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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꿈의 파편들이 쏟아지려 합니다. 아득한 현실에 숨이 막혀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는 이들이 객석으로 모여듭니다. 비상구만이 깜박이는 새까만 허공. 그 곳을 수놓는 무언가에 사람들은 단단히 잠궈둔 마음을 열며 나름의 추억과 꿈에 젖어듭니다.

만화방에서 5원 내고 친구들과 옹기종기 모여 티브이 보던 시절. 담 넘어 들어간 극장에서 영사실의 불빛을 숨죽여 바라보던 호기심 어린 눈빛이 있었습니다.

ⓒ 김진석
희미한 '빛'을 통해 가랑비 내리는 화면과 간헐적으로 끊기는 배우의 목소리가 실려옵니다. 잡을 수 없는 그 아련한 빛을 잊지 못해 25년간 쫓아온 사람이 있습니다. 낮과 밤의 구분이 없는 '올빼미 특별시' 동대문. 영사기사 김형길씨(49)의 감독 아래 24시간 꿈의 향연이 펼쳐집니다.

"꿈의 공장에서 사람들에게 문화를 심어주는 일이죠. 내 손으로 만진 필름을 통해 사람들이 울고 웃고 재미있어 한다고 생각하면 참 뿌듯해집니다."

ⓒ 김진석
"영화 <시네마 천국>은 제 얘기예요.(웃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얼마나 만져보고 싶었던지…. 일 시작한 지 6개월만에 처음 만져본 기계였어요. 요즘은 대부분 자동화 기계화되어 견습생들이 빨리 기계를 만질 수 있는데 저희 때만 해도 영사 기계 한 번 만져보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그땐 일일이 릴로 감아돌리고 필름 편집하느라 직접 우리 손으로 다했어요. 그래서 오히려 기술을 배우고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옛날이 더 좋았던 것 같아요.

극장도 옛날이 더 재미있었죠. 요즘은 영화가 아니어도 즐길 문화가 풍족하지만 우리 땐 극장에서 콘서트나 공연 등 모든 걸 다 했어요. 가끔 그때의 낭만이나 향수가 생각나기도 해요. 하지만 시대가 많이 변했고 관객들의 취향이나 수준도 무시할 수 없잖아요. 요즘 관객들은 과거와 달리 눈 높이가 정말 높아요! 시사회나 문화적 지식이 풍부해서 그런지 관객이 외면하는 영화는 분명 무언가 이유가 있어요. 거기에 발맞춰 극장도 자연스레 현대화되는 거죠."

ⓒ 김진석
"올 시즌은 '투, 스리' 의 해가 될 거예요. <매트릭스> <반지의 제왕> <조폭마누라> <해리포터> <터미네이터> 등 '원' 에 이어 많은 시리즈물이 대기중입니다. 특히 <매트릭스 2>같은 경우는 현재 프린트가 부족해 애를 먹고 있어요. 아마 국내 최다 동시 개봉이 될 거예요.

제가 고리타분한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영화들은 '명화'가 없는 것 같아 아쉬워요. <겨울나그네> <러브스토리> <벤허> <십계> <졸업> 등 옛날 명화 만한 것들이 없네요. 한 영화가 뜨면 비슷한 소재로 그걸 따라하는 아류작들만 많이 만들어질 뿐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명화가 없어요. 일을 하면서 간간이 모니터를 하기도 하는데 영화 앞, 뒤 잠깐씩만 봐도 그 중간 과정이 뻔히 드러나 버려요.

영화는 한 나라 문화의 척도일 수 있는데, 요즘 한국 영화를 통해 과연 외국인들이 우리 문화를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생겨요. 영화뿐 아니라 배우들도 반짝 스타들만 많지 오래도록 깊이 있는 연기를 하는 배우들이 부족해요.

개인적으론 춘향전같이 우리의 문화가 담긴 깊이 있는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졌으면 하는데, 요즘 관객들은 그런 영화들을 보려 하지 않는 것 같아요."

