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한국의 정당은 사회 내에 존재하는 다양하며 갈등하는 이익들을 제대로 대표하지 않는다. 즉 일반 시민과 정당 사이에는 크나큰 괴리가 존재한다. 정당은 국민들이 정치라는 체제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매개적 도구 역할을 수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국민과 정당 간에 괴리가 존재하여, 국민들의 의사와 이해관계가 하나의 정치체제에 반영되지 않는 것이 현재 한국정당체제의 특징이다.
민주화 이전까지는 정권에 대한 반대자들을 공산주의자, 빨갱이의 주장이라고 억압하며, 정치적 의제설정과정과 대표체계에서 이들을 배제해 버림으로써, 다양한 정치적 의견이 자유롭게 표출될 수 있는 기회를 막아 버렸다. 하지만 1987년 민주화 이후, 정치적 공간이 열림으로써, 이전보다 정치적 의사의 표출이 자유로워졌다. 그러나 이러한 표출은 상대적인 것으로, 민주화 이전에 비해 조금 나아졌을 뿐, 실질적으로 반공과 냉전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세계적인 탈냉전 이후에도 존속되고 있는 한반도의 긴장관계와 함께 여전히 높은 장벽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정치적 의제설정 및 담론의 형성 그리고 경쟁성이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제약으로 말미암아, 자유롭지 못한 관계로 우리는 정치 사회에서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 유일하다시피 하여 지역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이에 대한 많은 반론이 있을 줄로 안다. 필자 역시 지역이라는 하나의 변수로 모든 현상을 환원시켜 생각할 수 없음은 자인하는 바이다.)
지역의 정치적 동원은 1987년 이전에도 존재하긴 했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역주의, 지역감정은 민주화 이후 대선에서 민주화 세력을 자부한 양김이 결국 후보단일화를 이루지 못하고 각각 자신의 지역적 기반을 정치적으로 동원함으로써 생겨났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생겨난 지역주의는 1990년 민주정의당(노태우), 통일민주당(김영삼), 신민주공화당(김종필), 이 3당의 합당의 결과물인 민주자유당의 탄생으로 비호남의 호남배제적 지역주의로 변화하게 되었다.
단지 전라도를 지역적 기반으로 하는 평화민주당을 정치에서 소외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합당을 통해 여소야대의 곤궁함을 벗어난 민자당은 꾸준히 호남을 소외, 배제시키는 정책을 추친함과 아울러 강력한 정적(政敵)인 김대중을 정치적 무대에서 퇴장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 후, 이러한 호남배제적 지역주의는 완화된 반면, 기득이익 / 정권을 빼앗긴 한나라당(신한국당에서 개명)은 공격적 지역주의로서 영남중심주의를 정치적으로 동원함으로써, 김대중 정권의 임기 내내 김대중 대통령을 압박하였다.
비록 현정권이 김대중과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민주당 정권임에도 불구하고, 호남이 지역주의에 민감한 점은 정권이 바뀌었어도 실질적으로 호남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여러 영역에서 제대로 참여하지 못하고 있으며, 언제든지 소외될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해서, 호남인들은 전부터 가지고 있던 방어적 지역주의를 떨어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호남인들은 왜 아직도 소극적이며 방어적인 지역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로서 필자는, 한국에서의 지역주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가치의 배분에 있어, 그동안 호남은 항상 소외되고 배제되어 왔다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흔히 지역주의라고 하면, 영남편중인사 / 영남편중개발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이야기된다. 그렇다면 비영남, 비호남인 충청도와 강원도, 제주도에서는 왜 영남, 호남과 같은 지역주의가 생겨나지 않았는가?
이것은 바로 이들 지역을 정치적으로 동원하고, 배제하고자 하는 정치적 동기를 가진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고 충청, 강원, 제주 지역이 영남중심적 지역주의에 표면적으로 반대의 의사를 내지 않은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그것은 한국의 지역주의가 서울로의 초중심주의가 낳은 기형아이기 때문이다. 정치학자 그레고리 헨더슨(G. Henderson)은 “서울은 단순히 한국의 최대 도시가 아니라 서울이 곧 한국이다”라고 지적하면서, 한국의 중앙집중화를 ‘소용돌이의 정치(the polticis of the vortex)'라는 용어로 표현한 것처럼, 서울로의 집중현상은 사회 전 분야에 걸쳐 매우 높은 집중도를 보여주고 있다.
