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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25일 노무현 대통령이 고영구 국정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4월25일 노무현 대통령이 고영구 국정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 청와대
오래 전에 '세상은 요지경'이라는 노래가 유행한 적도 있지만, 참 '세상은 요지경 속'이다. 국가정보원장 인사청문회 과정과, 노무현 대통령이 국회 정보위의 반대 의견을 무시하고 국정원장과 국정원 기조실장을 임명한 이후 전개된 양상을 보면 그렇다.

왜 요지경(瑤池鏡) 속인지는 지금부터 '시간여행'을 떠나서 톺아보자(이럴 때 인터넷이라는 검색수단은 편리하다 못해 위대하다는 느낌까지 갖게 한다. 관련 당사자들이 과거에 했던 언행을 손쉽게 찾아서 '꼼짝 마라'고 들이밀 수 있으니까).

요지경 속이라면 '선거판'을 빼놓을 수가 없다. 더욱이 그 판이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 혹은 요즘 유행하는 표현대로 '올인'(all-in), 즉 모든 것을 거는 '큰판'(대선)일수록 그 속은 요지경을 띠기 마련이다. 그 중에 하나가 '공약 베끼기'이다. 특히 한국처럼 정책의 차이가 별로 없는 보수정당 일색인 경우, 말이 좋아 '공약의 수렴화 현상'이지 선거 때면 후보이건 당이건 '공약 베끼기'가 횡행한다.

'공약 베끼기'에도 핑계는 있다. 대선과 같은 '승자독식' 게임에서 찬밥 더운밥 가릴 틈이 어디 있냐는 것이다. 일단 이기고 봐야 공약도 실천할 수 있는 것이지, 지면 아무것도 실천할 수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인지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 참모들이 맨 먼저 착수하는 작업은 후보 시절에 남발한 공약 가운데 실현 가능한 것과 '공약'(空約)을 구분해 그 빌 공자(字) '공약'을 털고 가는 것이다.

국정원 개혁공약, 이회창이 '50보'라면 노무현은 '100보'

한나라당 긴급 의원총회에서 고영국 국정원장 해임권고결의안 채택에 반대한 안영근 의원을 비난하는 정형근 의원.
한나라당 긴급 의원총회에서 고영국 국정원장 해임권고결의안 채택에 반대한 안영근 의원을 비난하는 정형근 의원. ⓒ 오마이뉴스 이종호
지난 대선에서도 정형근 한나라당 의원의 최초 폭로를 신호탄으로 국정원의 도청 의혹이 연일 쟁점화되자, 보수정당의 대통령후보들은 저마다 국정원 개혁에 관한 정책공약을 내놓았다.

"중앙정보부가 말썽이다. 안기부로 바꿔도 말썽이고 국정원으로 바꿔도 말썽이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국정원은 국내사찰 업무를 일절 중지시키고 해외정보만을 수집, 분석해 국익을 위해 일하는 '해외정보처'로 바꾸겠다." (노무현 후보의 2002년 11월30일 부산 거리유세)

"정치사찰이나 하고 도청이나 일삼는 국정원은 폐지하고 유능하고 중립적이며 경쟁력 있는 정보기관으로 새롭게 탄생시켜야 한다. 대통령이 되면 국정원의 불법도청을 정치관여 금지대상으로 규정, 엄격한 조사와 처벌이 이뤄지도록 국정원법을 개정할 것이다. 국가이익을 위한 해외정보 수집기능과 테러방지기능, 한반도 평화가 정착될 때까지 간첩 수사기능이라는 두 가지 기능만을 수행토록 할 것이다." (이회창 후보의 2002년 12월3일 부산 김해공항 기자회견)

지난 대선에서 두 후보가 공약한 국정원 개혁방안은 '50보 100보'이지만 차이는 좀 있었다. 노 후보의 공약은 한나라당이 연일 도청 의혹을 폭로함으로써 국정원에 대한 도청 의혹이 확산되자 '국정원을 폐지하고 대외정보국과 국가수사국을 신설하겠다'는 정몽준 후보의 공약을 슬쩍 베낀 것이다. 애당초 민주당이나 선거본부의 정책공약에는 국정원 폐지안이 없었다.

말하자면 노 후보는 국정원 개혁에 대한 별다른 정책공약을 마련하지 않았다가 도청 의혹이 폭로되자 '폐지하자'는 쪽으로 '100보 앞'으로 나간 것이고, 처음부터 국정원법 개정 등을 통한 대대적인 개혁을 약속했던 이 후보는 도청 의혹 폭로를 계기로 '도청을 일삼는 국정원이라면 폐지해야 한다'라고 '가정법'을 써서 당위론을 제기한 것이다.

