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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국정에 대한 구상을 준비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재사에게 한밤중에 평범한 노인 하나가 찾아왔다.
"대대로님, 이 늙은이의 소원 한 가지만 들어주십시오."
하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온 늙은이에게 재사는 약간 귀찮음을 느꼈지만 평범한 백성의 말을 듣는 것도 국정의 일부라는 마음가짐으로 그를 맞이했다.
"그래 무슨 일이오?"
"제 딸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꼭 대대로 님을 만나서 할말이 있다고 하기에 이 늙은이 무례함을 알면서도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재사는 약간 어이가 없었지만 노인의 말이 워낙 절절하게 느껴져 그 길로 그의 집으로 갔다. 노인의 집에는 아직 젊은 나이의 여인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앓아 누워 있었다. 그는 재사를 보자 예의를 갖추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재사는 그대로 누워있기를 권했지만 여인은 급한 목소리로 먼저 자신의 아버지를 내보내고선 행여 문 바깥에서 다른 사람이 엿듣지나 않은지 확인까지 하고선 재사에게 말했다.
"전 왕궁에서 왕비마마의 시중을 들던 궁녀이옵니다. 깊은 병이 들어 궁궐에서 나와 집에서 요양을 하던 중 죽기 전에 대대로께 꼭 드릴 말씀이 있어 결례를 무릅쓰고 여기까지 오시라고 부탁드렸습니다."
"그래 무슨 일인가?"
궁녀는 한숨을 몰아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재사에게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참 뒤 방에서 나온 재사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낯빛마저도 창백했다.
"대체 무슨 일이옵니까?"
재사는 하인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다음날부터 재사는 앓아 눕기 시작해 집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했다. 재사가 몇 일간 나오질 않자 자연 걱정이 된 주몽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직접 재사의 집으로 찾아갔다.
"어찌된 일이오? 전에는 묵거가 병들어 짐의 곁을 떠나더니 이젠 공이 앓아 누워 날 슬프게 하는구려."
재사는 핏기 없는 얼굴로 주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뜬금없이 한 마디를 던졌다.
"전하, 묵거가 예전에 유언으로 남긴 말을 기억하십니까?"
"기억하다 말다요. 미움을 가지지 말라고 하지 않았소."
재사는 뭔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가슴속에 응어리진 무엇이 그의 입을 가로막았다. 결국 재사는 혼절해 쓰러지고 말았다.
"아무래서 대대로께선 무엇인가 할말을 못하고 계신 듯 합니다."
을소의 지적에 주몽은 재사가 다시 깨어나기를 기다렸다가 좌우를 물리친 후 재사를 단독으로 만났다.
"이제 여긴 짐과 대대로 밖엔 없소. 밖에는 병사들이 엄격히 사람들을 막고 있으니 감히 엿듣는 사람은 없을 것이오. 자, 이제 편히 얘길 해주시오."
주몽은 재사에게 직접 미음까지 건네어 주며 그의 마음을 편하게 다독였다. 한참 동안 뜸을 들인 재사는 그제야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전하,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를 들으시기 전에 꼭 약조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내 반드시 약조하리다."
"이 일에 연루된 사람들을 벌하는 일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고구려는 막 건국된 나라, 모든 것에 아량을 베풀고 미움을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알겠소이다. 자, 어서 얘기해 보시오."
주몽은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묵거가 죽기 전에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아시옵니까? 행인국의 왕 주자아의 행방이 묘연한 것은 어찌된 일인지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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