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북한과 미국 사이의 '위험한 게임'을 보고 있노라면, 외교 무대에서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이렇다할 협상 수단이 없는 북한은 한편으로는 핵 시위를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담한 제안"을 하면서 미국을 협상테이블로 불러내려고 하고 있지만 거듭 실패하고 있다. 강온 양면 전략 모두 부시 행정부에게 먹혀 들어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반면 미국은 북한의 핵무장이 갖는 폭발력에 대해 말로는 강한 우려를 표명하면서도 굼뜬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북한이 핵무기를 갖고 있다고 시인했다"는 베이징 3자 회담 내용을 언론에 흘리면서도, "우리는 이미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예측하고 있었다"며 느긋한 입장이다.
북한의 "대담한 제안"에 대해서는 검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면서도 "악행을 보상하지 않겠다"며 "북한이 먼저 핵 프로그램을 폐기하지 않으면 협상은 없다"는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사실상 북한의 제안을 거부한 것이다.
이 사이에서 남한의 처지는 딱하기만 하다. 김대중 정부에 이어 △ 북한 핵개발 불용 △ 평화적 해결 △ 한국의 주도적 역할 등 3원칙을 제시해 왔으나, 어느 것 하나 시원스러운 결과를 낳지 못하고 있다. 북한은 핵무장 가능성까지 포함해 핵카드를 버리려 하지 않고 있고, 미국은 평화적 해결을 운운하면서도 북한과의 협상은 거부하는 비타협적 태도를 고수하고 있으며, "주도적 해결" 원칙은 다자 회담 참여 논란이 보여주듯 정치적 수사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 힘든 현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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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북한의 핵무장 용인?
기실 오늘날의 위기가 대단히 위험하면서도 복잡한 형태로 나타나게 하고 있는 1차적인 책임은 부시 행정부에게 있다. 이는 단순히 부시 행정부가 출범 직후부터 전임 정부의 대북 협상 성과를 무시하고 대북강경책으로 일관함으로써 오늘날의 위기를 제공했다는 점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이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는 외교의 기본이 협상에 있다는 점을 무시한 채, "북한이 먼저 신속하게 검증 가능하고 완전하게 핵 프로그램을 폐기하지 않으면 협상은 없다"는 얘기만 되풀이하면서 북한 핵문제를 사실상 방치하고 있는 '무책임함'에 있는 것이다. 즉, 북한 핵문제를 포함한 한반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해법의 부재(不在)가 아니라 부시 행정부의 대북한 비타협주의에 있다는 것이다.
북한의 핵 프로그램 폐기 완료까지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를 협상의 '전제조건'으로 삼는 것은 북한은 물론이고, 국제사회로 하여금 부시 행정부의 진정한 의도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하고 있다.
미국 내 강온파 사이의 분열이 보여주듯 북한에 대해 '정해진 최종 목표'가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가운데, 핵문제를 기회로 북한위협론을 과장·방치하면서 이를 활용하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뉴욕타임즈>의 5월 5일자 보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신문은 미국 안팎의 소식통을 인용해, 부시 행정부가 북한의 핵무장 저지 목표를 철회하고 핵 물질 및 기술의 해외 이전 방지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은 북한의 핵무장을 절대로 용인하지 않는다"는 10여년간의 상식을 뒤흔드는 보도이다.
부시 행정부가 북한의 핵무장 저지에서 수출 봉쇄로 대북정책의 방향을 수정하고 있다는 징후는 예전부터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이번 <뉴욕타임즈>의 보도는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작년말에 새로운 금지선(red line)으로 북한의 핵무기 수출을 언급한 바 있고, 부시 대통령은 3월 4일 미국 언론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핵무장에 대해 불안해하는 아시아 동맹국들을 어떻게 안심시킬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MD 배치를 가속화하겠다"고 답변한 바 있다.
