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우리사회에서는 '고통분담'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같은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고통을 나누자는 얘기니,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는 고통을 개인의 책임으로 몰아붙이는 '삭막한 전통'이 없다고 얘기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완전한 오해일 뿐이다. 우리가 강요받은 고통분담은 사회가 책임져야 할 몫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이다(게다가 진정한 분담은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나누어 같은 상태가 되었을 때 가능하다. 평등을 전제하지 않는 분담은 불평등한 현실을 강요할 뿐이다). 그것은 고통의 원인과 책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난 뒤 양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슬픔을 감추고 덮으려는 '사기'였다. 힘과 돈을 가진 자들의 실수를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떠넘기는 '알리바이'였다. 그리고 불행히도 그 불공평한 분담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아서 클라인만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고통에 대해 얘기한다. 이러이러한 고통이 있다며 단순히 나열하는 게 아니라 고통의 원인을 파고든다. 원인을 캐보니 그 뿌리에는 권력과 부가 자리잡고 있다. 권력과 부라는 구조적인 폭력이 개인에게 체계적으로 고통을 주고 있기에
"고통을 설명하려면 광범위한 문화적, 역사적, 정치·경제적 틀 안에 개인의 전기를 담아야"(45∼46쪽)한다.
| | | 저자소개 | | | | - 폴 파머(Paul Farmer)= 하버드 의대 사회의학부 조교수, 보스턴의 브리엄 여성 병원, 아이티 외곽의 본 소뵈르 클리닉 근무.
- 탈랄 아사드(Talal Asad)= 존스 홉킨스 대학 인류학 교수.
- 앤 해링턴(Anne Harrington)= 하버드 대학 과학사 교수.
- 앨런 영(Allan Young)= 캐나다 맥길 대학 인류학 교수.
- 마가렛 로크(Margaret Lock)= 맥길 대학 사회의학 및 인류학 교수.
- 아서 클라인만(Arthur Kleinman)= 모드 앤드 릴리안 대학 의료 인류학 교수, 하버드 의대 사회의학과 학과장, 하버드 대학 인류학과 교수.
- 조안 클라인만(Joan Kleinman= 중국학자, 하버드 대학 의료 인류학 프로그램 연구원.
- 데이비드 B 모리스(David B. Morris)= 작가.
- 베라 슈와츠(Vera Schwarcz)= 웨슬리언 대학 동아시아 연구소 연구원, 역사학과 교수.
- 비나 다스(Veena Das)= 델리 대학 사회학과 교수.
- 맘펠라 람펠레(Mamphela Ramphele)= 남아프리카 케이프 타운 대학 명예 부총장.
● 역자소개
- 안종설: 서울에서 태어나 성균과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출판 관련 편집·기획 일을 하다 지금은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동안 옮긴 책으로는 <체 게바라한 혁명가의 초상>, <몬테나의 북쪽>, <사람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 등이 있다. / 책표지 | | | | |
그 고통은 단순히 육체적인 고통만을 의미하지 않고
"심리적, 실존적, 정신적 고통을 포함하며, 때때로 '절망'이나 '고립'과 동일한 의미로 쓰인다. 사회적, 도덕적 차원의 고통이 여기에 속하며, 이 때의 고통은 부분적으로 특정 집단이나 공동체 내의 구원, 가치, 책임, 정의, 결백, 속죄 등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123쪽)
이런 사회적, 도덕적 차원의 고통은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사회의 변화를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고통을 드러내고 제거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 고통은 상품화되고 있다. 멀리 이라크나 아프리카에 사는 사람들의 고통은 하나의 볼거리로 전락하고 있다.
"보스니아, 르완다, 자이르, 소말리아,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발생하는 처참한 갈등은 국지적인 재앙의 차원을 넘어서, 수천 마일이나 떨어진 안전한 곳에서 일상적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비극으로 전환되었다. 사회적 고통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현실의 재현이라는 측면에서 문화적 표상의 특색을 띤다"(13쪽).
