽃구경도 그럴 줄 뻔히 알면서도 가고 싶어 마음이 들썩들썩하고, 잡지나 신문에서 보는 봄의 풍경에 한동안 그 곳에 있는 상상을 하느라 멍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춘곤증에 시달리며 나른함에 못견뎌 하기도 합니다. 이래저래 사람을 참 가만 놔두지 않는 것이 봄인 것 같네요.
그래도 올해 봄은 제게 참 예쁘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하루 동안의 가깝고도 짧은 여행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어째 허풍 같기도 합니다만, 번잡하지도, 각박하지도 않은 먼 옛날 신라의 봄길을 밟고 온 것 같은 묘한 여운이 아직 남아 있어 가는 이 봄을 언제까지라도 붙잡아 두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