< LA타임즈 > 역시 3월 5일자 신문에서 "부시 행정부는 아마도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막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북한 핵무장에 따른) 지정학적 결과를 다루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지정학적 결과를 다루는데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북한을 고립과 제재와 억제, 그리고 미사일방어체제(MD) 등 군사력 강화를 통해 다뤄가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시 행정부가 이처럼 대북정책 방향을 선회하고자 하는 '이유'와 '의도'는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할 수 있다. 우선 부시 행정부는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북한의 핵카드는 협상용이 아니라 핵무장을 위한 것이라는 선전전을 강화해 정책 방향 선회를 정당화시키고자 할 것이다. 또한 북한의 핵무장 여부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점 역시 강조하고 나올 것이다.
부시의 숨은 의도를 정확히 읽어야
이와 관련해 부시 대통령과 북핵 문제를 토의한 한 관리가 부시 대통령이 "당신(북한)은 굶주리고 있다. 당신은 플루토늄을 먹고 살 수는 없다"고 말했고, 다른 한 관리는 "대통령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북한이 핵무기를 갖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한 문제라고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고 하는 것은, 향후 미국의 대북정책에 대한 중대한 암시를 주고 있기도 하다.
물론 부시 행정부가 이와 같은 정책 선회를 공개적으로 천명할 가능성은 당분간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직·간접적으로 자신의 정책 변화는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점 역시 강조하고 나올 것이다. 즉, 한국, 중국, 러시아 등이 북한의 핵무장 저지 방법으로 무력 사용은 물론이고 제재와 봉쇄를 반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의 핵무장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이를 해외에 수출하는 것을 봉쇄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논리를 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부시 행정부의 이러한 정책 변화는 두 가지 중대한 문제를 던져주고 있다. 첫째는 북한의 핵무장을 용인하는 한 있더라도, 북한의 선(先) 핵폐기가 전제되지 않는 협상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는 남북한을 포함한 동북아 국가들이 "미국이 북한의 핵무장을 절대로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하에 외교를 펼치고 있는 것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는 것을 거듭 확인해주고 있다.
둘째는 북한의 핵무장을 받아들일 수 없는 국가들에게 가하는 무언(無言)의, 그러나 강력한 압박 효과이다. 북한의 핵무장시 가장 큰 손실을 입게 되는 국가는 남한과 중국이다. 즉, 미국의 대북 군사행동이나 제재·봉쇄를 반대하는 국가일수록 북한의 핵무장시 입게 되는 피해가 커진다는 '묘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북한이 핵무기를 갖는 것은 방치하고 이를 수출하는 것을 봉쇄하는데 초점을 맞추겠다는 부시 행정부의 입장 변화에 남한과 중국 등은 크게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동시에 이들 국가들로 하여금 "북한의 핵무장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부시의 길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강한 압박감을 갖게 하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나를 따르던지, 핵무기를 가진 북한과의 공존을 선택하든지 양자택일하라'는 식의 부시 행정부의 화법에 남한과 중국은 엄청난 딜레마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이래도, 저래도 미국으로서는 해볼만한 게임인 반면에, 남한과 중국은 어떤 선택도 하기 힘들다는 현실적인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북한의 핵무장을 통해 '기회'를 창출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는 바로 부시 행정부의 미국이라는 점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핵무기를 가진 북한과 공존을 선택하는 것은 남한으로서는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못한 '딜레마 중에 딜레마'이다. 중국 역시 북한의 핵무장이 야기할 핵 도미노 가능성을 비롯한 첨예한 군비경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을 가장 우려하고 있다.
반면 MD 구축에 사활을 걸고 있는 부시 행정부는 그야말로 '보증 수표'를 갖게 된다. 기존의 미사일에 더해 북한이 핵무기까지 갖게 될 경우 MD는 엄청난 탄력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 국내적으로도 명분을 강화시키는 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MD 구축의 가장 중요한 지역인 동아시아에서 일본, 남한을 끌어드리는데 더없이 좋은 구실로 작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