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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월포위츠 국방부 부장관과 리언 J 라포트 주한미군 사령관의 국방비 증액 요구 이후, 고건 총리와 조영길 국방장관이 잇따라 이에 화답하고 나서 논란이 일고 있다.
특히 조영길 국방장관은 6월 9일 국회 대정부 질의에 대한 답변에서 내년도 국방비를 GDP 대비 3.2% 안팎으로 올리는 것을 비롯해 점차적으로 GDP 대비 3.5%까지 늘리는 것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이와 같은 한미 정부 관계자들의 국방비 증액 발언은 용산 기지와 미 2사단의 후방 배치를 비롯한 주한미군 재배치, 한국의 미사일방어체제(MD) 참여 및 미국제 무기 도입, 방위비 분담금 증액, 자주국방 비전 등과 맞물려 현실화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그러나 이러한 대규모 국방비 증액 움직임은 몇 가지 점에서 중대한 문제점을 안고 있어, 전면적인 재검토가 시급해지고 있다. 우선 정부가 내세우는 국방비 증액 논리의 '통계상의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는 우리나라 국방비가 GDP 대비 2.7%에 불과해 3.8%인 세계평균에 크게 떨어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통상 정부가 말하는 '국방비'는 국방부 소관 예산으로만 한정돼 있어, 정부 재정상 '방위비'로 분류되는 경찰청 소관의 전투경찰비 및 해양경찰청의 해양경찰비과 병무청 소관의 병무행정비 등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국제 기준은 이러한 예산들을 포함하고 있고, 국제 기준에 따르면 한국의 방위비는 GDP 대비 3%를 상회하고 있다. 이중잣대로 여론을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의적인 통계 인용을 정부의 단순 실수로 볼 수 없는 이유는, 필자가 2001년 4월 초에 국방부 예산 담당자에게 이러한 문제를 지적한 바 있고, 그 관계자 역시 잘못을 시인한 바 있기 때문이다.
잘못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의적으로 통계를 왜곡해 국민들로 하여금 한국의 방위비가 대단히 낮은 것처럼 인식하게 만드는 잘못된 관행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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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구조개혁이 먼저다
두 번째 문제는 노무현 대통령이 말하는 국가 목표와 대규모 국방비 증액 사이에서 나타날 '불일치'의 문제이다. 노 대통령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계승·발전시켜 평화·번영을 이뤄 동북아 중심 국가가 되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또한 국가안보와 경제안보를 균형 발전시키는 '포괄 안보'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 목표와 새로운 안보 패러다임은 대규모 국방비 증액과 양립하기 어렵다. 한국이 미국 주도의 군비경쟁 구도에 빠져드는 상황에서 한반도 평화·번영을 이루고 동북아 중심 국가가 되겠다는 목표는 '말의 성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국방비 자체가 소모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점에서 경제발전과 국민복지에 사용될 예산을 잠식한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될 문제이다.
세 번째 문제는 정부가 군개혁 방안을 내놓지 않으면서 대규모 국방비 증액부터 추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적정 수준의 국방비 지출은 불가피한 일이지만, 국방비 증액에 앞서 군에 낭비성 요소는 없는지, 작고 강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 구조조정을 해야할 부분은 없는지, 새로운 안보 패러다임을 뒷받침하기 위한 군혁신 방안은 무엇인지에 대해 먼저 점검하고 개혁할 부분은 개혁하는 것이 순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개혁을 시대정신으로 내세우면서 출범한 노무현 정부는 유독 군개혁에 대해서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오히려 엄청난 국방비 증액 요구를 수용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는 군구조 개혁없이 돈으로 자주국방을 하겠다는 안일하고도 위험한 발상이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있다.
