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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제비와 칼국수는 다 같이 밀가루를 기본 재료로 하는 음식이란 점에서 같다. 그러나 정작 음식을 요리하는 과정에 들어가면 이 두 음식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수제비가 밀가루를 짓이긴 반죽을 쭉쭉 떼어서 끓는 물에 집어넣으면 되는 단순한 음식인 반면 칼국수는 밀대로 여러 번 민 다음 칼로 뚝뚝 썰어서 가지런한 면발을 만든 후 집어 넣는다. 비유하자면 수제비가 노가다와 흡사한 음식이라면 칼국수는 사무직 노동자에 해당한다고나 할까.

그것말고도 내가 생각하기에 이 두 음식의 차이는 또 있다. 칼국수가 맑은 날에 먹는 음식이라면 수제비는 비오는 날에 먹는 음식이라는 점이다. 어제 밤은 참 무료했었다. 그래서인지 날씨가 맑은 날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뜬금없이 수제비가 '땡기는' 것이었다. 아이들 말로 '별꼴이 반쪽'이었다. 나는 이 느닷없는 식욕의 반란을 잠 재우기 위하여 수제비를 끓이는 대신 이면우의 詩 <수제비 뜨는 남자>를 꺼내 읽는다.

나는 투박한 내 손이 좋다 그리고 꽉 움켜쥔 손가락 새로 재빨리 빠져달아나며 손바닥 여기저기 눌어붙는 밀가루반죽의 부드러움은 나를 한껏 설레게 한다 그렇다 육신과 일의 이 유용한 결합이, 삶과 유희가 밀가루와 물처럼 친숙해진 저녁 아아, 미장이를 할걸 그랬어 척척 처바르고 슥슥슥 문질러 세우는 지상의 집, 집들, 생각난다 해질녘 냇가 모래방 헌집 새집 다독거리며 이제저제 마음 졸이노라면 손-씻-고-저-녘-먹-어-라 미루나무 그림자 끄을고 뚝방을 넘어오던 목소리, 나는 괜스레 마음 바닥이 뜨거워져 물-안-끓-어 여편네에게 외쳐보는 것이었다. - 詩 이면우,<수제비 뜨는 남자> 전문

추측컨대, 직업이 보일러공인 시인이 수제비를 끓이는 '한가한 노동'의 기쁨을 구가하는 이 저녁은 아마도 비가 내리는 날 이었을 것이다. 그는 지금 아내를 도와 밀가루를 반죽하고 있는 중이다. 밀가루 반죽은 움켜진 손바닥 사이로 삐져 달아나기도 하는 가하면 어느 때는 손바닥에 눌어 붙기도 한다.

달아남과 눌러붙음은 우리들 삶의 중층(重層)에 퇴적된 모순의 단면이다. 단순 반복의 지겨움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찰거머리처럼 매달려 사는 단세포적인 모습이 오버랩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일상이라는 삶의 형식인 것이다. 밀가루 반죽은 그런 삶의 요체를 단도직입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할 것이다.

시인은 반죽을 하다 말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본다. 조심스럽게 쓰지 않고 '함부로 내둘러도' 좋을 만큼 투박한 손이다. 그는 그런 손의 투박함이 좋다,라고 긍정적인 쪽으로 감정을 몰아간다. 투박한 손 혹은 세련되지 못한 삶에 대한 그의 긍정이 깊은 공감을 자아낸다. 지난한 노동에 시달려본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거의 동지적 감수성으로 그의 투박한 손에 대한 연대(連帶)의 감정을 품는다.

때로 삶이 힘들 때는 그런 종류의 아전인수도 필요한 법이니까. 그는 삶과 유희가 밀가루와 물처럼 유용하게 결합된 이 밀가루 반죽에 친밀감을 느낀다. 까놓고 말해서 삶과 유희가 별개인 삶이란 얼마나 고단한 것인가. 그저 시인의 소박한 희망이 안쓰러울 뿐이다.

수제비 반죽을 하고 있는 틈 사이 그의 상념은 재빨리 어린 날의 소꼽장난 하던 모래밭으로 가 닿는다. 벌써 해질녘이다. 지금 쯤 '밥 먹어라'하고 어머니가 부르실 때가 되었는데... 이제나 부르실까, 저제나 부르실까. 드디어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손씻고 밥 먹어라."

아아,그립다. 어머니. 어머니가 끓여주던 수제비. 어머니는 왜 꼭 음식과 더불어 추억되는 분이신가. 금새라도 눈물이 맺힐 것 같아 그는 생각을 도리질하며 아내에게 외친다.

"물 안 끓어?"

앞서 말 했다시피 이면우 시인은 보일러공이다. 그는 사람이 사는 방을 덥히다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싶었던지 사람의 마음을 덥히는 일까지 넘보게 된 것이다. 그런 그가 그의 어머니처럼 식구들을 위해 수제비를 뜨는 저녁은 일부러 보일러를 덥히지 않아도 생은 저 혼자서 절로 따스해진다. 나도 오늘밤엔 그처럼 수제비를 뜨고 싶다. 수제비 한 그릇으로 달아오르는 삶의 온기를 느끼고 싶다. 그리고 소리 지르리라.

"이래도 삶이 안 끓는단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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