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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수명의 연장이다, 인구의 노령화다 하는 이야기들이 넘쳐나서일까? 노인복지에 대한 관심이 눈에 띠게 늘어난 가운데, 주위에서 노년 관련 사업에 전망이 있을 것 같다며 뛰어드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들의 장밋빛 사업 계획과 포부를 듣고 있노라면 정말 당장이라도 내 주위에 계신 어르신들의 삶이 확 바뀔 것 같은 환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예술·심리·운동치료를 포함한 노인 건강 증진 프로그램에서부터 실버 시터 파견업 그리고 실버 올림픽 개최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어르신들의 삶에 관심을 갖고 열정을 기울이고 있었나 싶을 정도이다. 같은 노인복지 분야이고 의미 있는 일이니 같이 해보자며 손을 내미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럴 때 내 마음을 정하는 기준은 너무도 간단하다. 노인을 사업의 대상으로만 보는 사람을 만나면, 나와는 가는 길이 다르다는 이야기로 마무리하곤 한다. 노년에 관심을 갖고 있고 노인복지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노인을 사업 대상으로만 보며 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늘 이렇게 이야기한다.
"노년 이야기는 왜 그렇게 쓸쓸하고 외로운가? 내가, 혹은 우리가 하는 사업은 그런 노년의 삶을 확 바꿔서 즐겁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럼 나는 되묻고 싶어진다.
영화관에 직접 가서 어르신이 나오는 영화를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가. 노년의 삶을 담은 소설이나 수필 아니면 만화라도 한 권 꼼꼼히 읽어본 적이 있는가. 노년의 삶이 왜 그리도 어둡고 힘들고 쓸쓸하고 외로운지 정말 몰라서 묻는가.
아무리 잘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사람일지라도, 인간의 운명이며 숙명인 나이듦과 죽음 앞에서 어찌 지나온 세월에 대한 회한이 없겠는가. 그 회한마저 그렇고 그런 불필요한 감정이라고 무시하려든다면 노년의 삶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태도일 수 없다.
물론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면을 보며 삶의 마지막 단계를 편안하고 아름답게 만들어가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자신들이 펼치는 사업만이 노년의 삶에 대한 완벽한 답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노년을 모르는 사람의 오만일 것이다.
소설〈외로운 노인〉의 주인공은 청년 빅토르와 '외로운 노인'인 빅토르의 큰아버지이다. 빅토르의 큰아버지는 젊은 시절 루트밀라를 사랑했지만, 루트밀라는 동생 히폴리트와 사랑하는 사이. 그러나 그 사랑 역시 이루어지지 않는다. 동생 히폴리트는 빅토르의 친어머니와 결혼해 빅토르를 낳지만, 세상을 떠나면서 첫사랑 루트밀라에게 빅토르를 맡긴다.
빅토르와 친딸 한나를 정성껏 기른 루트밀라. 빅토르는 그 사랑으로 잘 자라서 아름다운 청년이 된다. 공부를 다 마치고 관공서에 취직이 되어 출근을 앞두고 있는 빅토르는, 큰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큰아버지가 살고 계신 섬을 찾게 된다.
섬에서 그 누구도 믿지 못하고 꽉 닫힌 마음으로 살아가는 큰아버지와 빅토르는 처음부터 맞지 않는다. 활기차고 건강한 젊은이와 홀로 외롭게 시들어 가는 고집스런 노인의 모습이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며 흥미롭게 펼쳐진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두 사람은 아주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고 비로소 서로를 진지하게 바라보게 된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수양어머니 손에서 자란 빅토르, 아무리 행복하게 자랐다 해도 마음 깊은 곳에 남모르는 외로움과 슬픔을 간직하고 있다. 다만 젊음의 눈부신 생명력이 그것을 감싸안고 있을 뿐이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상처를 안고 평생 독신으로 살아온 큰아버지, 재산은 넉넉하지만 혼자 살아가는 외로움과 쓸쓸함, 인생에 대한 후회를 고집과 퉁명스러움 속에 꽁꽁 감춘 채 살아간다.
서로 못마땅해하고 어깃장을 놓는 가운데 조금씩 가까워지는 두 사람. 그러나 어느 덧 섬을 떠나야 할 시간이 온다. 큰아버지는 빅토르의 재산을 잘 관리해 왔다는 것을 밝히며, 하나 밖에 없는 조카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자녀 없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무의미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큰아버지는 빅토르에게 결혼을 권유하고, 두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작별한다.
빅토르의 큰아버지는 이루지 못한 사랑의 상처 때문에 스스로를 고독이라는 섬에 가두어 놓은 사람이었다. 외롭고 쓸쓸할 수밖에 없었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고갯길에 올라서 있는 빅토르는 그 깊은 고독을 알 수 없다. 노년의 고독은 젊은 빅토르의 고독과는 다른 색깔, 다른 울림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한낱 모래알 밖에 없으며, 젊음은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수확기의 들판과 다름없다'는 큰아버지의 고백을 빅토르는 이해하기보다는 직감으로 느낀다. 그렇다. 작가의 말처럼 어떤 힘도 세월을 처음으로 다시 돌려 놓을 수는 없는 법, 하물며 우리가 아직 가보지도 않은 길을 어찌 다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저 느낄 뿐이다.
누구는 어떻게 그렇게 빨리 전망 있는 분야를 택해 공부하고 일하게 됐느냐고 묻고, 또 누구는 앞으로 잘 나가겠다며 부러워하기도 한다. 그 마음만으로 일했다면 13년을 걸어올 수 있었을까. 누구나 가까운 슈퍼마켓에 갈 때는 슬리퍼를 끌고 가지만, 먼길을 가야 할 때는 운동화를 찾아 신고 단단히 끈을 맨다. 노년을 알고 남은 인생을 사는 일은 바로 운동화를 신고 길을 나서는 것과 같다.
전망이 있을 것 같아서, 앞으로 분명히 뜨게 될 분야여서 노년 관련 사업에 달려든 사람들이 지금이라도 노년의 삶을 좀 진지하게 들여다봤으면 좋겠다. 어르신들을 직접 대하면서 느끼고 알게 되면 더 좋겠고, 아니면 영화나 책에서라도 노년을 가슴으로 만나게 된다면 왜 노인 이야기는 언제나 쓸쓸하고 외로운지 그렇게 가볍게 묻진 않을 것이다.
(외로운 노인 Der Hagestolz / 아달베르트 슈티프터 지음, 권영경 옮김 / 열림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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