'국정원 폐지는 안된다'던 한나라당 성명

바로 이런 차이가 있기에 남경필 당시 한나라당 중앙선대위 대변인은 선거 직전인 12월 16일 노무현 후보와의 정책 차별화를 분명히 하기 위해 '국정원을 폐지해서는 안된다'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던 것이다. 노 후보의 '국정원 폐지' 공약을 "참으로 즉흥적이고 참으로 무책임하다"고 비난한 이 성명의 전문(全文)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민주당과 통합21이 합의한 소위 '정책합의문'에 따르면 국정원 폐지를 추진할 모양이다. 정몽준 대표가 한달여 전 DJ후계단일화 인기투표 때 내놓은 '국정원 폐지' 공약을 노 후보가 수용한 것이다. 참으로 즉흥적이고 참으로 무책임하다.

이 정권 들어 국정원 수뇌부가 권력비리에 개입했다. 또한 불법도청 등 정치공작을 자행했다. 이대로는 안된다. 대수술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아예 폐지하겠다는 것은 옳지 않다. 무작정 없애는 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또 다른 문제의 시작이다.

국정원은 40여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 최고 정보기관이며 그간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도 인정받아야 한다. 더욱이 지금은 정보력이 국가의 흥망을 좌우하는 21세기 글로벌 경쟁시대이다. 또한 엄연히 남북분단 상황이다.

지금은 국정원의 정보기능이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중요한 실정이다. 이미 우리 당은 국정원의 역할을 바로 세우고 엄정한 정치적 중립을 지킬 수 있도록 국정원법을 개정할 것을 약속했다. 정책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국정원이 명실 공히 세계 유수의 최고정보기관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참으로 즉흥적이고 무책임한 국정원 폐지법안"

서동만 기조실장 임명 소식이 전해진 4월30일 열린 긴급 의원총회에서 대책을 논의중인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와 이규택 총무.
서동만 기조실장 임명 소식이 전해진 4월30일 열린 긴급 의원총회에서 대책을 논의중인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와 이규택 총무. ⓒ 오마이뉴스 이종호
그로부터 4개월여만인 5월1일 한나라당은 국회에 고영구 국정원장 사퇴권고결의안을 제출한 데 이어 조만간 국정원 폐지를 위한 관련 법안을 제출할 예정이다. 여기서 말한 관련 법안은 국정원 폐지법안과 해외정보처법안을 말한다. 당내에는 국정원 폐지 및 해외정보처 설치를 위한 기획단을 구성키로 했다. 정보위의 정형근·홍준표 의원과 법사위의 김용균 의원이 주도적으로 참여할 예정이다. 한나라당은 이와 함께 인사청문회법안도 개정한다는 방침이다.

국정원장은 국무위원이 아닌 만큼 사퇴권고결의안이 통과돼도 법적 구속력은 없다. 그러나 대통령에게 주는 정치적 부담은 클 수밖에 없다. 따라서 민주당은 5월 국회 불응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럴 경우 여야 의원들의 물리적 충돌로 인한 정국 경색으로 나라살림과 민생은 뒷전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

'국정원 폐지'안이 처음 나온 것은 아니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노무현 대통령도 후보 시절 '국정원 폐지'를 공약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거기까지 나가지는 않았다. 오히려 한나라당은 선거 직전에 '국정원을 폐지해서는 안된다'는 대변인 성명을 내 노무현 후보의 '국정원 폐지' 공약과의 차별화를 분명히 했다. 또 국정원장 인사청문회를 할 때까지 '국정원 폐지'와 관련된 어떤 정책도 논의된 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최근에 갑자기 국정원을 폐지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국정원과 직원들의 비리덩어리가 포착되었다거나 도청 의혹이 사실로 확인된 것도 아니다. 그러니 한나라당의 국정원 폐지안은 한마디로 말해 '못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식의 다수당의 횡포이자 생뚱맞고 느닷없는 오기와 분기탱천일 뿐이다. 그것은 한나라당이 주장한 바대로 "참으로 즉흥적이고 참으로 무책임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갈등 자초한 노무현 대통령의 '일탈행위'

취임 6일만에 해임권고결의안 제출이라는 거대야당의 전례없는 '힘 자랑'의 대상이 된 고영구 국정원장.
취임 6일만에 해임권고결의안 제출이라는 거대야당의 전례없는 '힘 자랑'의 대상이 된 고영구 국정원장. ⓒ 오마이뉴스 이종호
물론 국정원을 둘러싼 대통령과 '거대야당' 간의 갈등과 대립은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것처럼 노무현 대통령이 자초한 측면이 크다. 한나라당은 국회 정보위가 고영구 원장에 대해 '부적절' 의견을 냈음에도 4월25일 노 대통령이 임명을 강행하자 4월 29일 논평을 내 서동만 교수를 기용하지 않는 것이 이미 고 원장 임명으로 자존심이 상한 '거대야당'의 인내의 '마지노선'임을 분명히 했다.

