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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부대변인은 "국익을 위한 실리외교를 한 대통령의 노고를 이해하지 못하고 굴욕외교로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논평하였다. 사실 국익이 우선이냐, 민족적 자존심이 우선이냐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쉽지 않다. 우선 국가적 또는 민족적 자존심과 명예도 국익에 포함되므로 질문 자체가 그렇게 논리적이라고 보기 힘들다. 하지만 일단 양보해서 국익의 범주에 민족적 자존심은 제외시키고 생각해보자.

노 대통령이 방미 중에 언급한 미국에 대한 찬사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의 친미 발언은 예의상 그렇게 할 수도 있는 것이고, 유시민의 표현대로 립서비스에 불과할 수도 있다. 우리를 낮추진 않는 한 상대 칭찬을 했다고 해서 자존심이 상한다고 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다만 노 대통령의 발언이 "할 말은 하겠다"던 대통령 후보시절 모습과 너무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지지자 중에 배신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그러나 친미성 발언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논점을 흐리게 하는 감이 있다.

중요한 것은 노 대통령의 방미가 국익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나는 방미결과로 한반도에 전쟁의 가능성이 높아졌으니 국익이 손상되었다고 본다. 국익이 손상되었으니 실리외교가 아닌 것은 자명하다. 노 대통령의 방미활동이 문제인 것은 그것이 굴욕 외교이어서도 아니고 실리위주 외교여서도 아니고 실리를 포기하였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방미성과를 지지하는 측은 우선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합의하였다는 점을 내세운다. 그러나 미국 측이 말하는, 그리고 노 대통령이 동의한 평화적 해결은 립서비스에 지나지 않는다.

공동선언은 '한반도에서의 위협이 증대되면 추가적 조치를 검토한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회담 직전 무력사용을 포함한 모든 길이 여전히 열려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AP통신에 따르면, 미 행정부의 고위 관리가 정상회담 후 기자들과 만나 공동보도문에서 언급된 "추가적 조치"는 "다양한 (외교적) 수단뿐만 아니라 군사행동도 의미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굳이 이런 친절한 해명이 없더라도 그간의 미국의 자세로 미루어 볼 때 추가적 조치에 합의한 것은 대북무력제재에 대한 길을 열어 놓은 것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아니다. 미국의 무력사용 -> 북의 반격 -> 한반도 전쟁으로 이루어지는 길에 대한 가능성을 높여 놓은 것이 어떻게 국익인가?

노무현 대통령은 방미 사흘째인 13일(한미정상회담 이전)에 한미정상회담과 관련, "북핵문제는 결코 용납할 수 없지만 반드시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선에서 정리하고 나머지는 발표 없이 합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점을 고려하면 아무리 변명을 하더라도 공동보도문의 내용이 그가 애당초 원하던 것이 아니었던 점은 분명하다.

문제는 본인이 원하지 않던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에 머물지 않고 이를 정당화하려고 시도하는데서 더 커진다. 실수 또는 역부족 사태를 합리화하기 위해 둘러대면 될수록 부시 쪽과 코드가 맞아버리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PBS와의 회견에서 "북한은 이라크전에서 보여준 미국의 엄청난 군사력에 겁을 먹고 있다"며 "북한이 겁먹은 것은 북한문제 해결에 도움을 중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사실 무력사용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배제해서 협상력을 떨어뜨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고, 노 대통령도 전에 미국의 이러한 입장을 이해한다고 말한 바 있다. 다만 상대 입장에 대한 이해와 동의는 의미의 차가 큰데 노 대통령은 동의하는 단계까지 이른 것이다.

과연 무력사용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 북핵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까? 결론은 부정적이다. 설사 그것이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평화적 북핵문제 해결 가능성을 높인다 할지라도 동시에 비평화적 파국의 가능성도 높이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받아드릴 수가 없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확률은 단 5%라고 하더라도 너무 높지 않는가? 그 이유는 방미 전 지난 9일 노 대통령의 발언으로 충분하다.

노 대통령은 워싱턴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북한과의 무력충돌은 한국에게는 참화"라고 언급하면서 대북 무력공격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재차 천명했다. 그전에도 노 대통령은 "미국의 북폭은 논의 대상으로 삼는 것조차도 안된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필자도 만일 북한의 핵무기 개발 야심이 아주 강하고 한국을 포함한 외국에 핵을 이용하여 선제공격을 불사할 의사가 있다면 한미양국이 예방적 조치로서 북폭을 협상카드로 활용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본다. 그러나 북한의 입장은 핵을 포기할 테니 우리를 치지 않는다는 보장을 해달라는 것이다. 지난번 북경 3자회담에서 북한의 제안이 그걸 말해준다. 북한은 제네바합의의 틀로 돌아가길 원하고 있다. 다만 미국의 공격가능성을 우려하여 불가침조약의 추가를 원하는 것이다.