민주주의는 한 사회의 중심을 다원화하는 경향을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권위주의, 절대주의 등의 비민주적 정치체제는 권력과 영향력을 단일 중심으로 응집시키는 경향이 강하다. 1987년 민주화는 이러한 권위주의의 응집된 힘을 해체하고 다원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전 국토의 0.6%에 불과한 서울이 전체 인국의 20%를 차지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자원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현상은 정상적인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따라서 한국의 지역감정을 영남과 호남 간의 지역간의 갈등의 구조로 볼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지역주의의 정치가 서울로의 초집중화 및 그에 따른 호남의 배제라는 갈등구조에 기인한 것이라고 봐야 하며, 한국의 지역주의는 사회 전 분야가 집중된 서울에서의 자원, 지위, 가치의 획득을 둘러싼 갈등이며, 이 과정에서 호남은 의도적으로 배제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지역감정의 대립은 중앙 엘리트 사이의 권력을 둘러싼 경쟁의 산물일 뿐, 그것이 영남과 호남의 지역민이 갖는 문화적 특성이나 어떤 사회경제적 이해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현재 제기되고 있는 ‘호남소외론’은 비호남의 호남배제적 지역주의 관성과 가치의 서울로의 초집중적 현상이 빚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최근에 제기되고 있는 ‘호남소외론’은 현정부의 인사정책, 지역개발정책 등에 대한 불만족에서 출발하고 있다. 또한 ‘호남소외론’은 호남인 자신들의 지지했던 노무현 정권이 자신들을 차별, 소외하고 있다는 아쉬움을 나타낸 것이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호남소외론’은 3월 11일 검사장급 이상 검찰 고위간부 인사와 3월 14일 노 대통령이 대북송금 특검법을 수용하면서부터 불거지게 되었다. 게다가 3월 26일 이창동 장관이 광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노 대통령의 대선 당시 공약이었던 ‘광주 문화수도 육성’에 대해서 현재 계획이 없다는 발언을 함으로 해서 ‘호남소외론’ 논란을 확대시켰다. 그리고 4월 1일 단행된 행정자치부 인사에서 호남지역 출신 공무원들의 승진이 적었던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호남소외론’ 논쟁을 증폭시켰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전라도 지역 언론과 정치인들은 현 정부에 들어와서 호남이 역차별받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호남소외론’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특히 ‘호남소외론’은 그동안 호남으로부터 독점적 지지를 받아온 민주당 내부에서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호남소외론’ 주장의 중심에는 지역주의의 피해자이자 수혜자였던 이른바 구주류 의원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정당인, 정치인이 아닌 일반 시민인 필자가 보기에는 작금의 ‘호남소외론’ 논란은 여당의 집안싸움으로 비쳐진다.
‘호남소외론’을 주장하는 것은 호남에 거주하면서 생활하는 전라도민에게 나온 측면보다는 오히려 호남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정치인과 그 지역 의원이라는 점에서, ‘호남소외론’ 주장은 실제적인 면보다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들의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민주당 내의 신 / 구주류간의 갈등은 비단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작년 민주당 경선과정 그리고 대선 과정에서 보여준 신 / 구주류간의 갈등과 대립은 민주당의 정체성마저 의심하기에 충분했으며, 구주류중의 일부는 탈당했다 여의치 않아 다시 민주당으로 복귀하였고, 또다른 일부는 민주당과는 여러모로 거리가 있는 한나라당에 입당하는 정치적 모험(?)도 감행한 만큼 갈등의 강도는 매우 강했다.
이 와중에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면서 정당 개혁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고, 민주당 내 신 / 구주류간의 갈등과 대립은 더욱더 거세져갔다. 하지만 신주류측의 ‘민주당의 발전적 해체’와 같은 정당개혁 논의는 현재 실종되어 버렸고, 신주류와 구주류 간의 힘겨루기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 지금의 민주당이다.
원내 소수이긴 하지만 여당으로서 정권 초기, 대통령과 뜻과 힘을 모아 산적한 현안들에 대해 협의하고 협조하며 정책을 추진해야 할 민주당은 이러한 내분으로 말미암아 정국대처능력에 있어 한계를 드러내며, 한국의 정당정치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정계개편 및 내년 총선에서 구주류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지역주의를 동원하려는 것은 아닌지 지극히 의심스럽다. 좋지 않은 시니리오라 생각되지만, 만약 구주류가 취약해지고 있는 자신의 지역 및 당내 지지기반을 확보, 강화하기 위해, ‘호남소외론’을 주장하고 이를 해소할 사람은 자신들 밖에 없다는 식으로 주장하면서 노무현 대통령과 민주당에 대한 호남민들의 지지를 분리시키고자 한다면 이는 매우 바람직스럽지 못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러한 의도로 ‘호남소외론’을 제기, 주장한다면,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세력'인 호남이 민주당에서 지지를 철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탈한 사람들이 구주류 자신들을 지지한다는 보장도 없다. 왜냐하면 호남민들이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던 것은 그가 단지 민주당의 후보여서라기보다는 정치에 새바람을 불어넣어주며 기존의 낡은 정치를 새롭게, 공정하게, 깨끗하게 바꾸어 줄 것을 기대했기 때문에 노무현과 민주당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신주류의 민주당에서 이탈한 호남에서의 지지가 구주류 자신에게도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도 자신들이 호남지역의 맹주라고 착각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지역주의를 조장하고 동원하였던 그들이 그렇게 비판했던 정치와 다를 바 없다.
2.
정당이란 무엇인가? 대의제 민주주의 하에서 정당은 사회 내에 존재하는 다양하고 경쟁하는 갈등과 이해관계를 수렴하고 이를 대표하여 정치(체제)에 반영하고, 정책이라는 산물을 생산하는 정치적 기재인 것이다.
