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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에서 만난 김 클라우디아씨
안산에서 만난 김 클라우디아씨 ⓒ 김진석
햇살을 벗 삼아 그저 발길 닿는대로 훌쩍 떠나버리고 싶은 5월이 다가왔다. 이른 더위에 땀방울이 맺힌 그녀의 얼굴은 금방 여행이라도 떠날 것처럼 상기되어 있었다. 우즈베키스탄 교포2세 김 클라우디아(50). 한국에서 일곱 번째 해를 맞이하고 있는 그녀는 우리와 같은 핏줄을 지닌 (고려인)외국인 노동자이다.

"97년 인천을 시작으로 서울을 거쳐 지금의 안산에 오게 됐어요. 처음엔 말도 마세요. 지금이니까 이렇게 웃으며 얘기하지만, 그 당시 IMF까지 터지면서 고생 엄청 했어요. 한국말도 전혀 할 줄 몰랐고, 또 '외국인' 이었잖아요."

연신 웃으며 말하는 그녀가 처음을 회상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환한 웃음을 술래로 희미한 상흔이 숨바꼭질을 한다. 그녀는 '외국인' 이었음을 힘주어 말하며 더 이상 구체적인 얘기를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아버님이 한국에서 태어나 10살에 우즈베키스탄으로 오셨어요. 항상 아버님이 죽기 전에 고향 땅을 꼭 밟아보고 싶다고 하셨는데, 결국엔 그냥 돌아가시고 말았어요. 솔직히 어린 시절엔 한국을 그리워하는 부모님이 이해가 안 됐어요. 아버님이 살아 계셨다면 같이 아버님의 고향에도 한번 다녀오고 싶은데, 이제서야 그게 아쉽네요.

처음엔 그저 같은 핏줄이라는 호기심에 놀러왔어요. 관광 비자로 놀러왔는데 벌써 7년이 돼버렸네요. 한국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었어요. 근데 처음엔 정말 고생 많이 했어요. '같은 민족인 내가 이렇게 힘들면 다른 민족인 외국인 노동자들은 나보다 얼마나 더 힘들까' 라는 생각으로 견딜 수 있었어요."

50이란 나이는 허울에 불과하다. '앞으로 한국에 더 남아 좋은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50이란 나이는 허울에 불과하다. '앞으로 한국에 더 남아 좋은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 김진석
김치, 된장, 고추장 등 좋아하는 한국 음식을 줄줄이 읊어 대는 그녀는 영락없이 한국 사람이다. 러시아 방송보다는 한국 드라마를 더 재미있어하고, 전화만 하는 러시아 친구들 보다 정 깊은 한국 친구들을 더 좋아하는 그녀는 우리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한국 사람들은 참 못 놀아요.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 까지 모두가 열심히 일을 해요. 우리 고향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처럼 열심히 일을 했다면 아마 지금쯤 부자가 됐을 거예요. 우리는 일한 사람과 일하지 않은 사람이 똑같이 월급을 받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열심히 일을 하지 않았어요. 근데 한국은 일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살아 갈 수 가 없는 곳이에요.

한국에 오기 전 고향에서는 하루에 8시간 근무하고, 주말에 편히 쉬는 사무원이었어요. 근데 한국에 오니 그게 아니더라구요. 사장이 부를 때마다 무조건 달려나가 휴일 없이 일 하고, 평균 12시간 이상을 근무해야 하는 것에 적응하느라 많이 애먹었죠. 하루 8시간 근무로는 돈벌이가 안 되요. 잔업을 기본으로 해야 고향에도 돈을 보내고 조금 여유롭게 살 수 있어요."

그녀는 현재 오전 8시부터 밤 9시, 저녁 7시부터 아침 7시30까지 2교대 근무를 하고 있다. 대략 80만원의 봉급을 받는 그녀는 절반 이상을 고국으로 보낸다. 이미 다 큰 두 딸과 모든 가족이 고국에 남아 있는 그녀는 일주일에 한번의 전화 통화로 그리움을 달랜다.

그녀는 작은 딸 김 알레뷔티나(26)의 결혼식에도 가지 못했다. 아직 사위 얼굴을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는 그녀가 작은 딸의 결혼식 사진을 꺼내 보여준다.

"딸들이 한국에 오기 위해 비자 신청 한지가 꽤 됐는데, 그게 굉장히 까다로운가봐요. 이주 노동자가 많아서 그런지 비자 발급을 해주지 않는대요."

투명 비닐에 쌓인 여러 장의 가족 사진. 엄마 없이 홀로 훌륭하게 성장한 딸들이 꼭 어머니를 빼 닮은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뿌듯해 하며 사진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그녀가 은근 슬쩍 고개를 돌려버린다. "7년간 고생하며 딸들도 훌륭히 잘 키웠고, 이제 그만 고국에 돌아가 가족과 편하게 살아야죠" 라는 기자의 말에 그녀는 "한국에 끝까지 남고 싶다" 는 의외의(?) 대답을 했다.

"저 아직 할머니 아니에요! 지금도 충분히 일 할 수 있고, 우리 딸들에게도 더 도움을 줄 수 있어요. 한국이든 고국이든 제 나이 50에 갈 곳이 어디 있나요? 일 할 수 있을 때 열심히 일 해야죠! 제가 집에 가만히 있으면 오히려 자식에게 더 부담스러울 거예요. 한국에 끝까지 남아서 지금처럼 살고 싶은데 방법이 없네요.(웃음)"

"외국인 근로자가 한국인의 일자리를 뺏어 실업자를 양산하고 있다!" 이는 외국인 근로자 고용 허가제를 반대하는 목소리 가운데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문구이다. 실업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IMF시절. 정부는 고용촉진보상제도까지 운영하며 내국인의 고용을 독려하였다.

