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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popdb.com
앨범 첫 곡이자 첫 번째로 들고 나왔던 '안녕하세요'를 들어보면 이들은 단순함과 유치함, 하지만 결코 단순하지도 않고 유치하지도 않은 것을 들고 나옴을 알 수 있다.

'우리 강아지는 멍멍멍'과 '나는 누군가가 정말 필요해'는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정말 필요해서 주변을 둘러본 것일 수도 있고, 누군가 필요한 것이 일상인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단순함으로 사람들 머릿속에 자신들을 각인시키고자 했으며, 이것은 펑크 본연의 전략 중 하나이다.

다음 곡 '슈퍼마켓'을 들어보면 이런 전략을 다시금 느낄 수 있다. 슈퍼마켓이 묘사되면서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첫눈에 꽂히는 사랑, 이것은 90년대 이후 젊은이들에게는 일상이기도 하다. 요즘이야 엘리베이터 안에서 한다는 둥 온갖 '야한' 가사들이 난무하지만 사실 90년대 중반만 해도 전혀 그렇지 못했다. '슈퍼마켓'에서 묘사되는 그 사랑은 그래도 상당히 풋풋하다.

이런 젊은 감성은 '요즘 애들 10계명'이나 '어울리기'에서 더욱 상세히 묘사된다. 전체적으로는 억압 속에서 벗어나서 그 시간에 사랑이나 하라는 가사를 담고있으며, 자아성찰과 내적 성장을 얘기한 것은 '빠삐용'이나 '도레미파솔라시도'같은 곡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구에 빗대본다면 70년대의 펑크적 반항과 60년대의 '꽃의 아이들'적인 감성의 뒤범벅이라고나 할까.

'딸기'는 이 앨범에서 두 번째로 들고 나왔던 곡으로 이 곡으로 이들은 '떴다'. 가사도 가사지만 이윤정이 울부짖으며 내뱉는 '딸기가 좋아'라는 가사야말로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하는 것이 뭐가 나쁘냐는 성토이자 선언이었으며, 이것으로 삐삐밴드는 사람들에게 확 다가갈 수 있었다.

삐삐밴드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존재는 이윤정이었다. 국회의원의 딸인데 이렇게 자유분방하다는 배경도 특이했지만 튀면서도 곱상한 외모, 울부짖는 보컬 등은 기본적으로 남성의 음악이라 할 수 있는 락음악 속에서 여성이 주인공이었던 특이한 사례였다. 결국 이러한 케이스는 이후 자우림과 주주클럽이 나올 수 있는 토양을 만든 것이다.

이 앨범에 담긴 커버나 음반 속지의 아트웍은 원색조, 감각적인 촬영, 일상성, 키취적 이미지 등이 뒤섞여 상당히 모던한 느낌을 준다. 특히 마지막 페이지에 나준기의 설치미술 사진을 담아둔 것은 이들에게 있어서 현대미술이나 자신들의 이미지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이들의 자유분방한 생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 앨범은 10대 중·후반에 타깃을 맞추고 있고 단순한 사운드와 세련된 패션으로 접근한다는, 철저하게 기획된 프로젝트 앨범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났다면 이 앨범은 그저 그런 앨범 중 하나로 묻고 넘어갈 수도 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이들의 음악이다. 일부러 연주를 잘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을 만들었지만 '딸기'에 나오는 테크노적인 리듬파트의 반복이나 '요즘애들 10계명'같은 곡에서의 베이스라인과 훵크적인 기타소리는 쉽게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의 전신 H2O의 마지막 앨범 '오늘 나는'이 한국 락에서 가장 미려한 사운드를 만들어 낸 앨범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당연한 결과이다. 그리고 이러한 실험은 다음 앨범 '불가능한 작전'에 실린 '유쾌한 씨의 껌씹는 방법'같은 곡에서 더더욱 첨예하게 나타나게 된다.

이 앨범에서도 '사랑'의 꽉짜인 모던락 사운드, 그리고 마지막 곡 '1995년 7월 9일 1:10':15'' AM'같은 트랙들에 연주인으로서의 야심이 잘 드러나 있다.

이 데뷔앨범 '문화혁명'은 나름대로 당시의 오버그라운드(라고 하기도 뭐하지만)가 만들 수 있는 가장 탄탄한 라인업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각광받는 프로듀서중 한명인 송홍섭과 그의 송 스튜디오에서 녹음이 이루어졌고 마크 코브린(MarkCobrin)과 한의수라는 실력있는 엔지니어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 앨범뒷면에 인쇄된 스텝들의 단체사진을 보면 이들이 얼마만큼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앨범작업을 했을 것인가가 느껴진다.

삐삐밴드는 꽤 독특한 계보를 가진다. H2O라는 드물게 모던하고 꽉 짜여진 락음악을 연주하던 밴드에 있던 박현준과 강기영은 톡톡튀는 감성의 소유자인 이윤정을 만나 삐삐밴드를 결성한다. 그 이전에 박현준과 강기영은 이미 훌륭한 세션맨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리고 삐삐밴드가 오래가지 못하고 해산되자 박현준과 강기영은 고구마라는 특이한 캐릭터를 맞이하여 밴드명도 삐삐롱스타킹으로 바꾸고 더욱 펑크적인 사운드를 시도한다.

삐삐밴드 시절만큼은 아니었지만 이들은 여전히 스타일리스트였다. 이후 박현준과 고구마는 신윤철과 함께 원더버드를 만들고 강기영은 달파란이라는 예명으로 테크노 DJ생활을 시작했다. 이윤정은 테크노 여전사같은 이미지로 데뷔작을 내놓았지만 이후 이정현에게 그 이미지를 빼앗겼다. 나중에 상업 작곡가인 윤일상과 만나 거의 벗다시피한 느낌의 두 번째 앨범을 내놓으며 재기를 시도했지만 곧 사장되었다.

달파란은 테크노 DJ로서의 앨범 '휘파람 별'을 내놓아 국내 DJ계를 석권했으며 DJ생활과 영화음악가로서의 생활을 병행하고 있다. 박현준은 원더버드 이후 옐로우키친의 여운진과 함께 에프톤사운드라는 일렉트로닉 듀오를 결성했다. 즉 이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나름대로 입지를 굳히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이들이 가장 빛났던 순간은 삐삐밴드 시절, 그것도 이 데뷔앨범을 내놓았을 때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음악적으로는 삐삐롱스타킹 시절이나 개인 프로젝트 시절이 더 뛰어났을지도 모르지만 이들은 의도치 않게 시대와 결합해서 폭발적 파급력을 가지게 되었으며 자연스럽게 대안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지속적일 수 없었지만 원래 지속적이라는 것은 간헐적인 것들의 연속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90년대 중반 이후 우리 대중음악계에는 분명 대안적 흐름이 나타났고 이 앨범은 그 대안의 첫 번째 단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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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서재 출판사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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