북핵문제의 해결책은 간단하다. 미국이 북한을 침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북한은 핵을 포기하면 된다. 미국은 북한을 믿지 못하겠지만 북이 핵개발을 지속할 경우 불가침조약의 전제가 무너지는 것이므로 불가침조약을 폐기하면 된다. 북한이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유연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반면에 미국은 어떤가? 부시정부의 지금까지의 공식적 입장은 "대화로 해결한다. 그러나 협상은 안한다" 그리고 "평화적으로 해결한다. 그러나 무력사용을 배제하지 않는다"이다.

앞뒤가 안 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주장을 풀이하면 "우리에게 무얼 요구하지말고 먼저 핵무기(개발계획)를 포기하라. 그렇지 않으면 봉쇄정책을 펴고 그것도 효과가 없으면 무력을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미정책당국자 중에서도 앞쪽에 무게가 실리면 온건파고 뒤쪽에 무게가 실리면 강경파인데 이번 한미정상의 공동선언은 강경파의 입장을 강화시켜주는 셈이 되었다.

사실 미국은 북한의 제안을 받아들여 손해 볼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경제지원이라는 짐은 한일 양국이 질 것이고 북한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미국도 체제보장을 철회하면 그만이다. 사실 협상이 타결되면 MD개발의 명분이 약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부시정부는 어차피 합리적 명분은 중요시하지 않는 입장이다.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어디에 있나? 그리고 강경파의 희망대로 무력으로 전쟁이라는 파국 없이 북핵문제를 해결한다고 해도 북한을 MD개발의 구실로 삼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북한의 제안을 거부하는 것은 북한의 체제보장은 북한이 미국의 요구에 응하고 난 후에 미국이 시혜적 차원에서 고려할 일이지 북한의 요구에 밀려서 할 일은 아니라고 보는 저급한 마초 심리 때문이다. 북한에 대한 불신도 그 배경이지만 합의라는 것이 상대가 안 지키면 깨지는 것이므로 대북 불신이 협상의 장애가 될 수는 없지만 부시나 럼스펠드는 그렇게 합리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비합리적인 사람들의 비합리적인 주장에 부딪히면 어떻게 해야할까? 최선은 합리적인 안에 대한 동의를 이끌어내는 것이지만 성공가능성이 낮으므로, 일단은 설득해보고 그게 안되면 서로 동의하는 부분만 공동선언에 포함시키고 나머지는 언급하지 않으면 된다.

속내는 다르지만 평화적인 해결이라는 표현에는 서로 이미 동의하므로 그것만 언급하면 된다. 하지만 공동선언은 노 대통령이 한미정상회담 직전인 13일 "북핵문제는 결코 용납할 수 없지만 반드시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선에서 정리하고 나머지는 발표 없이 합의할 것"이라고 스스로 밝힌 의지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

이게 실리 외교인가? 불량배의 가랑이 사이를 기더라도 얻는 것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얻은 것도 없이 오히려 잃고 와서 불과 며칠 전 한달 전 자신의 발언과 다른 주장을 하면서 국민을 설득하려든다?

물론 핵심적인 것은 아니지만 얻어왔다고 주장하는 것들도 몇 개 있다. 한미동맹관계강화, 노 대통령에 대한 불신해소, 경제적 신인도 제고 등이 그것이다. 우선 한미동맹관계 강화는 그것이 국익을 위한 수단이지 국익 자체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보수주의자들은 이점을 잘 모른다. 한미동맹관계는 어느 한 요소로만 구성되지 않는 다면적인 것이기도 하다. 국익에 도움이 되는 한미동맹관계도 있을 수 있고 국익에 저해가 되는 한미동맹관계도 있다. 이번에 강화한 한미동맹관계는 긴장확대와 전쟁이라는 국익 손상 가능성을 높인 것이다. 미국이 당장 협상을 포기하고 6월 달에 북폭을 하겠다고 할 경우 노무현정부는 한미동맹관계를 이유로 동의할 것인지 묻고 싶다.

노 대통령 개인에 대한 미국 일부의 불신 해소는 바람직한 것이지만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이번에 보여준 립서비스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그리고 노 대통령이 부시와 코드를 맞추지 않았다고 해서 그를 반미주의자나 용공세력으로 볼 사람은 없다. 부시와 코드가 맞지 않은 DJ를 반미주의자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서로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어 경제적 신인도를 제고할 수 있었다는 주장은 일면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지극히 근시안적인 것이다. 올해 경제성장률 영점 몇 퍼센트의 차이가 민족의 장래보다 더 중요한 것인가? 무디스사 등 일부 신용평가사가 미국정부의 입김을 받는 다는 의혹이 있긴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향후에 전개될 대북봉쇄나 북폭 가능성 증가가 한국의 경제신인도를 해치면 해치지 도움이 될 리가 없다. 당장 북미양국이 서로 주고받는 식의 협상으로 북핵문제를 해결하면 한국의 국가위험도는 크게 낮아진다.