고향에 있는 두 딸의 사진을 취재진에게 보여준다. 무척이나 대견하고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서 어머니의 깊은 정을 느낄 수 있었다
고향에 있는 두 딸의 사진을 취재진에게 보여준다. 무척이나 대견하고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서 어머니의 깊은 정을 느낄 수 있었다 ⓒ 김진석
그러나 업체는 도저히 인력을 구할 수 없어 벌금을 감수하고 미등록노동자(불법체류외국인)를 고용하였다. 그리하여 현재 대부분의 인력이 외국인 노동자가 돼 버린 것이 바로 산업의 근간인 3D 업종이다.

"그간 일 하면서 한국 사람을 본 적이 거의 없어요. 현재 제가 다니는 공장엔 50명의 사람이 있는데, 그 중 한국 사람은 10명뿐이에요. 환경이 아무리 나빠도 외국인 근로자는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참고 일을 해요. 근데 한국 사람들은 조금만 냄새가 나거나 힘이 들면 금세 그만 둬 버려요. 항상 사장님도 그래요. '한국 사람들이 이런 일을 안 하기 때문에 인력이 많이 부족하다, 외국인 근로자가 없으면 사업이 어렵다' 고 종종 저희에게 말해요."

장시간의 고된 노동에 외국인 근로자들은 홀로 신음 소리를 낸다. 아파도 의료보험 적용이 안되기에 마음놓고 아플 수가 없다. 김 클라우디아씨 처럼 그저 소리 없이 눈물을 감춰야 한다.

"오래 전 공장 퇴근길 다리에서 떨어져 발목이 부러졌어요. 사장님이 보호자를 대신해줘서 간신히 입원은 했어요. 근데 수술을 해야 되는데 보호자와 비용을 구할 수가 없었죠. 눈물 밖에 안 나오더라구요. 그 때 마침 한 은혜로운 목사님의 도움으로 수술을 무사히 받고 치료까지 끝낼 수 있었어요. 전 정말 하나님에게 많은 것을 받은 사람이에요."

그녀는 성경책을 보며 한글을 배운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다. 앞으로 그녀의 꿈은 한국에 계속 있으면서 '신학' 을 공부하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받은 것이 너무 많다며 그녀는 타인에게 끊임없이 나눠 주고자 한국말 못하는 외국인 노동자를 돕고 있다.

"실컷 부려먹고 돈 안주는 사장님이 많아요. 외국인 근로자를 무시한 사장님도 결국 나중엔 다 돌려 받을 텐데. 사람은 주는 만큼 되돌려 받잖아요. 그걸 모르는 것 같아요. 오히려 밀린 돈 달라고 말했다가 사장님한테 맞아서 다친 노동자들이 저에게 하소연 할 때 정말 화가 많이 나요. 근데 우리는 항상 참아 야죠. 경찰에 신고 할 수도 없잖아요. 적어도 폭력만큼은 쓰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얼마 안 되는 귀중한 휴일. 그녀는 다른 외국인 노동자를 위해 자원 봉사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게다가 시도 때도 없이 걸려 오는 상담 전화에 그녀는 잠도 제대로 못 잘 지경이다.

"저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지금보다 인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 게 뭐 어렵나요? 오히려 제가 어려운 분들을 도우며 더 많은 은혜를 받고 있어요. '고맙다' 는 말만 들으면 힘이 막 솟아 나는 것 같아요!"

그녀는 "우리(외국인 노동자)는 한국 사람들의 일자리를 뺏는게 아니다. 다만 한국사람들이 하지 않은일을 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녀는 "우리(외국인 노동자)는 한국 사람들의 일자리를 뺏는게 아니다. 다만 한국사람들이 하지 않은일을 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 김진석
그녀의 양 볼이 발그레 진다. 그녀는 아직도 세상의 모든 것들이 궁금하다며 배우고 싶은 것에 비해 시간이 없어 아쉬워한다. 쉰이라는 나이에 그녀는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세상을 바라보며 따뜻한 관심을 쏟아낸다.

"한국 사람들은 왜 그리 '빨리 빨리' 를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밥 먹을 때, 일 할 때, 화장 실 갈 때마다 한국 사람들이 '빨리' 를 외쳐 마음이 불안해요. 그리고 한 가지 안타까운 건 한국 사람들은 '한민족' 이라는 자긍심이 강해서 그런지, '다양성' 에 관해 그리 열려 있지 않은 것 같아요. 처음엔 다양한 가능성을 접어두고 오직 한 가지만 생각하며 말하는 한국 사람들이 답답했어요. 사람들이 좀더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을 넓게 열어 다양성을 찾을 수 있었으면 해요."

그녀는 한국 사람들이 이젠 모두 정겨운 형제 같다며 홀로 한국에 지내는 것이 전혀 외롭지 않다고 한다. 12시간의 노동, 외국인 노동자 상담, 신학 및 한국 문화 공부 등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하다. 그녀가 딸에게 말하듯 기자에게 마지막으로 정성스레 당부한다.

"한국은 참 아름다운 곳이에요. 뭐라고 딱히 꼬집어 말 할 수는 없어도 아름다움이 느껴져요. 사람은 결국 자기가 뿌린 만큼 걷을 수 있는 거예요. 어디든 자기가 먼저 행동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거죠. 내가 이만큼 살아 보고 확실히 말 해 줄 수 있는 건 그래도 아직세상엔 좋은 사람이 더 많다 라는 것이죠!"

인터뷰를 마치자 그녀는 숨 돌림 틈도 없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어딘 가를 향해 분주히 발걸음을 옮긴다. 고된 삶 속에서도 삶의 여유를 잃지 않는 그녀의 그림자를 청명한 5월의 햇살이 살포시 즈려 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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