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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점심 식사 후 학교정원을 산책했다. 이름 모를 봄 꽃들이 흐드러진 정원을 산책하는 일은 이 곳 생활이 주는 유일한 기쁨이다. 정원의 한 쪽 끝에서 다른 쪽까지는 아스라이 멀기만 하지만 그 사이사이엔 각양의 꽃밭들이 펼쳐져 있어 지루하지 않다. 또한 수백만평의 광활한 숲이 정원을 감싸 안고 있기에 포근한 기분 마저 든다.

어디서 왔는지 한 무리의 사슴 떼가 몰려와 있다. 인기척이 있어도 그저 풀을 뜯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서 한없는 평화가 느껴진다. 몇 분 후 대장 격인 사슴이 숲속으로 향하자 이내 모두가 그 뒤를 따라 총총이 사라진다. 나는 그 들의 한가로운 평화를 방해한 듯 하여 괜히 머쓱하기만 했다.

나는 정원 한쪽 모서리에 있는 커다란 나무 근처에 가 보기로 했다. 그 나무에 다다르자 한 쪽 가지에 달려 있는 석판 하나가 눈에 들어 왔다. 거기엔 이렇게 씌어져 있었다. “이 나무는 1848년 빅토리아 여왕이 직접 심은 것입니다.”흡사 나무는 내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프랑스인 앙드레 모로아는 그의 저서 “영국사”에서 다음과 같이 빅토리아 여왕시대를 기술하고 있다.

빅토리아 여왕은 하노버 왕조가 추락시킨 국왕의 권위를 회복시키고 입헌 군주제의 기틀을 세웠다. 60여년의 재위기간(1838~1901) 중 한번의 내란도 겪지 않고 막강한 대영제국의 위용을 자랑했었다. 또한 남편인 알버트공과 함께 영국 문화의 일대 부흥기를 가져 오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여왕의 치적으로 기록되는 것은 빈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진보와 희망을 심어 준 것이었다. 중세에는 우주를 신의 창조물이라고만 생각했다. 18세기는 이성적인 자연법 체계와 합리적인 신앙을 조화시키려고 했었다. 그러나 19세기 특히 빅토리아 시대에는 과학의 눈으로 우주를 설명하려 하였다. 그 당시가 배출한 학자와 문인으로는 다윈, 베이컨, 스펜서, 칼라일, 러스킨, 토머스 하디, 오스카 와일드, 찰스 디킨스 등이 있다.

나는 또 우리나라로 달려 가고 있었다. 나는 최근 인터넷을 통해 전두환, 이순자씨가 홀인원을 기념해 나무를 심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오랜만에 두 분의 모습을 접하니 온갖 만감이 교차한다.

때는 내가 대학 1학년 때인 79년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10.26사태가 일어난 직후 나는 TV를 통해서 그의 모습을 처음 보았었다. 그리고 그는 곧 12.12 쿠데타를 일으키며 권력을 장악한다. 아울러 그는 민주주의를 열망했던 대다수 학생들의 기대와 희망을 증오와 적개심으로 바꿔 버렸다.

그리고 나는 군 생활 중 그를 직접 만난 적도 있었다. 그가 대통령으로 재직 중일 당시 서울 근교의 한 골프장에서 골프를 마치고 그 근처에 위치한 우리 부대를 불시에 방문한 것이다. 나는 당시 상황병으로 근무 중이었기 때문에 그와 악수할 수 있는 영광을 얻기도 했었다. 하늘이 떠나갈 것 같은 관등성명을 외치며 바라본 그의 모습은 무소불위의 권력 그 자체였다.

그런 그도 이젠 할아버지가 되었다. 한 시대를 쥐락 펴락 했던 그가 이제는 무일푼이 되어 재판정에 불려 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겪는 그의 고초는 먼 훗날 역사의 법정에 기록될 형량에 비하면 경미한 것이리라.

그리고 수 백년이 흐를지라도 그가 골프장에 심은 나무는 아름드리 고목이 되어 그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무는 그의 이름을 바라보는 어느 후세에게 다음을 이야기 할 것이다.

“그는 대다수 국민들에게 기대와 희망을 빼앗고 그 대신 절망과 슬픔을 가져 다 주었으나 죽는 날까지도 조금의 뉘우침 없이 뻔뻔스레 살다 갔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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