주한미군 재배치문제와 남북경협의 북핵문제 연계에 대해서도 할말이 많지만 일단 접고, 실용주의를 거론하고 대안이 없었다며 노 대통령의 행보를 옹호한 이충렬 기자의 주장을 살펴보자.

1. 한미동맹의 파기를 선언하고 북한과의 민족공조를 통해 핵문제를 해결하는 방안.
2. 한미동맹도, 민족공조도 아닌 제3의 독자적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는 노선.
3. 미국과 일정하게 협조하면서 국제사회와 더불어 해결하겠다는 방안.

그는 위의 세 개의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부시의 일방주의 노선을 고려할 때 1과 2는 성립 불가능한 방식이며 3만이 현실적으로 선택 가능한 방안이라고 주장한다. 우선 경우의 수가 위 3개에 국한된다는 전제에 동의할 수 없지만 우선 1을 보자. 북한과의 민족공조를 통해 핵문제를 해결하더라도 굳이 한미동맹의 파기를 선언하여 분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

DJ가 한미동맹 파기를 선언했다는 말을 들은 바도 없고, 북핵문제에 이견의 존재가 한미동맹의 파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동맹관계라는 것은 "모 아니면 도"식의 이분법적 관계가 아니다. 이라크 전쟁을 반대한 캐나다와 멕시코는 여전히 미국의 동맹국이다. 강하게 반대한 프랑스와 독일도 마찬가지다. 미국이 한국의 북해문제에 대한 해법을 달리한다고 해서 우리가 미국에게 동맹관계를 파기했다고 비난한 적이 있는가?

제3의 독자적 방식은 구체적 설명이 없어 이해하기 어렵다.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으니 검토해 볼 수도 없다. 사실 북핵문제는 남북과 미·중·일·러 등 여러나라와 관련된 일이다. 가장 절박한 이해당사자는 남북이지만 이 문제 해결의 키는 미국과 북한이 쥐고 있다. 한국은 북한이 가장 원하는 체제보장을 약속해줄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일은 북한에는 핵포기를 미국에는 타협안 수용을 설득해야 하는 것이다. 이 방법이 2에 해당하는지 3에 해당하는지 이기자의 시나리오 분류가 추상적이어서 알기 힘들다,

유일한 대안이라는 3을 살펴보자. 이기자는 부시행정부와 타협하여 북핵문제에 대처한다고 해서 북한에 대한 군사적 조처를 용인한다거나 심지어 전쟁으로 가는 길을 열어놓았다고 예단할 필요는 없다고 하지만 그 근거는 제시하지 않고 있다.

추가적 조치에 군사적 조치도 포함된다는 미국 관리의 설명에 의하면 이기자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나중에 미국에 군사적 조치를 검토하면 부시가 일방주의자이기 때문에 역시 협조해야하는가? 미국은 일전에 맞춤형 봉쇄라는 것을 언론에 흘렸다가 DJ가 강하게 반발하자 파월장관이 나서서 부인한 바가 있다. 부시가 일방주의자가 이기 때문에 우선 코드를 맞춰야 한다는 주장은 고려의 가치가 없다.

외교라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것이 최선이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우므로 할말 안 할말 적당히 골라하면서 타협을 하고 합의가 안 되는 부분은 공란으로 남겨두고 얼버무리기도 하는 것 아닌가? 반복하지만 노 대통령은 한미정상회담 직전에 "북핵문제는 결코 용납할 수 없지만 반드시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선에서 정리하고 나머지는 발표 없이 합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정도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냥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반드시'라는 수식어도 없이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라는 선에서 멈추었으면 이렇게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노 대통령은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무조건 북한이 하자는 대로 따라갈 수만은 없다"고 하면서 "미국이 듣기 싫은 소리나 하면 도움이 되겠느냐"고 하였다. 일견 맞는 말이다.

입장이 다른 상대와 문제를 해결하려면 상대가 하자는 대로 따라갈 수만은 없고, 듣기 싫은 소리만 할 수도 없다. 그런데 미국이 하자는 대로 따라 하는 것은 괜찮고, 북한이 듣기 싫은 소리를 하면 도움이 되는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북한이 일방적으로 잘못하고 있다면 모르되 지금은 북한이 주고받기 식의 협상을 미국은 자국의 일방적 요구의 관철을 주장하고 있는 상태가 아닌가?

노 대통령의 방미활동은 실용주의 외교가 아니라 상황논리에 의한 기회주의적 처신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대통령 자신은 국익을 위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하겠지만 국익에 대한 관점이 수시로 바뀐다면 자기합리화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보수세력이 대통령의 방미활동을 옹호하는 것은 원래 자신들의 입장에 의한 것으로 이해가 가지만, 그의 (일부)지지자들이 옹호하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노 대통령의 약속처럼 "북핵문제는 반드시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합의했으면 한반도에서 전쟁가능성을 방지했다며 엄청난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고 칭찬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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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전반에 경제학을 전공하고 잠시 직장생활을 하다 미국에 가서 도시경제학을 공부하고 귀국해서 인천시 출연연구기관인 인천발전연구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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