유럽은 왕과 귀족들이 보유했던 주권과 기본권이 성장하는 부르주아 계층으로 확대되는 과정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유명인사, 귀족, 엘리트들이 중심이 되었던 간부정당(cadre party)은 산업혁명을 계기로 대중들의 정치적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결국 대중정당(mass party)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과 근대화라는 역사적 물결 속에서 시민들은 그들의 정치적 요구를 관철시키려고 하였고, 이는 선거권의 확대로 이어져 대중정당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서구의 정당은 시민, 대중들을 정치적으로 동원하기 위해 사회 내에 존재하는 갈등과 이해관계를 대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의 정당체제에서는 반공과 냉전이라는 이데올로기의 높은 장벽으로 인해, 노동이나 좌파와 같은 정치 세력이 대표될 수 없었다.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냉전과 반공주의는 그 이외의 다른 정치적 담론과 목소리의 표출을 강압적으로 억제하였던 까닭이다. 이 때문에 한국의 정당 역시 이런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냉전과 반공이라고 하는 자리에서 보수화되고 말았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고 평가될 수 있는 민주당 역시, 그 역사적 기원을 더듬어 보자면 한나라당과 마찬가지로 보수 정당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정당은 도대체 누구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고, 누구를 대변하고 대표하는가? 아직도 이데올로기, 기득 이익에서 자유롭지 못한 정당이기에 사회 내 존재하는 다양한 갈등과 정치적 균열을 제대로 대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 한국의 정당체제이다. 따라서 정당 간의 이념적, 정책적 거리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상황에서 자기 정당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은 서로 다른 지역을 정치적으로 동원하는 것이었다.
이 점은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E. E. Schattchneider)가 말한 편향성의 동원(mobilization of bias)라는 용어로 표현되어질 수 있는데, 정책적, 이념적 거리가 비슷한 한국의 정당들은 1987년 민주화 이후 대중의 동원이 필요할 때, 정치 갈등의 영역을 전국적으로 최대화하여 계층, 계급, 직능 / 기능적 이익과 균열에 따라 대중을 동원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구정당 체제의 틀 속에서 지역을 수직적으로 분획함으로써 국지화된 갈등축에 따라 대중을 동원한 결과, 한국의 정당체제는 지역정당체제라는 특징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즉 일반 대중의 이익보다는 엘리트의 이해관계에 크게 유리한 편향성의 동원이 제도화되었다.
따라서 한국의 정당은 정당답지 못해 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당은 정당다운 정당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민주당이 민주당만의 이념적 색채와 정책의 비전을 제시하며 지역이 아닌, 국가이익의 관점에서 사회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갈등과 균열을 대변하고 대표할 수 있는 정당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 내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정치적 성향을 가진 구성원들로 인해 정책정당으로의 변신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는 현재의 정치적 이해관계의 구도를 바꾼다는 것은 자신의 지지기반을 일정 부분 포기함으로써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당이 정당다운 면모를 갖추기 위해서는 노 대통령 당선 이후, 신주류가 주장했던 ‘민주당의 발전적 해체’를 통해, 정치적 견해와 비전 그리고 정치적 이해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 정당의 색채를 분명히 함으로써 새롭게 태어날 것을 제안한다.
또다시 지역을 볼모로 자신들의 기득이익을 보존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다면, 그리고 또다시 지역민과 지역주의를 정치적으로 동원하고자 한다면, 지역주의 완화를 통한 정치발전 및 개혁은 또 한번 멀어지게 될 것이다.
민주당이 해체되고 뜻이 같은 하는 사람들이 서로 모여 새로운 정당을 결성한다면, 정치권은 정계개편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겠지만, 이 과정을 거치면서 국민들의 의사와 여론에 민감하며 정당의 수직적 책임성이 강화된 민주적 정당이 형성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것으로 생각한다. 의제설정 및 정당정책 형성 그리고 공천과정의 민주화는 우리나라 정당정치에 의미있는 기여를 할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이제 대한민국에서 호남의 소외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호남에 대한 배제를 뛰어넘어 이를 타파하는 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에 있어 필수적인 과제이다. 이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정치인과 언론이 이를 확대, 조장하여 자신들의 기득이익을 보존하고자 하는 것은 국민과 국가를 위한 길이 결코 아님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지역감정, 지역주의에 기대어 정치적 생명을 유지하고자 하는 정치인에 대해서는 성숙된 시민들이 냉정하게 판단하고 심판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한 참여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특히 여론형성의 한 기재로서 인터넷이 이러한 역할을 하는데 있어 매우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
정치발전의 가능성은 지난 대선에서 국민참여경선과 노사모의 활동, 여중생 추모집회와 반전집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능성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지역감정을 정치적으로 동원하여 자신의 정치적 생명의 연장을 기도하는 정치인이 두 번 다시 여의도에 발을 못 붙이게 위해,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시민들의 성숙된 의식과 참여로써 이들을 정치에서 배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정당들이 지역을 뛰어넘어 국민의 이익을 대변해 줄 정책정당으로 변화할 것을 촉구하면서, 서로 다른 이념, 정견으로 모여 있으면서도 정치적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민주당의 창조적 해체를 제안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