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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녘에 생긴 일> 포스터
<황혼녘에 생긴 일> 포스터 ⓒ 실험극장
브레히트 이후 독일어권을 대표하는 극작가로 인정받는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황혼녘에 생긴 일>이 극단 실험극장에 의해 학전블루 소극장에서 공연 중이다.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의 작품을 써 온 뒤렌마트의 이 작품은 22명의 사람을 살해한 연쇄살인범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유명한 소설가 코르베스였고, 이를 알고 돈을 뜯어내기 위해 소설가를 찾아온 탐정이 23번째 희생자가 된다는 줄거리이다.

이 작품은 민간 극단 중 최고의 역사를 자랑하는 '실험극장'에서 제작하고, 이 극단 대표인 이한승씨가 주인공 코르베스역을 맡아 열연한다. 지난 2000년 실험극장의 대표가 된 이후 3년만에 오르는 무대이다. 특히 각본상 대머리인 소설가 코르베스의 설정대로 실제 머리카락을 잘라 대머리로 연기하는 깊은 열정을 보이고 있다.

'실험극장'의 개성파 연기자 중 한명인 이한승씨는 <화가 이중섭>으로 동아연극상을 수상한바 있으며 <동천홍>, <심판> 등 70여편의 연극과 <용의 눈물>, <한명회>, <왕과비> 등 250편의 TV드라마에 출연한 중견배우이다.

첫 공연이 있던 지난 5월 14일, 이한승씨와 만나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어떻게 해서 연극을 시작하게 됐는가.
강원도 강릉이 고향인데 어렸을 때부터 꿈이 연극배우였어요. 처음에는 신문기자를 하고 싶었는데 이후에 연극배우로 바뀌었지요. 그러다가 1967년 국립극장에서 '실험극장'이 <우리읍내(Our Town)>를 공연하는 것을 본 후 그 극단에 들어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어요. 실제로 군대를 다녀와서 학교고 뭐고 다 팽개치고 '실험극장'에 들어온 겁니다. 그때부터 다른데 한 눈 안 팔고 실험맨으로 오늘날까지 살고 있습니다. 물론 어려울때도 있었지요. 2000년에 극단을 다시 한번 일으켜 보고자 하는 일념으로 단원 총회를 거쳐 대표를 맡게 됐어요. 물론 연기자로서도 <심판>, <동천홍>, <관리인>, <이중섭> 등 개성 있는 역할을 많이 했지요. 오늘 어떻게 보셨는지 모르지만 오랜만에 달려들어서 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한승 대표
이한승 대표 ⓒ 한상언
오랜만에 무대에 서는 기분이 남다를텐데...
직업이 배우니까 그렇지는 않아요. 저도 실험극장에서 개성있는 역을 담당했던 라인업에 올라있는 배우 중 한사람이니까요. <이중섭>으로 동아연극상에서 남자 연기상을 받은 적도 있지요. 2000년부터는 단원들 뒷바라지만 쭉 해오면서 고생을 많이 시켰어요. 이번 작품은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출연을 결정했던 겁니다. 머리도 대머리로 깎았는데 사실 이렇게 깎는다는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방송일도 하는데, 만사 제치고 몇 달을 포기한 만큼이나 애착이 가는 작품입니다.

작품 내용과 이번에 맡은 역할에 대해
이 작품뿐만 아니라 뒤렌마트의 모든 작품들이 그로테스크한 편입니다. 비극속의 희극을 희화하는 작품이 대부분이지요. <메테오>, <로빈의 밤>, <물리학자들> 이런 작품들의 분위기가 거의 비슷해요. 이 작품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가 22번의 살인 사건에 연루됐으면서도, 아주 태연하게 이야기하고 탐정을 희롱하면서 그 탐정을 23번째 희생자로 삼는다는 아주 충격적인 내용인데요, 반면 관객들은 대사를 음미하면서 감상 할 수 있는 아주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특히, 제가 맡은 '코르베스'는 뒤렌마트가 문화, 문명의 가벼움에 대해 힐문하고 통렬히 역설적으로 비판하기 위해 만든 역할입니다. 실제로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가 사람을 22명이나 죽인 것을 소설로 쓴 역사는 없지만요. 그러나 뒤렌마트는 '코르베스'를 통해 관객들에게 묻고 있는 것이죠. '너희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고, 너희들은 문학을 어떻게 생각하고, 문학을 대하는 자세나 어떤 모습이 어떠한가?'라며 신랄한 비판을 서슴치 않습니다. 저는 이 런 작품은 실험극장이라면 한번은 해야 할 것 같았어요. <금의환향>처럼 사람 냄새 나는 작품과 동시에 이 작품처럼 어떻게 보면 관객 동원이 안 될 것 같은 작품도 무대 위에서 열심히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니인터뷰 I


호퍼역의 이영석씨

탐정이기도 하면서 스토커 같기도 하다. 호퍼라는 인물에 대해서 설명해 달라.
"호퍼역은 뭔가 한쪽에 좀 구겨지고 비뚤어지게 세상을 바라보는 역이다. 작가에게 돈을 요구하는 과정에 11년 동안 그 사람을 쫓아다녔다. 그 사람이 쓴 작품이나 그 사람의 사생활까지 일일이 노트하고 체계적으로 분석해서 집요하게 11년동안 쫓아다녔다가 끝내는 아내가 죽었다. 결국 목적은 돈을 뜯는 것이다. 가면을 쓴 인간의 속물근성을 보여주는 역이다."

