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문제를 둘러싼 북-미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부시 행정부가 한반도 안팎에 대규모 전력증강 계획을 추진하고 있어 그 배경과 의도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특히 미국측의 이러한 움직임은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은 외교의 실패를 운운하면서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 가능성을 공공연히 거론하고 있고, 한미정상회담에서 '추가적 조치'와 미일정상회담에서 '더 강경한 조치'를 합의한 직후에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유심히 지켜볼 필요가 있다.
한국 국방부가 5월 31일 배포한 보도자료에 따르면, 지난 29일 조영길 국방장관과 리언 J. 라포트 주한미군사령관은 앞으로 3년에 걸쳐 110억달러 이상을 투입해 주한미군 전력을 대폭 강화하기로 했다.
이와 관련해 <연합뉴스>는 한국측에서는 최근 한반도 정세와 국내의 반미·반전 기류를 고려해 비공개로 추진할 것을 요구했으나, 미국측이 공개 발표를 원해 31일 발표하게 됐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이번에 발표된 전력증강 계획에는 중단거리 탄도미사일 요격체제인 패트리어트 최신형 PAC-3, 한반도 유사시 신속대응이 가능한 스트라이커 신속배치여단(Stryker Brigade Combat Team : SBCT), 감시·정찰수집능력 강화, 전쟁예비물자(WRSA) 및 정밀탄약 증대, 최신예 공격헬기 AH-64D 아파치 롱보우 배치 등이 포함되어 있다.
한미 군당국의 합의하에 추진되고 있는 이러한 전력증강 계획은 지난 한미정상회담에서 주한미군 재배치를 신중하게 추진하기로 합의한 것과는 달리, 미국측의 시간표와 계획에 따라 주한미군 전력이 재조정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한미정상회담에서 전방배치 2사단의 후방이동을 신중하게 추진하기로 한 것을 큰 성과라고 강조해왔으나, 도날드 럼스펠드 국방장관과 리처드 마이어스 합참의장 등 미군 수뇌부는 "중요한 것은 병력수가 아니라 전투력"이라며, 예정대로 주한미군 재배치를 조속히 추진할 것임을 거듭 확인한 바 있다.
특히 올 여름에 한반도에 배치될 것으로 보이는 신속배치여단의 경우, 병력수는 2사단의 5분의 1에 지나지 않으나 전투력은 비슷한 것으로 알려져, 2사단의 임무를 상당 부분 대체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미 국방부는 2사단을 오산·평택 등 한강 이남으로 이동시키되 일부 병력은 철수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의 작전 환경에서 전방배치된 2사단과 해상 기지를 사용하는 신속배치여단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2사단은 북한의 야포 사정거리 안에 노출된 반면에, 신속배치여단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이 계획대로 주한미군을 재배치하면 유사시 피해는 줄일 수 있는 반면에, 공격 능력은 강화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월포위츠, "경제적 압박이 최선책"
부시 행정부가 대대적인 전력증강 계획과 함께 밝힌 것은 북한에 대한 경제적 압박의 필요성이다.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 안보포럼에 참석한 폴 월포위츠 국방부 부장관은 북한 핵문제에 대한 단기적인 해법은 없다며, 경제적으로 붕괴 일보 직전에 있는 북한을 미국과 아시아 국가들이 함께 경제적으로 압박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밝혔다.
월포위츠는 또한 단기적으로 북한에 대한 무력 사용이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점도 밝혔다. 이에 따라 미국의 대북한 전략은 북한과의 비타협주의를 고수하되 경제제재와 해상봉쇄, 그리고 한반도 안팎의 무력증강을 통한 북한 압박에 맞춰질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94년 위기 당시와 흡사한 것으로써, 당시 미국은 유엔 안보리를 통한 대북한 경제제재 통과를 추진하면서 한반도에 대규모 전력증강 계획을 세운 바 있다. 이에 맞서 북한측은 "제재는 곧 전쟁"이라며, 미 증원군이 한반도에 도착하기 전에 주한미군을 공격하겠다는 의사를 판문점 미군 대표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94년 당시 이러한 일촉즉발의 위기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계기로 해소되었으나, 9년이 지난 지금 그 당시와 대단히 흡사한, 그러나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위기 상황이 다시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주한미군이 공개적으로 PAC-3를 한반도에 배치하겠다고 밝힌 것 역시 94년의 상황과 비교해서 볼 필요가 있다. 93년 말 타결 일보직전까지 갔던 북미 협상이 김영삼 정부의 '딴지걸기'로 수포로 돌아가면서,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에 대한 공격 계획을 세우고 우선적으로 북한의 스커드미사일에 대응한 패트리어트 미사일 반입을 강행했다. 이를 자신에 대한 공격 임박 신호로 해석한 북한 지도부는 전군에 비상대기를 하달하고 사실상의 전시체제로 돌입한 바 있다.
