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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노무현은 '바보'로 불리웠다. 대통령 노무현은 '놈현스럽다'로 불리운다. 지칭하는 대상이 동일인물이라면 '바보'와 '놈현스럽다'의 의미는 서로 상통해야 한다. 그러나 이 두 단어의 의미를 같은 맥락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 그럴까. 다음의 국면은 이러한 궁금증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제시해 준다.

#1. 노무현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대북송금 특검제 불가피론'을 역설해왔다. 불투명한 과정을 거친 것에 대해 많은 국민들이 의혹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정작 국회에서 특검법안이 통과되자, 대통령은 각종 메세지를 통해 '거부할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짙게 풍기기 시작했다. 그 뉘앙스에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걸었다(심지어 김대중 전 대통령까지).

그러나 3월 14일. 공포 시한을 하루 앞둔 날 대통령은 대부분의 국무위원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특검법 공포를 강행했다. 서프라이즈의 논객 장신기씨는 이에서 느낀 당혹감을 '노무현 쇼크'로 표현했다.

#2.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던 그날, 노무현 대통령은 신속하게 '미국 지지'를 국내외에 선언했다. 그리고 국회에 파병 동의안을 처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전쟁과 파병에 반대하는 여론히 강력히 제기되며 국회의 파병 동의안 처리가 연기되기 시작하자, 대통령은 '지지 선언' 때 보여주었던 신속함과는 달리 이에 대해 별다른 입장을 표시하지 않는 '뜨뜻미지근함'을 보였다.

그러자 그의 지지자들 사이로 '대통령은 국회에서 파병 안건이 부결되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라는 말이 유포되기 시작하고, 한나라당은 대통령의 이중적 태도를 비판했다.

그러나 4월 2일 대통령은 국정연설을 통해 '국회가 반드시 파병안을 처리해 줄 것'을 다시금 요청했고, 파병안은 통과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대통령은 베트남전 유가족들을 청와대로 불러 뜬금없는 '눈물'을 보였다.

#3. 검찰과 행정자치부의 인사 결과 및 특검법 공포, 호남 고속철 연기설 등으로 이른바 '호남 소외론'이 급격하게 퍼지자 대통령은 뜻밖에 김대중 전 대통령을 청와대로 초청한다.

'병문안'으로 겉포장을 했으나 김 전 대통령은 병세 때문이 아닌 건강 검진을 목적으로 입원했던 것이었고, 또 통념상 '병문안'은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을 직접 방문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겉포장은 본래 의미를 넘어서는 뉘앙스를 풍겼다.

TV를 통해 노 대통령이 김 전 대통령을 극진히 예우하는 모습이 비추어졌다. 재보선을 이틀 앞둔 22일의 일이었다.


정치인 노무현이 대중으로부터 사랑받았던 이유는 너무도 '바보스러운' 그의 정공법 때문이었다. 좀더 큰 대의를 이루기 위해 우선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의 지지자와 참모들이 쉴 새 없이 말했지만 그는 굽히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하여 부산에서만 4번 낙선. 온갖 정치공학이 난무하는 한국 정치사회에서 그의 바보스러운 정공법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고, 지지자들은 그러한 그를 아낌없이 사랑했다.

그러나 취임 50일이 지난 지금, 대통령 노무현이 취해 온 일련의 정치적 과정을 되짚어 보면 이른바 '제스처 정치'의 냄새가 짙게 난다. 무모할 정도로 고집스러웠던 그의 정공법은 보이지 않고, '모두를 실망시키지 않으려는' 목적의 제스처가 난무한다. 정치인과 대통령은 다를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당연하다. 내가 제기하는 것은 방법상의 문제이다. 미-이라크 전에 한국군을 보내야 하는 것이 대통령으로서 취해야 할 대의였다면, 그러한 문제도 노무현식 정공법으로 돌파해야 하는 것 아닌가?

물론 '평검사들과의 토론'에서는 그의 정공법을 유감없이 맛볼 수 있었다. 보수 과점 언론과 여전히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은 여전히 대중 앞에 나선다. 때로는 그가 후보시절부터 줄기차게 주장해 온 '책임총리제', '각 부처로의 권한 이양'이라는 언표가 무색해짐을 느낄 정도이다. 그러나 뚜렷한 원칙이 보이지 않는 연이은 제스처 속에서 그의 지지자들은 갈팡질팡하고 있다. '할 것처럼 하더니 안하고, 안할 것처럼 하더니 하는' 대통령의 제스처가 급기야 '놈현스럽다'는 언어까지 발생시킨 것이다.

어느 칼럼니스트는 '노무현이라는 개인은 대통령에 당선된 그 때 최고의 정점에 달한 것이다'라고 분석한 바 있다. 그렇다. 대통령 노무현은 정치인 노무현이 지켜왔던 가치나 원칙을 때로는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대통령으로서도 예전 모습과 동일해 주길 바라는 지지자들을 실망시키게 될 수밖에 없다. 대통령 임기 5년이 '개인'으로서의 노무현에게는 하강 국면이 될 것임이 필연인 이유이다.

<문화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대통령은 '개혁적 지지자들의 균열'을 아프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토로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시작이라고 본다. '개혁'이라는 것이 현실과 이상으로 갈려 있는 한 이상적 개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현실적 개혁의 틀 안에 놓이게 될 대통령에게서 멀어지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현재 그의 지지자들이 분열하는 이유가 '대통령의 현실적 개혁 추구' 때문만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정치인 노무현의 '바보스러운' 정공법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의 확고한 역사 의식 때문이었다. 그는 일찌감치 대통령이 가져야 할 요소 중 하나로 '역사 의식'을 꼽고 있었고, 그 의식의 구체적인 형태는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 지역 갈등 해소, 경제 재분배 구조 개혁, 정당의 변화등을 핵심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특검법 수용에 관한 한 노무현 대통령은 그러한 역사 의식에 떳떳한 결정을 내렸다고 볼 수 없다. 대통령은 햇볕정책의 성과를 송두리째 뒤흔들 수도 있는 이 결정을 내림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고뇌하는 모습 대신 모두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한 절충적 방안만을 찾는 모습을 대중들에게 노출시켰다.

그리고 이로 인해 지지층의 분열이 가속화하고 호남 소외론이 대두되자, 재보선을 이틀 앞둔 시기에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나는 이벤트를 벌였다. 이러한 일련의 '제스처'에 지지자들이 실망한 것이지, 결코 그의 현실적 개혁 추구 때문에 실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로부터도 욕을 먹지 않는 대통령이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대통령이 욕을 먹어야 하는 이유는, 결코 '대통령의 이념적, 정치적 변절' 때문이 되어서는 안된다. 정치인과 대통령으로서 생길 수밖에 없는 이상과 현실의 간극 때문이어야 한다. 나는 후자의 이유로 노무현 대통령이 그의 지지자들에게 실망을 끼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시작은 역사 의식 없는, 그저 누구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한 '제스처 정치'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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