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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지막히 일어난 일요일 아침, 일상의 나른함과 게으름으로 어느새 오후가 되어버린 5.18 민주항쟁 23주년의 아침. 난 책장구석에 시집하나를 꺼내들게 된다. 무료해진 우리의 일상과 너무도 닮아있는 그의 시에서, 점점 무뎌져가는 나의 오늘을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 나타나서 여기서 나를 구해줄 거야
황지우의 시는 솔직하고 일상적이다. 사람들은 그의 시를 사생활이라는 객관적 삶의 풍경을 통해 나타낸 슬픔과 연민, 정념들의 노출이라 말한다.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에서 시인 황지우는 우리에게 마치 자신의 사생활을 노출시키는 인심이라도 쓰는 듯,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려 한다. 이러한 내용적 접근과 함께 이에 대한 효과장치로 ‘겹언어’ 사용과 ‘무대화 형식’ 이라는 표면적 기법이 쓰이는데, 이는 그의 하루일과를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려내는 데 성공을 가져왔다. 그렇다면 이처럼 한 폭의 그림으로 완성된 그의 일상은 어떤가. 스스로 만족해 안주하고 있는 것일까? 혹 그 속에서의 일탈을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것은 그가 우리에게 그의 하루들 과감히 보여주며 함께 던져준 고민거리 일지도 모른다.
누군가 나타나서 여기서 나를 구해줄 수 있을까?
무대화 형식의 효과를 가져 온 ';', '소파와 아내', '암전', '안과 바깥' 등의 무대장치들은 그의 일상을 한 컷의 사진처럼 형상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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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대 구성물의 배치를 설명하는데, 한 박자 쉬었다 갈 수 있게 하는 대표적 도구이다. 생각의 굴레에 너무 가속도가 붙은 듯 싶었다하면 영락없이 ‘;’가 출현해, 그 전후 상황과의 단절적 상황을 만들어 버린다. 이는 황지우가 이 시집을 낼 당시 몇 년간 시쓰는 일을 멈추고 조각전 준비라는 바깥일에 빠져있던 그 자신의 ‘쉼’을 나타낸다고도 할 수 있으며, 오늘 우리 하루의 나른한 쉼, 무료함, 사상 부재의 현실 등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소파와 아내'
: "의자같이 생긴, 젖퉁이 무지무지하게 큰 藎石器時代의 이 多産性 여인상은 사실은 비닐로 된 가짜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데 “오우 소파, 나의 어머니!” 나는 속으로 이렇게 영어식으로 말하면서, 그리고 양놈들이 하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소파에 거디었다." - <살찐 소파에 대항 日記> 中 -
황지우는 ‘소파- 비누- 부드러움- 거품’의 체계를 연결한다. 둘 다 비누처럼 부드럽고 향긋한 이미지이다. 무대화 장치에도 한 몫을 하고 있는 소파는 축 늘어진 거적대기같은 내가 쉴 수 있고, 세상을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이 공간 내에서는 맘껏 나태해질 수도 고민할 수 있으며, 어머니처럼 여겨지는 아내라는 안식처와 소통할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다. 그러나 결코 완벽한 휴식을 제공한다거나 고급스러울 수 없는, 말 그대로 가짜 가죽 소파에 불과하다. 그 자신도 그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아마 내내 ‘나’로 지칭하던 자아를 갑자기 ‘그’라는 시점이 3인칭으로 바뀐 것은 아마도 스스로 부끄러움을 자각한 그의 ‘한걸음 물러서기’의 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암전'
: "그는 순식간에 퇴장했고
조명이 잔해를 보여주고는 곧 꺼진다.
.....................암전" - <석고 두개골> 中 -
"다시 빠져나갈 수 있을지 아슬아슬하다.
돌아갈 길목에다가 램프를 두고 왔던가?" - <우울한 거울3> 中 -
'바깥'
: 황지우의 바깥에 대한 동경은 절실하다. 특히 불빛조차 사라진 (스스로 통유리라 지칭하는) 그 공간 안에서의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제 나가고자 한다. 우리가 느끼듯 그도 답답하다.
"어? 여기가 바깥인데 왜 안 나가지냐?
無明盡 無無明盡
바깥을 보는 것까지는 할 수가 있지,
허나, 바깥으로 한번 나가보시지
아아, 울고 싶어라; 투명한 것 가지고는 안 돼"
- <유혹> 中 -
그 누가 나를 여기서 구해줄 수 있으랴
하지만 그의 탈출하고자 한 노력의 결과는 붙박이장처럼 정지되어 있고, 정체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수편의 시에서 계속적으로 보여 지는 이러한 무대화 형식과 시적허용을 전면적으로 활용한 어법표기는 상황을 제시만 할 뿐 상승하지 못했다. 연극을 하기위한 또는 촬영을 하기위한 무대를 설정하였음은 분명하다. 그의 시를 읽으면 머리 속에 한 폭의 그림처럼 떠오르니 말이다. 하지만 이 무대위에선 어떤 연극이,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그냥 별일 없었다.
모두는 붙박이장처럼 전시회장에 전시된 세트처럼 굳어버렸다.‘폼으로 갖다놓고 읽지도 않은 것처럼 되어버린 쓰러져 버린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 앞에서 그는 ‘그저 끊임없이 부글거리는 수족관’일 뿐이다. 움직일 수도 변화할 수도 없는 수족관.
이는 그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안락하고 익숙한 세트 안에서 그 역시 빠져나오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정말 바깥을 동경하고 그리워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저 바깥을 동경했던 과거를 그리워하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치열했던 80년대의 이야기도 가끔씩 스치는 인간과 존재에 대한 고민도 이제는 빛바랜 사진처럼 너무 아련한 기억이다. 단조롭지만 안락한 일상에 묻혀버릴 수 있는 기억과 생각들. 고민이나 의식이 되 살아 날 때마다, 바깥이 그리워질 때마다, 주변 일상의 묘사로 더 이상의 진전을 막아버리는 그의 모습은 한 장의 사진처럼 생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 답답하기만 할 뿐 당장 그 곳을 박차고 나오라고 소리칠 수는 없다. 이는 단지 그 뿐만 아니라, 일상에 갇힌 채 한 편으로 고민하고, 한 편으로 치열하게 일상을 살아내고 있다고 자부하는 안타까운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 인류를 위해 누군가 한 사람은
사막으로 나가봐야겠지요?"
- <等雨量綠>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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