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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나 오늘 빵점 맞았다~아.”
얼마 전 우리 집 작은 아이 인상이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장난끼 섞인 투로 말했습니다.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였지만 조금은 불안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뭐? 뭐라고? 빵점을 맞았어? 하~참, 요 놈 봐라, 빵점 맞구서 뭐가 잘했다구 이 놈이.”
“에이 참, 언제는 아빠가 빵점하고 백점하고 같은 거라면서...”
“뭐? 내가 언제 임마?”
“형아 백점 받아 올 때마다 그랬잖아...”

▲ 받아쓰기 연습하라 했더니 뱀 허물을 가지고 노는 인상이
ⓒ 송성영
아내와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자업자득이었습니다. 큰 놈 인효가 100점을 받아와 기고만장할 적마다 내가 늘 그랬거든요.

‘백점하고 빵점하고 큰 차이가 없으니까 너무 좋아하지 마라. 백점 맞은 아이는 그냥 빵점 맞은 아이들보다 좀 더 빨리 그 문제를 잘 알았을 뿐이다. 빵점 맞았어도 틀린 문제들을 뒤늦게 다 알게 되면 백 점이나 마찬가지다.’

막상 작은 놈 인상이가 빵점을 받아 오자 나름대로 지켜온 관념적인 교육관이 싹 달아나 버리고 순간 걱정이 앞섰습니다. 20점 40점 받아올 때는 그런 대로 참을 만했는데 빵점은 좀 심했다 싶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짜리인 인상이는 거의 매일 받아쓰기 시험을 봅니다. 가끔씩 80점 정도를 받아오기도 하고 또 때로는 40점, 20점도 받아 옵니다. 고득점을 받아올 때는 하루 전날 예습을 했던 단어나 문장들이고 저득점을 받아온 것을 살펴보면 인상이가 처음 대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종종‘나머지 공부’를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빵점 맞은 게 잘한 건 아냐 임마! 시험 본 거 가져와 봐, 어떻게 해서 빵점을 받을 수 있는지 어디 한번 보자!"

받아쓰기 공책을 펼쳐보니 정말로 빵점을 받아왔습니다. 얼핏보기에 틀린 데가 없어 보였지만 동그라미는 한 개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든 문장 앞에 빗금이 그어져 있었습니다. 10개의 짤막한 문장 쓰기 중에서 단 한 개도 맞은 게 없었습니다.

인상이가 빵점을 맞은 이유는 따옴표나 마침표를 찍지 않았거나 혹은 쌍시옷 받침을 써야 하는데 그냥 시옷 받침을 했거나 ‘에’를 ‘애’로 썼거나 ‘혜’를 ‘헤’로 썼던 것이었습니다. 단어를 제대로 썼다 싶으면 띄어쓰기에서 틀려 있었습니다. 열 문제 중에서 반 이상이 띄어쓰기에서 틀렸습니다.

“띄어쓰기 하는 법, 엄마가 알려 줬잖아”
“엄마는 천천히 띄어쓰기로 불러주는데, 선생님은 그냥 막 이어서 불러 주셔서 하나도 모르겠어, 어떻게 띄어 써야 할지 모르겠어..."

녀석의 이런저런 사정 얘기를 들어보니 나름대로 빵점을 맞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실 띄어쓰기는 지 아빠도 틀리기 일쑤인데, 초등학교 1년생에게 그런 이유로 빵점을 준다는 것은 좀 가혹한 일이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인상이 담임 선생님 교육관에 참견을 하기도 뭐하고 참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에헤 자식! 그래 좋다, 인정한다. 백점하고 별로 차이가 없다는 거 아빠도 인정한다. 이런 빵점을 받아 오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아빠가 그랬지, 빵점 받아 오는 것은 괜찮지만 틀린 것은 다시 공부해서 알려고 해야 한다. 알았지.”

담임선생님에게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인상이가 받아 온 빵점 짜리 받아쓰기에 백점을 줘도 상관없어 보였습니다. 받침 틀린 것이나 띄어쓰기 따위에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아빠 나 빵점 맞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녀석이 오히려 대견해 보였습니다.

빵점 받은 문장들을 다시 한번 제대로 써 보라 했더니 인상이는 그새, 사랑채 옆 개울가로 쪼르르 달려가 뭔가를 손에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돌 틈에서 발견한 뱀 허물이었습니다.

▲ 인상이는 받아쓰기에서 빵점을 받아오지만 용그림은 썩 잘 그립니다.
ⓒ 송성영
나는‘받아쓰기 공부 안 해’하고 압력(?)을 행사하려 다가갔다가 되려 캠코더를 챙겨들고 다시 돌아와 사진을 찍어 주었습니다. 받아쓰기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공부지만 뱀 껍질을 꼼꼼히 살펴보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는 쉽게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빠, 이거 뱀 껍질이 드래곤볼에 나오는 용처럼 생겼다.”

인상이는 그 날 오후 내내 받아쓰기 공부 대신 뱀과 용 공부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평소 용 그림을 썩 잘 그리는 인상이는 이제 뱀 껍질 관찰을 통해 용 그림을 더 잘 그리게 될 것입니다. 또다시 받아쓰기에서 빵점을 받아오게 될런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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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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