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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겉장입니다
책겉장입니다 ⓒ 보리
제가 좋아하는 시모음 가운데 <58년 개띠>(서정홍 지음, 보리(1995)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처음에 아주 자그마한 책으로 나왔습니다. 시모음은 좀 작게 나오는 편이지만 이 책은 여느 시모음보다도 자그마한 책으로 나왔어요. 뒷주머니에도 잘 쑤셔넣으면 들어갈 만한 크기로 말이죠.

<못난이 철학 1>

우리 집 밥상에
김치가 짜면
배추값이 올랐거나
살림살이 쪼들리는 줄 안다.

배추가 헐값인데
김치 짠 식당에 가면
주인이 돈벌이에 눈이 멀었거나
손님 우습게 보는 줄 안다.


목소리가 참 낮습니다. 보는 눈길도 참 낮아요. 아니 낮다기보다 우리들 보통으로 살아가는 바로 그 목소리요, 그 눈길입니다. 그래서인지 참 따뜻하고 아늑합니다. 억지로 꾸미지 않는 시를 읽으니 시를 읽는 제 마음도 차분하면서 있는 그대로로 즐길 수 있습니다.

이런 공장 노동자도 시를 쓰는데, 나라고 못 쓸 일 있겠느냐 하는 우스꽝스러운 마음도 생기고요. 음. 공장 노동자라고 시를 쓰지 말란 법 없고, 공장 노동자라고 시를 못 쓴다는 법도 없어요. 그런데 뭐냐고요?

그건 바로 빛입니다. 조그마한 꿈이에요. 하루하루 지치고 고되는 일을 하며 몸 가누기에도 바쁜 사람조차 조그마한 틈을 내서 자신이 살아가는 삶을 어렵지도 않고 꾸미지도 않으면서 쉬운 말로 담아냅니다. 그런데 그런 시가 참 좋아요. 살뜰해요.

그래서 저도 힘을 얻습니다. 글이란, 시란 멋부리기로, 말재주로 쓰는 글도 시도 아니라고요. 자기 마음으로, 온몸으로 우리 삶을 부대끼는 가운데 시나브로 느낌이 나오고 자연스럽게 볼펜이 쥐어진다고요.

<나도 도둑놈>

나보다 가난한 친구에게
술 한 잔 얻어 마시고 돌아서면
도둑놈 같다.
내가.


그렇잖아요. 어떤가요? 아닌가요? 맞지요? 나보다 가난한 동무와 술 한 잔을 하면 내 돈을 내야죠. 어떻게 그 동무에게 돈을 내라 하나요. 하지만 나보다 돈 많고 잘 버는 동무와 술을 마시면 괜히 술값 내기가 싫어집니다. 돈 잘 버는 그 동무보고 내라는 마음이 모락모락 피어나요.

<아들에게 3>

아들아
동전 주고 버스 타지 말아라.
차표 팔아
남는 이익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어떻게 사는지
생각해 보아라.


이젠 조금씩 옛날 일이 되어가는 차표입니다. 버스카드 돈 채우는 가게를 열어 먹고사는 사람들도 `신용카드' 등쌀에 살아남기 힘듭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잃어가고 있어요. 우리가 어떻게 살았고 우리 이웃은 어떻게 사는지를요.

버스표를 팔며 살아가던 사람이 교통카드 돈 채우는 일로 끼니를 잇고, 다시 로또복권 파는 일로 겨우겨우 목숨줄을 이어간다는 일을 쉽게 잊습니다. 그저, 내가 산 로또복권 뽑혀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으로 생각하지요.


<2>

<차이 1>

한 달 일을 하면
한 달을 먹고살 수 있는
우리는

한 달만 벌면
십 년, 백 년을
먹고살 수 있는
사장님과
똑같이
하루 세 끼를 먹고
뒷간으로 간다.


흔히 말하길 `돈'이란 "있으면 좋은 것"이랍니다. 하지만 이 말이 맞는지 틀린지 모르겠어요. 시간이 갈수록 돈은 "없으면 안될 것"이라는 느낌이에요. "없으면 무시당하는 것"이라는 느낌이고요. "있으면 우쭐하고 남 위에 올라서는 것"이 돈이 되어가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돈이 많건 적건 하루 세 끼 먹고 뒷간 가서 똥오줌 누며 사는 우리들이에요. 돈이 많건 적건 모두 같은 사람이며, 모두 소중한 사람이거든요. 파업을 하는 노동자도, 땀흘려 일하는 노동자도, 전교조 회원인 교사도, 교총 회원인 교사도, 아무 데도 몸 안 담은 교사도 모두 똑같은 교육자며 소중한 교육자입니다.

