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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한 한 주의 종착역. 캔 맥주를 벗삼아 발바닥을 비비며 주말의 명화를 즐길 시간. 문희준(31) PD의 경쾌한 자판 소리가 토요일 밤의 나른함을 깨운다.
그는 새벽 3시에 있을 시카고컵스와 세인트루이스의 생방송을 준비중이다. 스포츠 전문 케이블 MBC ESPN 에서 삼 년을 맞이하고 있는 그는 작가, 편집, 제작, 감독 등을 전천후 소화해내는 만능 PD이다.
"스포츠는 곧 인생의 전부"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처음 일을 시작했을 당시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올 것 같지 않아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일을 하느라 친구들과 인연이 끊기기도 했다며 남모를 속내를 털어놓았다.
책상 위에 놓여진 달력 위에는 빨간날마다 빼곡한 일정이 적혀 있다. 그 자신도 언제 쉴지 모르는 불규칙한 생활, 오히려 남이 쉬는 날 더 부지런히 뛰어야 하는 일상. 무심코 바라보는 심야 티브이 화면 뒤에는 어떤 이의 숨가쁜 열정이 숨겨져 있다.
"저도 몰랐을 땐 심야 방송을 보며 누가 과연 뭘 얼마나 하겠는가라고 쉽게 생각했죠. 아휴, 근데 이건 막상 실제로 해보니 장난이 아니에요(웃음). 게다가 우리는 전부 생방으로 중계를 하고 도중에 끊어버리는 게임이 없어요. 한 번 방송에 들어가면 화장실도 못 가요. 아무리 긴 연장전으로 이어져도 계속 경기가 끝날 때까지 다 보여줘야 해요."
방송이 끝나도 바쁘기는 매한가지다. 같이 방송을 한 모든 스탭들의 퇴근 인사를 뒤로 한 채 잠시 후 방영될 2시간 30분짜리 '재방송'을 위해 또 한번 편집 과정을 거쳐야 한다.
"정말로 순수하게 스포츠를 좋아하고 방송을 즐기는 사람에게 권하고 싶어요. 모 방송국에서는 어떤 PD가 금품을 받았다고 시끄러운데 그런 건 다른 나라 얘기죠. 우리는 그런 지저분한 일들과 얽힐 기회가 없어 오히려 더 좋아요. 'PD가 장가를 잘 간다, 혹은 돈을 많이 번다' 라는 등의 화려한 이름과 허상을 쫓아 일을 시작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언젠가 쉬는 날 케이블 방송에서 하는 심야 영화를 보는데 화면이 끊겼어요. 테잎에 문제가 생겼나? 혹은 기계의 문제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졸고 있나? 라는 등 온갖 잡다한 상상이 다 떠오르더라구요. 항상 '왜'라는 생각이 머리 속을 떠나질 않아 화면 한 컷에 담긴 그들의 철학들을 따지고 봐요. 마지막 자막에 PD이름도 꼭 확인하구요. 저 PD는 왜 저런 그림을 넣었을까? 나라면 과연 어떻게 했을까? 라는 등의 생각을 하다보면 단순한 화면조차도 쉽게 지나 칠 수가 없어요.
PD는 절대 공인입니다. 책임과 의무가 굉장히 큰 직업이죠. 비록 화면에 얼굴은 안 나가도 제가 만든 방송을 얼마나 많은 이들이 보게 될지 그건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요. 행여 작은 오보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킬 수도 있구요."
"우리 방송의 영향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스포츠를 하나의 '문화'로 인식하게 된 것 같아 뿌듯합니다. 예전엔 음주 가무가 즐기는 문화의 전부였던 것 같은데 요즘은 어디를 가든 자전거나 인라인을 타는 생활 스포츠인들을 쉽게 발견 할 수가 있어요. 그중 골프가 가장 많이 대중화 된 것 같아요.
스포츠를 즐기는 시청자들의 다양한 시각이 아쉬워요. 해설 하는 분들 다 제 각각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야구를 보며 방송을 하시는 분들인데 행여 박찬호에 대해 안 좋은 얘기가 나가면 온라인 게시판이 난리가 나요. 우리 나라 스포츠 팬들은 한 선수에 대한 기대 심리가 굉장히 높은 것 같아요. 선수들이 항상 모든 경기를 잘 할 수만은 없는데, 시청자들은 선수가 잘하는 모습만을 보고 듣고 싶어하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스포츠 그대로의 묘미를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시청자들이 많이 늘었으면 해요."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부조정실. MLB생방을 위해 영상감독, 기술감독, 음향감독, CG, 아나운서와 해설자가 모여든다. 서른 개의 화면에서는 전 세계의 스포츠 스타들이 혜성같이 스쳐 지나간다. 수많은 기계의 불빛들이 향연을 벌이며 적막한 서울의 밤하늘을 무색하게 만든다. 이제 막 어느 열혈 스포츠 팬의 남다른 밤이 펼쳐지려 한다.