겉으로 드러난 '지구촌'의 속내는 이렇게 일그러져 있다. 이제 방송에서 제시하지 않은, 상품으로 변하지 않은 현실은 현실로 인정되지 않는다. 남편이 한 여자 연예인을 방망이로 때린 뒤에야 가정폭력의 심각성이 널리 인정되듯이, 일상 속의 폭력과 고통은 이미지로 드러나지 않으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설사 그런 이미지로 드러난다 하더라도 그 폭력과 고통은 단순히 한 개인의 실수, 한 가정의 문제로 제한된다. 우리가 사는 이미지 시대의 모습이다.
저자들은 이런 이미지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도 찾고 있다. 극복을 위해선 먼저 현실을 똑바로 봐야 하고 그러려면 이미지를 경유하지 않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
"사회적 삶의 원천과 형태, 결과의 커다란 영역에 개입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 시대의 곤경을 새롭게 규정할, 보다 인간적인 새로운 방법이 뒷받침된 사회 지도와 이론의 도움을 받아 그 토대를 다질 필요가 있다"(26쪽).
미디어를 거치면서 '왜곡되는' 개인의 경험과 고통을 바로 전달하려면,
"이윤 창출에만 급급한 자본주의적 경향, 정치 이데올로기의 당파성, 일차적으로 전문 집단에 봉사하는 협소한 과학기술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며, 이러한 요소들의 영향력이 통제되는지 감시해야 한다."(213∼214쪽) 그리고
"현지에 거주하는 사람들(단순히 국가 기관의 전문가가 아니라)의 단순한 개입을 넘어서 현지인들을 프로그램 개발과 평가 과정에 편입시켜야 한다.…궁극적으로 우리는 고통과 잔학한 학대 경험의 상품화, 고통을 관음증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등과 같은 세계화의 부정적인 측면에 대처해야 한다."(214∼215쪽)
하지만 그런 고통과 슬픔을 포착하고 드러내기란 쉽지 않다. 고통과 슬픔은 과학적인 방법으로 계산될 수 없고, 슬픔과 고통을 자주 호소하면 감각이 무디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로그램만이 아니라 따뜻한 감성과 호소력을 필요로 한다.
"진정한 관심은 침묵 속에 갇혀 있던 개인의 슬픔에 의미를 부여하고, 마음을 녹여 더 많은 말을 하게 하며, 더욱 따뜻하게 상처를 어루만진다"(265∼266쪽).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노력이다. 고통을 받는 사람 스스로가 그 고통의 원인을 찾고 의미를 부여하며 그 고통을 솔직히 드러내야 한다.
"자신의 고통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완벽하게 알고 있으면 그 고통을 감당하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어떤 역사적인 오류 때문에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따질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되는 것이다. 이러한 권리는 반드시 물질적인 측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고통에 대한 인식이며, 그 고통을 사회적인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영역으로 전환시키는 일이다. 자신의 상처를 솔직히 인정하고 그것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치유의 과정으로 들어설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는 것이다"(340쪽). 이젠 아프면 아프다고 소리치고 그 고통의 원인을 뚜렷이 밝히자. 그건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똑같은 고통을 겪지 않도록 돕는 힘이기도 하다.
세상에 고통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편한 삶을 산다 해도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고 살 순 없다. 그래서 고통은 보편적인 동시에 특수한 것이다. 실연의 고통은 모든 사람이 느끼는 보편적인 것이지만 누군가는 항상 실연당하는 사회적 조건에 살기에 특수한 것이기도 하다. 실연이라는 고통이 가진 경계는 그리 뚜렷하지 않지만 그 고통의 사회적 조건은 비교적 뚜렷하다. 감정의 흐릿한 경계를 지우자는 게 아니라 그 뚜렷한 사회적 조건의 차별을 없애자는 것이다. 따라서 소수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 목소리는 언젠가 내 목에서도 터져 나올 절규일 수 있다.
아서 클라인만·비나 다스 외 지음/안종설 옮김, <사회적 고통>, 그린비,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