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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떨결에 태자의 칭호를 받은 유리는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았다. 태자의 의관을 차려입고 난 뒤에 그가 처음으로 한 일은 친구나 다름없는 옥지, 구추, 도조를 궐 안으로 불러들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워낙 무뢰한으로 살아온 그들이다 보니 격식을 따지는 궁궐 생활은 그다지 몸에 맞지 않았다. 태자란 칭호만을 가지고 아침저녁으로 부모에게 문안인사를 하는 것 외에는 며칠동안 별일 없이 무료하게 지내던 유리 앞에 산적 같은 사내가 떡 하니 나타났다.

"전 협부라고 합니다. 한 때 비류, 온조 두 왕자님들의 무예스승이기도 했습니다."

"예, 그런데 어쩐 일이 신지요?"

"전에 보아하니 무예에 대해서는 제가 그리 가르칠 것이 없는 듯 하더이다. 한 나라를 이끌 태자라면 무예는 자신의 앞가림정도는 할 정도면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학문은 그렇지 않사옵니다. 어느 정도가 되었다 하더라도 더욱 갈고 닦아야 하는 것이 학문의 길입니다."

사실 유리는 무뢰한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아예 학문과는 담을 쌓고 지낸 바였다.

"그런데 생김새는 그리 학문과 관계가 없어 보이시오."

옥지가 건들거리며 은근히 협부에게 시비를 걸었다. 벌써부터 태자라는 배경을 두고 무뢰한의 기질이 나온 것이었다. 협부는 코방귀를 끼며 옥지를 무시했지만 옥지는 거기서 그치질 않았다.

"그러는 어르신은 얼마만큼 학문을 닦았소?"

협부는 주먹이 나가려는 것을 가까스로 자제하고 유리에게 말했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먹을 가까이 하면 검어지듯 나쁜 사람을 가까이 하면 그 버릇에 물들기 쉬운 법입니다. 이들의 말은 무시하고 지금 저를 따라서 스승을 만나러 가시지요."

뜻밖에 문자가 나오자 당황한 옥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고 유리는 흔쾌히 협부를 따라 나섰다.

"뭐해? 형님, 아니 태자님이 가시면 우리도 따라 가야지."

협부가 옥지, 도조, 구추가 따라나선 유리를 안내한 곳은 바로 을소가 강론을 펴고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벌써 비류와 온조가 수업을 받고 있었다. 이들은 유리를 보자 금세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이 분은 앞으로 태자님에게 좋은 말들을 들려주실 스승이십니다."

구추가 빈정거리는 투로 말을 함부로 내뱉었다.

"보아하니 아직 새파란 풋내기구먼 뭐가 스승이라는 거야?"

이에 협부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구추의 멱살을 잡아 집어던져 버렸다.

"아니 이 늙은이가!"

옥지가 화를 버럭 내며 머리로 협부를 받으려 했지만 협부는 이를 살짝 피하며 옥지의 뒷덜미를 가볍게 가격했다. 옥지는 땅바닥에 엎어져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도조는 협부의 기세에 눌려 눈치만 보고 있었다.

"너희들은 이만 물러가라."

유리가 볼썽사납게 쓰러진 옥지와 구추를 보고 명하자 도조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들을 일으켜 세우고선 어디론가 가버렸다. 을소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태연히 강론을 계속했다.

"무릇 교만하고 사치스럽고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고 멋대로 행동하는 것은 나쁜 길로 드는 지름길이옵니다. 태자께오선 이를 어찌 생각하십니까?"

유리는 잠시동안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렇게 하지 않도록 따끔하게 혼을 내줘야겠지요."

을소가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습니다. 이런 네 가지 나쁜 버릇을 초래하는 것은 총애와 우대가 지나친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태자께서는 이를 각별히 유념하여 주십시오."

유리는 약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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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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