그는 간만에 만난 친구들이 "방송 잘 봤다" 라는 말을 건넬 때, 부모님이 자막에 올라가는 그의 이름을 보며 "수고했다" 라고 말씀하실 때 그리고 최희섭이 홈런을 날리는 순간 일의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오늘은 그가 응원하는 최희섭이 등판하는 날이다.
"그 친구 정말 대단해요. 일본의 마쓰이는 이미 검증 받은 대스타지만 최희섭은 검증 받지 않은 신인인데도 불구하고 그 정도 하는 거 보면 정말 굉장히 잘하는 거예요! 큰 체구에 힘도 좋고 몸까지 유연해요. 보통 힘이 있으면 발이 느린 경우가 많은데 최희섭 선수는 허슬플레이가 가능해요. 그건 노력 없이는 불가능한 거예요! 항상 성실하고 여기서 봐도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게 눈에 보여요. 오늘도 최희섭이 홈런 한방 날려 주면 좋을 텐데…."
매번 하는 생방이어도 방송 전에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흐트러짐 없는 그의 책상과 단정히 정리된 서랍이 말해 주듯 뭐 하나 대충 대충 넘어가는 게 없다. 방송 전 마지막으로 자리를 뜨며 꼼꼼히 점검한다. "생방의 긴장감이 재미있어 좋다" 며 말하는 그의 눈빛에 어느 때 보다도 알 수 없는 '생기' 가 묻어난다. '휴일 전담 야간조' 라며 서로 웃음을 교환하는 스텝들의 농담을 뒤로 생방송은 시작된다.
스타트 스탠바이 큐!
기껏 밤새워 준비한 영상이 뜻하지 않은 기계의 불찰로 화면이 깨져 버렸다. 눈 깜짝 할 사이 카메라는 다시 스튜디오로 넘어가고 그는 귀까지 새빨개지고 말았다. 사람의 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사고라지만 그는 여간 찝찝한 게 아닌가 보다. 세인트루이스와 시카고컵스의 경기가 투수전의 양상을 띠며 지리멸렬한 공방이 계속 되고 최희섭의 방망이마저도 침묵을 지키며 그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데.
"희섭 초이! 희섭 초이!"
최희섭을 환호하는 TV 속 관객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지만 끝내 최의섭은 무안타로 그치고 만다. 그러나 최희섭이 내야 플라이를 잡아 세인트루이스의 아웃 하나를 뽑아내자 시카고컵스가 어렵게 역전을 시킨다. 긴 한숨을 내 뱉는 그의 얼굴에 가까스로 화색이 돈다.
지루한 1점차 승부. 연장 20회 경력이 있는 세인트루이스가 시카고컵스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며 경기는 10회 연장으로 이어진다. 최희섭은 결국 4타수 무안타를 기록하며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않고 끝날 것 같지 않은 연장전에 모두가 마음을 졸이는 순간. 알렉스 곤잘레스가 끝내기 홈런을 터뜨리며 스텝들의 고단함도 함께 날려 버린다.
애써 준비한 영상이 깨져버린 게 못내 아쉬운지 오늘 방송은 50점도 안 된다고 한다. 빨갛게 충혈 된 눈을 비비며 재방송 편집을 위해 또 다시 골방(편집실)으로 향하는 그에게 이루고 싶은 영원한 꿈이 하나 있다.
"어린 시절부터 꿈이 하나 있었어요. IOC(국제올림픽 위원회)가 되어 스포츠 문화를 장려하고 싶어요. 이상하게도 IOC에는 행정인만 있지 정작 실제로 스포츠를 좋아하고 즐기는 '스포츠인' 이 드물어서 아쉬워요.
만약 제가 IOC위원이 된다면 어린이들이 콘크리트가 아닌 잔디밭에서 원없이 뛰어 놀며 뒹굴 수 있는 스포츠 환경을 만들고 싶어요. 스포츠가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닌, 어린 시절부터 아무나 흔히 즐길 수 있는 하나의 건강한 문화로 정착하게 만들고 싶어요. 저 또한 앞으로도 영원히 순수한 스포츠인의 한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