ⓒ 김진석
"제임스 카메론이 만든 영화는 꼭 챙겨 봐요.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는 너무 동화적이라는 느낌이 들고…. 얼마 전 <오아시스>라는 영화를 봤는데 문소리씨 연기가 정말 대단하더라구요. 처음엔 진짜 소아마비인 줄 알았다니깐요.

사람들은 우리가 영사실에 있다고 막연히 영화를 많이 볼 거라 상상하는데 실제론 그렇지 않아요. 저뿐 아니라 이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정말 좋은 영화가 아니면 구태여 챙겨 보지 않아요. 이젠 영화를 하도 많이 봐서 대충 중간만 훑어봐도 무슨 얘기인지 다 알 수 있을 정도죠."

ⓒ 김진석
"아침에 햇빛을 보면 눈이 부셔요. 말끔한 모습으로 출근하는 사람들과 달리 밤새 일하고 꾀죄죄한 모습으로 퇴근할 때 참 민망해요. 우리 같이 서비스 업종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남들 놀 때 일하고 남들 바쁘게 일할 때 쉬는 경우가 많아요.

얼마 전 한 동료가 어린이날 아이들이랑 같이 못 놀아주고 근무하는데 참 가슴이 아프더라구요. 저 또한 집안의 경조사에 참석하지 못한 적이 많아 가족에게 정말 미안해요.

시간이 부족해 특별히 취미랄 것도 없어요. 낮에는 아무리 잠을 자도 밤에 자는 것만큼 개운하지가 못하죠. 집에 가면 항상 잠자느라 아내와 아들녀석이랑 얘기할 시간도 없구요. 집에선 절 '영화 방 손님'이라 불러요. 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건 '가족'인데 마음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아 항상 가족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아요."

ⓒ 김진석
늦은 밤 그는 오래된 소중한 벗 담배와 적적함을 달래며 아내에게 종종 편지를 씁니다. 가끔 티브이에서 멋진 관광지가 소개되면 그는 지도를 보며 아내와 함께 떠날 '미지의 여행'을 상상하기도 합니다.

"아직 안 잤어? 나 취재하는 중이야, 정말이야! 바꿔줄까?"

어김없이 걸려오는 아내의 전화에 수줍어하면서도 좋은 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그냥 아내의 모든 게 다 좋아요. 얼마나 고운데요.(웃음)"라고 말하는 그는 "다시 태어나도 반드시 지금의 아내와 함께 살 것"이라며 애틋함을 감추지 못합니다.

ⓒ 김진석
"그저 일만 하느라 마음놓고 편히 놀아 본 적이 없어요. 아직 비행기도 안 타봤고 제주도에도 한번 못 가봤네요. 아들 장가 보내고 말년에는 아내랑 원 없이 남들 다 가는 여행 다니는 게 남은 꿈이에요.

그 사람 나 만나서 고생만 했는데 남들처럼 잘 해준 게 없어 미안하고 항상 고마워요. 난 가족에게 정말 할 말이 없는 사람인데…. 날 믿고 이해해주는 아내가 있기에 지금 제가 이렇게 아무 걱정 없이 일 할 수 있는 거죠."

ⓒ 김진석
그의 손을 거쳐간 수 많은 필름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추억을 새겨 넣었을까. 영사실을 훔쳐본 동경 어린 눈빛의 그 꼬마는 아직도 성장 중이다.

"필름 돌아가는 소리만 들어도 기계의 상태를 알 수 있어요. 무언가 기계에 문제가 생기면 필름 돌아가는 소리가 탁해요. 솔직히 우리 집 청소하는 것보다도 더 깨끗이 청소하고 관리해요.

지금껏 내가 건강히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저에겐 가족 다음으로 소중합니다. 남들이 일이 없어 경로당 다닐 나이까지도 우리는 능력이 있고 본인이 원하면 평생 일 할 수 있습니다. 그냥 영화가 마냥 좋아요. 영화를 영원히 사랑합니다. 다시 태어나도 전 영사기사를 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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