1998년에 처음 나온 책겉장입니다
1998년에 처음 나온 책겉장입니다 ⓒ 보리
국회의원도 재벌총수도, 밤 늦은 때부터 새벽까지 일하는 청소부도, <조선일보> 기자도 지역신문 기자도 똑같이 소중한 사람이겠죠. 한 달 벌이가 30만 원 가까스로 넘어도 한 달에 수십 억원을 받는 사람도 똑같이 소중한 사람이고요.

서정홍씨 시에서는 낮은 목소리, 아니 우리들 보통사람 목소리로 말하고 건네는 따스함과 살가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좋습니다. 그래서 반갑고 기쁩니다. 한동안 묻혀 있던 고운 책 하나를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즐겁습니다.

"밤늦도록 공장에서 일하고 돌아온 아내는 지쳐서 얼굴 씻기도 귀찮다며 그냥 자리에 눕는다"며 "지쳐 잠든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문득 삼십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 얼굴을 떠올리"는 서정홍씨 시가 좋습니다. "가난한 아버지를 닮아" 자신도 "가난하게 살고, 아이들도 나(서정홍)를 닮아 가난하게 살"며 시를 쓰고 일을 하며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하는 서정홍씨 시가 참 좋습니다.

<3>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시를 쓴 것은 아닙니다. 가난을 벗어나려면 돈을 벌어야지, 시를 써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으니까요.

나는 시를 쓰면서 돈보다 더 귀한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사람이 스스로 가난하게 살려는 마음이 없으면 남을 헐뜯고 속이며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고, `사람의 길'을 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시를 쓰는 까닭은 평등과 자유가 넘실거리는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가난하지 않고 아무도 부유하지 않으며, 모두가 가난하면서도 모두가 부유한 세상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서정홍씨는 새로 펴내는 <58년 개띠> 시모음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가난 때문에 돈을 벌려고 쓴 시가 아니라고, 소중한 값어치, 소중한 생각,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느끼고 부대끼고 생각하는 모든 마음과 이야기를 말하고자 시를 쓴다고 밝힙니다.

자그마한 글줄 하나로 세상을 밝힐 수 있는지 없는지 모릅니다. 밝히면 좋으나 밝히지 못해도 좋습니다. 낮고 작은 목소리로 아내에게, 또 아이들에게 즐거운 사랑과 삶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으면 좋으니까요.

다시 태어난 <58년 개띠>를 보다가 문득 안도현 시인이 떠오릅니다. 안도현 시인도 서정홍씨와 다름없이 `사랑과 평화와 자유'를 바라는 시인이지 싶습니다.

그러나 안도현씨는 시다운 시, 사람다운 사람이 살아가는 삶 속에서 즐기는 시보다는 돈과 이름을 골랐습니다. 스스로를 고꾸라뜨리는 길로 갔습니다.

돈도 좋고 이름도 좋습니다. 하지만 시를 쓰는 사람은 "돈과 이름 때문에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십만 사람이 읽든 백 사람이 읽든 가슴 하나에 삶과 생각과 일과 놀이가 모두 하나로 어우러지며 아름답게 부둥켜안고 어깨동무를 할 수 있는 시"를 써야지 싶어요.

안도현 시인을 보며 시인은 이렇게 스스로 시인으로서 목숨을 끊어도 좋은가... 하며 가슴 아프던 요즘, 동네 책방에서 새로 나온 <58년 개띠>라는 책을 다시 만났습니다. 다시 만나며 들뜨고 벅찬 마음을 글 몇 줄로 남겨 봅니다.

마지막으로 서정홍씨가 "시인에게" 보내는 시 하나를 옮겨 봅니다.(2003.5.29)

<시인에게 2>

이제는 시도 상품이다.
텔레비전 라디오 신문마다 떠들어야
돈이 된다, 시가 된다.

돈으로 풀칠을 해야
상품이 된다, 시가 된다.

시인은 상품을 만든다.
해는 있고 볕이 없는
달은 있고 빛이 없는
시는 있고 사랑이 없는

시인은 밤새 시를 다듬고 고치고
그러다 날이 새면 개가 된다.
자본가에게 꾸벅꾸벅 머리 조아리는

그래야만
상품이 된다, 돈이 된다.
시가 된다.



58년 개띠 - 고침판

서정홍 지음, 보리(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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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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