"만약 서 교수를 국정원 기조실장에 임명한다면 국민과 국회를 상대로 '막 가자'는 선전포고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아울러 그렇게 된다면 국정원은 더 이상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정보기관으로 인정받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만약 노무현대통령이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남용하고 오기와 독선의 정치를 계속한다면 우리 당은 가능한 수단을 모두 동원해 투쟁할 것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노 대통령은 야당의 마지막 자존심마저 가볍게 무시해 버렸다. 이는 소수정권의 불가피한 선택이었을망정 취임사에서부터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강조하고, 야당 대표를 청와대와 청남대로 초청해 대화하고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이 야당 당사를 찾는 파격까지 몸소 실천한 노무현 대통령의 언행에 비추어 보건대 분명한 '일탈행위'이다.

문제는 노 대통령은 4월30일 국정원 차장단을 임명하면서 "분열주의적 이념공세를 받아들인다면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갈 수 없다"고 밝힌 점이다. 거대야당으로서는 무척 자존심이 상하는 발언이지만 이념검증에 집중한 것 또한 사실인 만큼 '너는 짖어라 나는 간다'는 일전불사가(一戰不辭歌)의 1절에 해당하는 여기까지는 그래도 참을 만했다.

대통령-거대야당 '오기의 평행선'에 갇힌 우울한 국민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대통령-거대야당 간의 '오기 싸움'의 대상이 된 서동만 기조실장.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대통령-거대야당 간의 '오기 싸움'의 대상이 된 서동만 기조실장. ⓒ 오마이뉴스 이종호
더 큰 사단은 노 대통령이 인사안을 재가하면서 '서 실장을 1순위로 잘 (추천)했다'고 말했다(정찬용 인사보좌관의 전언)고까지 '100보'나 나간 점이다. 굳이 공개하지 않아도 될 추천순위(실제로 다른 장차관 임명 때는 추천순위를 공개한 적이 없음)와 "1순위로 추천하길 잘했다"는 대통령의 칭찬까지 공개한 것은 '한번 해볼 테면 해보자'는 뜻말고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그러니 "보수야당으로서 우려가 있을 수 있지만 국정원 개혁을 위해서는 불가피했다"는 식으로 대통령이 양해를 구해도 시원찮은데, 거대야당이 반대한 인사에 대해 '1순위로 추천하길 잘했다'고 2절·3절까지 나가니 야당으로서도 '어디 누가 이기나 해보자'는 오기가 발동한 것이다.

문제는 대통령과 거대야당의 '고래 싸움'에 국민과 국정원 직원들의 새우등만 터지게 생겼다는 점이다. 사정이 이러니 일반 국민은 말할 것도 없지만 국정원 직원들조차 국정원의 앞날에 대해 갈피를 못잡고 있다.

지난 4월22일 최초로 열린 국정원장 인사청문회를 지켜본 직원들의 반응도 '우리 편이 누구인지 식별이 안되어 헷갈린다'는 것이었다. 한 직원은 "그동안 정형근 의원에 대해서는 입만 열면 '친정'을 괴롭히는 등 안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는데 청문회에서 국정원을 감싸는 모습을 보고선 정 의원을 다시 보게 되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정형근·홍준표 의원은 인사청문회에서 '친북 성향 인사들이 국정원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해체하는 것이 낫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런데 이들은 이제 기획단에서 국정원 폐지법안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니 세상은 정말 요지경 속이다. 아래와 같이 '뱅뱅 도는' 국정원 개폐에 대한 정치권의 입장 변화 사이클을 보면 그 요지경 속은 어지러울 지경이다.

국정원 도청 의혹 제기 및 국정원법 개정 공약(한나라당) → 국정원 폐지 및 해외정보처 신설 공약(노무현 후보) → 국정원 폐지 반대(한나라당) → 인사청문회에서 국정원 옹호(여야 정보위원) → 국정원 수뇌부 개혁 인사 임명(노 대통령) → 국정원 폐지 및 해외정보처 신설법안 제출예정(한나라당)

'도청을 일삼는 국정원이라면 폐지하는 것이 낫다'던 한나라당의 입장은 '대선판'을 찍고 돌고 돌아 도청 의혹이 규명되기도 전에 국정원 폐지의 칼자루를 쥐고 원점으로 돌아왔다. 국정원을 폐지하고 해외정보처를 신설하는 것을 골자로 한 한나라당의 입장은 노무현 대통령의 후보 시절 공약과 일치한다. 그래서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이 있는 모양이다.

국정원은 다른 어떤 공직보다도 '국익지상주의'를 업무 수행의 제1원칙으로 삼고 있는 곳이다. 그런데 정작 대통령과 거대야당은 국익보다는 '당리'와 '자존심' 그리고 '오기'의 대결을 벌이고 있다. 그래서 이 좋은 5월에 '오기의 평행선'에 갇힌 국민과 국정원 직원들은 오로지 우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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