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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에서 낭만적으로 꿈꾸던 ‘나만의 정원’이 뉴질랜드로 이민오면서 나의 현실이 되었을 때, 나는 정원을 가꾸는 일이 즐거움과 기쁨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곧 깨달아야만 했다.

우리 집 정원은 그리 넓은 편이 아닌데도, 정기적으로 잔디를 깎아주고, 잡초를 뽑아주고, 꽃나무들을 돌보고, 웃자란 나뭇가지들을 쳐주고, 야채를 심은 정원 한구석의 텃밭을 가꾸는 일은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고 신경도 많이 쓰이는 일이라는 사실을 오래지 않아 나는 알아차린 것이다.

그렇다고 정원을 방치해 놓거나 대충 가꾸는 시늉만 할 수도 없는데, 왜냐하면 정원을 단정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것을 집주인으로서의 자부심이요, 시민 된 의무로까지 여기는 이곳 키위들에게 자칫 자기 정원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게으른 아시아인으로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정원 일은 즐거움과 기쁨을 주는 일이라기보다는 많은 시간을 쏟아 부어야 하는 힘든 노동으로, 남의 눈을 의식해서 마지못해 하는 의무쯤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2.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정원 일의 즐거움>을 읽게 된 것은 이처럼 현실 속에서 무너진 나의 꿈을 어쩌면 그의 글을 통해서 회복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정원 일을 하면서 그가 즐거움을 느꼈다면 왜 나라고 즐거움을 못 느끼겠는가. 그 비밀을 엿보고 싶어서 나는 <정원 일의 즐거움>을 펼쳤다. 하지만 헤세도 정원 일이 마냥 즐겁기만 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젊은 시절에 살았던 집에서의 정원 일을 회상하는 글에서, 그것이 "마치 노예노동처럼 힘든 일"이었으며, "일이 점점 많아지더니 급기야 의무가 되어 버리자 즐거움은 사라져 버렸다…"고 고백하고 있으니 말이다.

헤세가 잃어버린 정원 일의 즐거움을 다시 회복한 것은 그의 생애의 마지막 보금자리였던 스위스의 몬타뇰라에서 온전히 자신만의 정원을 가꾸기 시작하면서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나이 오십이 넘어 다시 정원 삽과 물뿌리개를 들면서 그는 "열심히 일하기보다는 한가롭게 즐길 것이며, 수풀을 개간하고 곡식을 재배하기보다는 가을의 타는 장작불의 푸른 연기 곁에서 꿈꿀 것이다"라고 다짐한다. 그리고 그 다짐을 실천한다.

그는 화가처럼 정원의 꽃들과 나무들을 오래 들여다보고 정원에서 바라다 보이는 풍경들을 고즈넉이 즐겼다.

이 책의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소박하지만 공들여 그린 그의 그림들이 바로 그 산물들이다. 또한 그가 정원에서 수확한 것은 곡식과 채소와 과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흙과 나무와 꽃과 바람과 물이 어울려 만드는 생명의 비밀을 지켜보면서 그는 인생의 진리를 발견하고 그 진리의 씨앗들을 오랫동안 그의 내부에서 키워내 마침내 아름다운 시들과 소설들과 산문들로 세상에 내놓았다.

결국 그가 가꾼 정원은 그의 내면에 있었으며, 정원 일이 그에게 더 없는 즐거움과 기쁨이 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헤세는 말한다. "산과 강, 나무와 잎사귀, 뿌리와 꽃, 이 모든 자연의 형상은 우리 안에 그 원형이 내재되어 있다"고. "외부 세계가 몰락하더라도,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다시 그 세계를 일으켜 세울 것이다"라고.

즉, 그에게 있어서 정원을 가꾸는 일이란 바로 자연 속에서 자신의 내면 세계를 발견하는 일과 동의어였으며, 글을 쓰는 일이란 그 내면 세계에서 발견한 진리로 전쟁과 산업과 재물로 황폐해지고 훼손된 외부 세계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시도였던 셈이다.

헤르만 헤세의 <정원 일의 즐거움>은 정원에서 쓰는 작은 모종삽이 어떻게 황폐해진 우리 마음의 밭을 갈아주는 영혼의 쟁기가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희망의 책이다.

3.

그렇다면, 화단에 피어난 꽃에서 단지 그 아름다움만을 보지 않고, 울창한 아름드리 나무에서 단지 그 서늘한 그늘만을 탐하지 않을 때, 정원은 내 마음속에 들어설 것이다. 텃밭에서 막 익어 가는 붉은 색이 약간 감도는 딸기를 검은지빠귀들이 쪼아먹는 것에 관대해지고, 푸르른 잔디밭에 가끔씩 피어나는 민들레와 데이지 꽃에도 물을 주는 여유가 생길 때, 정원은 내 마음속에 들어설 것이다. 그때에야 정원 일은 온전한 즐거움과 기쁨으로 다가올 것이다.

헤세는 또한 말한다. "고향이란 여기 혹은 저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고향은 너의 내면에 있든가 아니면 어디에도 없다"고. 조국 독일을 등지고 타지에서 오랜 망명생활을 하였던 그에게 고향은 늘 그리운 곳이었을 텐데, 그 고향을 그는 그의 정원에서 발견한 것이다.

헤세처럼 어쩔 수 없어서 조국을 떠난 것은 아니지만 오래 몸담고 살던 조국을 떠나 낯선 땅 뉴질랜드로 이민 와서 살고 있는 나도 가끔씩은 두고 온 땅에 대한 그리움이 울컥 치솟는 때가 있다.

그렇다면 나에게도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의 그리 넓지 않은 정원이 고향이 될 수 있을까? 대답을 하기 전에 나는 먼저 물어보아야 한다. 나의 정원에는 무엇이 자라고 있는가, 라고. 나의 정원에서 자라고 있는 것이 한낱 꽃과 나무와 풀과 잔디에 불과하다면, 고향은 아직 멀리 있을 터이다. 아쉽게도 나의 정원에서 고향은 아직 멀어 보인다.

나의 정원에서 생명과 함께 사상이 자라고 과실(果實)과 함께 진리가 열릴 때까지, 그리하여 즐거움과 기쁨으로 고향을 느낄 수 있을 때까지 나의 정원 일이 계속될 수 있기를, 헤세여, 빌어다오!

헤르만 헤세의 정원 일의 즐거움

헤르만 헤세 지음, 두행숙 옮김, 이레(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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