주한미군 재배치와 MD, 그리고 새로운 군비경쟁
국방비 증액 추진 배경과 이에 따른 결과가 가져올 가장 큰 문제점은 국방비 증액이 주로 미국의 필요에 따라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은 향후 3-4년에 걸쳐 약 110억달러를 투자해 주한미군의 전력을 증강시킬테니, "한국도 이에 상응한 투자를 해야 한다"며 노골적인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대규모 주한미군의 전력증강은 미국의 판단과 필요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지, 한국의 요구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대다수 한국인들이 미국에게 바라는 것은 하루 빨리 북한과 협상에 나서 핵문제 등 중요한 현안을 풀라는 것이지 대북한 선제공격까지 가능한 군사력 증강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처럼 미국의 최고위 군당국자가 공개적으로 국방비 증액을 요구한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한국의 전력증강 계획과 관련해 미국제 무기를 사달라는 유무형의 압력은 계속 있어왔지만, 주권국가의 고유 권한이라고 할 수 있는 예산과 관련해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국방비 증액을 요구하는 것은 노골적인 내정간섭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이것이 단순히 자존심 상하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미 관리들의 국방비 증액 압력은 핵문제를 둘러싼 북미간의 긴장 고조, 주한미군 재배치를 비롯한 한미동맹 재조정 등과 맞물려 있고, 더욱 중요한 점은 이것이 미국의 세계전략 차원에서 추진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군사 패권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미군 재배치를 비롯한 신군사전략을 추진하는데 소요되는 비용을 한국 측에 전가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2사단 후방 배치 및 일부 병력 철수에 따른 전방 배치 군사력 공백을 다연장 로켓, 대포병 레이더, 아파치 헬기 등 '미제' 무기로 충당해줄 것과, 부시 행정부가 사활을 걸고 있는 미사일방어체제(MD)의 한국 참여, 그리고 주한미군 재배치에 따른 기지이전비용의 한국 전가, 방위비 분담금에서 한국 부담의 증가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노무현 정부가 주한미군 재배치 등 한미동맹관계 재조정을 자주국방 역량 강화의 기회로 삼겠다며, 미국의 요구에 맞장구를 쳐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로 노무현 대통령은 군축 논의 자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인식을 피력하고 있다. 지금은 자주국방 역량을 강화해야할 때이지, 군축을 논할 단계가 아니라는 뜻이다.
주한미군 일부 감축 및 후방 배치 논의가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부시 행정부'의 의도에 대해서 분명 경계할 점들이 많다. 우선 예전의 주한미군 감축을 포함한 재배치는 탈냉전과 남북화해협력의 진전이 반영돼 추진된 반면에, 이번에는 남북, 북미관계가 악화되고 있는 시점에 강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특히 북한 핵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여전히 보이지 않은 상태에서, 전방배치 미군의 후방이동과 해공군력의 강화, 그리고 정밀타격 능력을 강화하겠다는 미국의 구상이 관철되면, 한반도의 군사력 균형은 더욱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미국 언론들이 대북한 선제공격 준비를 갖추기 위해 주한미군을 재배치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는 것을 그냥 흘려 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 중요한 점은 한반도 군비경쟁의 격화 가능성이다. 북미간, 남북간의 군사적 대결 상태가 획기적으로 완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 2사단이 후방으로 이동하고 일부는 철수한다면, 그 공백은 한국군이 메우려고 할 것이다. 이에 따라 남한은 다연장로켓(MLRS)과 아파치 헬기 등 미국제 무기를 구매해 대북억제력 강화에 나설 것이다.
또한 주요 미 군사력이 북한의 야포 사정거리 밖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북한의 야포 전력의 군사적 가치가 그 만큼 줄어들게 된다는 것이고, 이에 따라 북한은 후방 배치된 미군에 대한 억제력 확보 차원에서 스커드 등 미사일 전력 강화에 나설 것이다. 이렇게 되면 미국은 MD 무기체계의 배치 및 한국의 참여 압력을 더욱 높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한미군 재배치가 가져올 한반도 군비경쟁의 함정이다.
항구적인 종속의 길로
노무현 정부는 주한미군 재배치를 자주국방 역량을 제고할 수 있는 기회로 보고 있지만, 반대로 미국으로의 종속을 더욱 심화시킬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양국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한미동맹 재조정의 근본적인 방향은 대북억제력 차원에서는 한국군의 역할을 강화하는 반면에, 주한미군은 지역 안보 및 '테러와의 전쟁' 차원으로 그 기능을 확대시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군은 육군 비중을 줄이는 반면, 해공군력은 강화시키고, 한국군은 미육군의 공백을 메우는 것이 우선적인 임무가 될 수밖에 없다.
한미연합방위체제가 이러한 방향으로 가면, 무엇보다도 한국군의 기형적인 군사력 구조가 고착화될 우려가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한국군의 가장 큰 문제점은 육군은 대단히 비대한 반면에, 해공군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상태에 있다는 점이 지적되어왔다.
그러나 미국의 계획대로 주한미군이 재편될 경우 한국의 군구조 차원에서 육해공군의 균형발전이 어려워짐에 따라, 미국에의 의존성이 더욱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현재 구상중인 방향으로 한미동맹이 재조정되면, 대중국 억제 및 동북아 패권강화를 골자로 한 미국의 세계전략의 하위 도구로 한미동맹이 악용될 소지가 더욱 커진다는 점이다. 국가안보전략 보고서에서도 명확히 밝힌 것처럼, 부시 행정부의 핵심적인 외교안보전략은 중국이 미국과 대등해지기 전에 이를 좌절시키는 것이다.
이는 미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한미동맹이 재조정되면 현재는 물론이고 미래에도 협력의 필요성이 더욱 커질 중국과의 관계가 극히 불안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 정부는 "미래의 불확실한 위협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미국의 신군사전략에 맹목적으로 편승하고 있지만, 이는 미래의 불확실한 위협을 '확실한 위협'으로 만드는 극히 어리석은 악수(惡手)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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