당시 남한에 배치되었던 패트리어트가 보잘 것 없는 요격 성공율을 보인 무기였다면, 이번에 배치되는 PAC-3는 이전의 근접 폭발 방식에서 직접 충돌 방식으로 요격하는 'hit-to-kill'을 채택한 최신예 요격체제이다.
막강한 선제공격 능력과 함께 PAC-3까지 갖추게 되면, 미국은 북한의 탄도미사일을 상당 부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자신감을 갖게 되고, 반대로 북한은 강력한 전쟁 억제력 가운데 하나가 무력화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한반도 군사 위기 고조될 듯
이처럼 미국 주도의 경제적, 군사적 압박이 서서히 그 윤곽을 드러내면서 관심의 초점은 북한이 어떻게 대응하고 나올 것인가에 모아지고 있다. 북한은 한편으로는 핵무장 가능성까지 흘리면서 미국을 압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담한 제안"과 다자 회담 수용 의사를 밝히면서 미국을 설득하고자 하고 있다.
강온책 모두 기본적으로는 미국을 협상테이블로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지만, 미국은 이를 철저히 무시하면서 북한의 목을 서서히 죄어오고 있다.
북한이 미국의 압박에 굴복할 가능성도, 미국이 북한과의 진지한 협상에 나설 가능성도 극히 낮은 상태에서, 노무현 정부는 사실상 북한을 굴복시키는 전략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한미정상회담은 이러한 전략적인 전환의 신호탄이었고, 깐깐해 보였던 노무현 정부의 동의를 받아낸 부시 행정부는 치밀한 대북한 압박·고립 전략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이번 주한미군 전력증강 계획이 한미 군당국의 합의로 발표되었다는 것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예전에는 대개 미국 측에서 한국의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배치 계획을 통보하고 강행했었으나, 이번에는 사전에 한국의 국방장관의 합의하에 발표된 것이다. 부시 행정부는 노무현 정부의 동의를 쉽게 받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북한의 반발이 예전보다 강력할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부시 행정부의 의도에 촉각을 곤두세워온 북한은 한미정상회담에서 '추가적 조치'에 합의한 것을 자신에 대한 무력 사용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강력히 항의한 바 있다.
이를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이번에 한미 군당국의 합의로 주한미군 전력을 대대적으로 증강시키기로 한 것은 북한의 의구심을 더욱 키울 것이고, 남북관계에도 적지 않은 부작용을 야기하게 될 것이다.
월포위츠 국방부 부장관도 밝혔듯이 '당분간' 미국이 북한을 선제공격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한국과 일본 정부의 동의를 받아낸 부시 행정부는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와 해상봉쇄를 추진하면서, 한반도 안팎의 군사력도 증강시킴으로써 한편으로는 북한의 굴복을, 다른 한편으로는 최후의 수단으로 무력 사용 준비를 갖추어나갈 것이다.
특히 한미, 미일 정상회담에 이어 한일 정상회담에서도 북한 핵개발 저지 성명을 채택할 예정이어서, 6월 중순부터는 사실상 한-미-일 대북 압박구조가 완성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 과정에서 노무현 정부가 예상외로 쉽게 부시 행정부에게 코드를 맞춰줌으로써 부시 행정부의 대북 압박 전략은 탄력을 받게 된 것이다.
이러한 미국 주도의 압박에 북한이 어떻게 대응하고 나올지는 쉽게 가늠하기 힘들다. "선제공격할 권리는 미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면서, "제재를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고 여러 차례 경고해왔지만, 파멸을 가져올 선제 무력사용을 북한이 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미국 주도의 압박에 굴복할 가능성도 극히 낮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한반도는 점차 군사적 위기가 고조되는 방향으로 갈 것으로 보인다. 미국 주도의 본격적인 경제제재와 해상봉쇄 추진, 한반도 주변 군사력 증강 등 여러 가지 긴장 요인들이 가장 민감한 시기인 꽃게잡이철 6월달과 조우하고 있다는 것도 한반도의 불확실성을 높이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위기 상황이 94년과 마찬가지로 극적인 반전(反轉)으로 귀결된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는 것이 한반도가 처한 엄연한 현실이다.
아직 기대를 거두기는 이르지만, "전쟁을 막겠다"고 공언하면서 출범한 노무현 정부는 확고한 무게중심을 잡지 못하고 부시 행정부의 대북강경책에 편승함으로써 코드를 한반도 위기 고조의 한 요인을 제공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가 이래서는 안 된다. 북-미간의 긴장이 고조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큰 불안을 느끼지 않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노무현 정부가 쉽게 대북 경제제재나 무력 사용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약속이기도 했다.
이제 적지 않은 전문가들은 노무현 정부에게도 큰 불안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어려운 시대, 복잡한 정세에서 정부가 원칙을 잃고 쉽게 흔들릴 때, 국민들의 불안감은 더욱 커져갈 수밖에 없다. 노무현 정부가 더 늦기 전에 비판 여론에 귀기울여 초심으로 돌아갈 것을 간절히 호소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