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메타세콰이어
보드레한 새털처럼 포근하고 아늑한 이불에 눕고 싶다. 풀 향기 맡으며 따스한 봄 기운 몸에 안고 스르르 잠에 떨어진 아이가 부럽다. 고향 품에 안겨 꿀잠에 폭 빠져 행복을 맘껏 누리고 싶은 계절이다. 고향 가는 길은 제 아무리 멀어도 사람을 지치게 하지 않는다.
명물 대나무와 함께 사방 팔방으로 뻗은 거리에 잇닿은 논물을 잔뜩 머금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떨고 있는 ‘메타세콰이어’ 나무가 줄지어 선 기나긴 굴(屈)을 이루고 있는 담양군. 새로 난 잎이 어찌나 가엾고 여린지 미풍도 이기지 못하고 위 아래로 마구 휘날린다.
아침엔 푸른 연기 나는 듯하고 한낮엔 시원한 대나무 평상(平床) 하나 갖다가 노닐다 가고파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해질녘이라고 밋밋한 것이 아니다. 하루의 고단한 노동을 마치고 돌아가는 농부의 허리가 유난히 돋보이는 것처럼 이 나무도 늘씬한 그림자를 석양에 들이대고 얼른 집으로 들어가 쉬고 싶다고 뉘엿뉘엿 지친 걸음을 내딛는 모양이다. 왜 그리 농번기 해는 길기만 한 건지.
낙엽송(落葉松)은 뭉쳐서 떨어질 땐 세포분열을 한 듯 바늘 한 닢씩 덧없이 떨어져 멋 부릴 형편이 못되지만, 철되면 새 깃털로 갈아입어 올올이 허전한 마음 빈곳을 채워 춤추고 노래하며 맑은 가을하늘에 날리는 낙우송과(落羽松科, 삼[杉]나무과 ) 메타세콰이어 숲을 늦봄에 보면 희망의 싹으로 지친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어 좋다.
보리밭
보리밭과 밀밭, 삼밭이 어우러진 70년 대 후반 농촌 들녘. 가을 나락이 익을 때보다 더 지겹게 분주한 때다. 산들바람에 파란 보릿대가 일렁 혹은 출렁이며 휘청 넘어지는가 싶으면 어느새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서는 다시 푸른 물결을 만들었다. 보리 뒷장도 하얀 속내를 드러내 보였다.
보리 패고 밀에 뜨물이 가득하여 알이 차기 시작하면 어디서 날아왔는지 깜부기도 덩캐덩캐 덕지덕지 까맣게 붙었다. 손으로 만져주면 시퍼런 연기 마냥 얼마나 퍼져댔는가. 제비도 못자리에 들어간 지푸라기나 풀나무 잔가지 한 개 입에 흙 묻혀 물고 짖던 울음 그치고 물을 힘껏 차고 올라 제 집을 짓느라 바빴다.
까시락으로 존재가치를 말하는 보리는 채 익기도 전에 아이들 밥이었다. 두어 줌 베어 꼬실라 식기 전에 뜨거운 손을 “후~후~” 불며 보리를 비벼서 파릇파릇 노릇노릇 까만 보리 알맹이만 남기고 까시락을 “휘휘” 불어버리고 손에 한 줌 모아 입에 가득 채워 몇 번 먹고 나면 ‘니네들 아푸리카에서 왔는 갑다’ 하셨지. ‘2모작만이 살길이다’고 외쳤던 때가 엊그제인데, 1모작 할 사람마저 없어 놀리는 땅 지천이다.
혼식(混食)하라던 선생님 말씀이 가장 미웠던 이유가 있었다. ‘대통령 각하, 제발 혼식 좀 하게 해주세요. 쌀 한 톨이라도 섞어서 먹을 수 있게 좀 해달란 말이예요. 그러니 선생님도 더 이상 혼식하라고 하지 마세요. 보리쌀도 구하기 힘든 형편에 보리를 섞어 먹으라니 말이나 되는가요?’ 하던 친구들이 더 많았던 시절.
30도에 가까운 뜨거운 햇살을 받아 누런 들판으로 바뀌는 건 시간 문제인데 보리도, 밀도, 대마 삼도 심을 영문을 모르게 변해버린 농촌에는 희망이 사라진지 오래다. 간혹 보리가 심어져 사람 기분 묘하게 들뜨게 하므로 하염없이 보리밭에 풀썩 주저앉아 자리 깔고 누워버리고 싶다. 바짓가랑이에 풀물이 들던 흙이 묻던 간에.
죽순
보리밭에서 머뭇거릴 틈도 없이 아는 형님네 대밭으로 갔다. 찾는 사람은 없고 형수만 있다.
“어떻게 오셨소?”
“형님 어디 가셨소?”
“딸기밭에 갔어요.”
“곧 내려가기로 하고요. 죽순 났습디까?”
“한 번 가보쇼.”
“금방 내려갈께요. 열 개만 꺾을랍니다.”
“그렇게 하셔요.”
예전 금싸라기밭이었던 대밭으로 들어가니 몇 년을 방치해두다가 올해야 누가 달라고 해서 베어 가라했던지 대가 모조리 베어지고 없었다. 그래서인지 모내기철보다 더 빨리 뾰족뾰족 연한 갈색을 띤 죽순 움이 터 올랐다. 우후죽순(雨後竹筍)! 밤새 비가 내린 터에 싹이 뾰족뾰족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었다. 며칠 늦으면 20미터까지 자라 위를 쳐다봐야 된다. 한 번 먹을 분량만 꺾어 차에 실었다.
내려오는 길에 못자리를 하고 계신 동네 어른께 인사만 하고 지나쳤다.
먹는 것은 뒤로 미루는 수밖에 없었다. 딸기 하우스에 계실 형님을 만나러 가야하므로 서둘렀다. 3년 전 몇 개월 그 동네에 살면서 같이 막걸리 깨나 먹어댔던 사이였으니 막걸리 한 잔 하자고 찾아뵌 것이다.
“형님, 오랜만입니다.”
“어쩐 일이여?”
“집에 들렀다가 형님보러 왔소. 딸기 농사는 잘 했소?”
“매번 같지 뭐.”
“별 탈이 없었다면 예년과 같이 잘 됐다는 말씀이네요. 한 동에 얼마나 나옵디까?”
“한 600만원 정도 했을 거구만. 3동 했응께 자네가 계산해봐. 그건 그렇고 자네는 어떻게 지내신가?”
“애 둘 낳고 그럭저럭 사요. 딸 아들 하나씩이요.”
“잘 했네”
“막걸리나 한 잔 합시다.”
“그려 자네 왔응께 한잔 해야제.”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곧 고향으로 다시 내려 올 거라는 얘기와 자신의 자녀들이 취직도 잘 했다는 이야기, 군대 간 아들녀석 이야기, 딸기 농사 때문에 밤잠을 못 잔다는 얘기도 푸념하듯 늘어 놓으셨다.
"형님 그만 가볼랍니다."
"아따 벌써 갈라고? 섭섭한게 딸기나 한바가지 갖고 가서 애들 주게."
"고맙습니다. 마치 밭딸기 같네요."
"끝물이라서 그렇지 뭐"
담양에 가면 메타세콰이어 길과 대밭이 있어 눈이 트이고 죽향(竹香)과 죽순 요리가 있어 미각과 후각이 되살아난다. 한 곡조 부르고 싶게 성산별곡(星山別曲)에 묘사된 풍경이 펼쳐진다. 주말 담양으로 한 번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