연극의 언어가 텔레비전이나 영화의 언어와 다른 연극적 언어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야기 해달라.
제가 연극을 하면서 가장 일상적인 언어를 어떻게 연극 언어화 시킬까가 고민을 많이한다. 이 작품은 거기에 중점을 두었다. 저희들이 화법에 대해서 60년대 화술이 있고 70년대, 80년대, 90년대, 2000년대 화술이 있다. 극장에서 듣는 관객들이 일상적인 언어를 가장 편안하게 들을 수 있도록 신경을 많이 썼다." / 한상언
이 작품은 관객과 세상을 조롱하는 듯한 느낌이다.
이 작품을 하면서 한편으로 통쾌감을 느껴요. 사실 실험극장 대표로 3년동안 10편 이상을 제작하고 기획했지만 대학로의 가벼운 풍조 즉, 미래를 짊어지고 갈 젊은이들이 가벼운 것만을 추구하고자 할 때면 마음이 상할 때가 많습니다. 뒤렌마트 역시 50년대에 운명 비판, 현실 비판을 하면서 가벼운 성향에 대해 농담조이지만 무대에서 격렬한 비판을 서슴치 않았지요. 그런 면에서 요즘 젊은이들이 와서 보면, 또 다른 시각의 진한 느낌과 감동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2년 전부터 대학로에서 극단 실험극장만이 이런 류의 작품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기획했던 작품입니다. 정말 '배우의 기술'이 필요한 작품이지요. 배우들의 섬세함과 대사 구사력이 좋아야 하고, 대사 자체가 장단 고조와 사이 사이 포즈에 대한 정확한 개념 정립이 요구되는 예민함이 묻어 있습니다. 때문에 대학로에서 이 정도의 흡수력을 가진 극단을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연습도 정말 많이 했어요. 오늘 첫 공연 분위기가 좋아서 마냥 기쁘네요.

소극장 연극이 침체기이고, 대표 주자인 실험극장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연극이라는 장르의 전반적인 침체기인 듯 합니다. 21세기 접어들면서 볼거리와 즐길 것들이 늘어나긴 했지만 연극은 지정된 공간과 장소와 시간의 제약이 있잖아요. 이것이 현대인들에게 부담감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해요. 또 다른 이유는 사회, 경제적인 영향도 무시할 수 없고요. 경제적으로 안정되면 중산층들이 공연장을 찾으면서 자연스레 정신 문화에 대한 깊숙한 이해를 갖게 되는데 지금은 굉장한 격변기에 살고 있는 것 같아요.

미니인터뷰 II


연출 손규홍씨

관객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는?
이 작품에서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뒤렌마트의 작품에는 항상 나오는 것인데 정의로운 사람이 뭔가 불의에 대항하여 헤쳐나가는 과정을 통해 역설에 빠져서 어이없어진다. 우리 작품속서는 실족사로 처리가 됐는데 그런 것들이 세상이 불합리해 그것을 헤쳐나가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세상의 벽을 넘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으로서 돌아가는 것이다.

희대의 살인자가 노벨상 수상자인데 이것은 뒤렌마트가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것과 관련 있을 것 같다.
뒤렌마트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안받았다 이전에 사회의 불합리한 모습을 자기가 작가이기 때문에 작가의 시선에서 바라본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황혼녘에 뭔가 일어나긴 했다. 진실이 죽은 것인가?
뒤렌마트가 '자기가 쓴 작품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유형화시키지 말라'는 말을 했다. 그 부분은 관객의 몫이다. 정의가 죽었는지 진실이 죽었는지 또 다른 뭔가가 만들어졌는지 그건 보시는 분들이 판단하는 부분이다. 대부분의 분들이 공통적으로 생기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뒤렌마트가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 한상언
60∼70년대 대학생들의 최고 문화는 단연 연극감상이었어요. 그러면서 실험극장이 앞장서서 좋은 공연으로 관객들의 엄청난 격찬을 받았지요. 80년대에서 90년대로 접어들면서 주변 여건이 바뀌었고, 90년대 김동훈 전대표가 23년이나 실험극장을 이끌어 오시다 돌아가신 일도 있었지요. 운현궁 안에 있던 운니동 소극장이 폐쇄되면서 새로운 소극장 마련을 위한 노력들도 한창인 적도 있었고요. 그러나 그 일련의 과정들이 성공하지 못하면서 1990년대 말이 침체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2000년 젊은 동지들과 함께 힘을 합쳐서 재창단의 각오로 실험극장을 다시 키우고자 마음 먹고 2000년부터 지금까지 열심히 달려왔지요. 지난 2월에 <금의환향>을 문예회관대극장에서 공연했고, 9월에는 같은 곳에서 <서산에 해지면 달떠온다>라는 마포나루 토박이 민초들의 삶을 그린 작품을 할 계획입니다. 또한 11월에는 피터 셰퍼의 <고골의 선물>을 동숭홀에서 공연 할 예정이지요. 대한민국에 일년에 4편 5편을 하는 극단은 흔치 않을 겁니다. 대극장 공연을 세 편씩 하는 경우는 더욱 찾아보기 힘들지요. 실험극장 대표인 저와 우리 단원들이 모두 힘을 합쳐 2000년 이후에는 아주 활발하게 공연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추후 극단 창단 45주년을 맞아 극장을 하나 더 만들려고 추진중입니다. 1990년대가 조금 침체기였긴 하지만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엄청난 발전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직 이 작품을 보지 못한 관객들에게 한마디
오랜만에 가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분주하고 마음껏 개성이 발산되는 21세기에 살지만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한 사상, 의식과 일상의 고뇌 이런 것은 분명히 있잖아요. 그것을 요즘 사람들이 익숙하지 않게 생각하고 있지만 이번 기회에 이 연극을 보신다면 자기 삶과 인생에 대해 한번 더 음미해볼 시간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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