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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과 송호경 조선아시아 태평양 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이 지난 2000년 4월 8일 중국 상하이에서 만나 남북정상회담에 합의한 뒤 악수하고 있다.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과 송호경 조선아시아 태평양 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이 지난 2000년 4월 8일 중국 상하이에서 만나 남북정상회담에 합의한 뒤 악수하고 있다.
우선, 전체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제 자랑' 하나.

남북정상회담이 알려진 것과는 달리 박지원-송호경 두 남북한 특사의 '세 번의 싱가포르 비밀접촉'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처음 보도한 것은 기자였다.

김대중 정부는 2000년 4월 10일 당시 '양박' 장관(박재규 통일부장관-박지원 문광부장관)의 기자회견을 통해 박지원 장관이 김 대통령의 대북특사 자격으로 북측 송호경 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이하 아태평화위) 부위원장과 중국 상하이와 베이징을 오가며 회담을 했고, 그 결과 4월 8일 베이징에서 두 사람이 "상부의 뜻을 받들어" 남북합의서에 서명함으로써 정상회담 개최에 최종 합의했다고 공식 발표했었다.

굳이 사족(蛇足)을 붙이자면, <오마이뉴스>의 5억 달러 대북송금 단독 보도는 '우연'이 아니라 이런 '내공'(?)이 쌓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모든 역사적 사건(사변)에는 이면(裏面)이 있었듯이 6·15 남북공동선언 뒤에도 무대에 드러나지 않은 '숨은 그림'들이 있었다. 북한측 관영매체들은 '6·15 사변'을 김정일 위원장이 '빈틈없이 설계'한 것으로 미화했지만, 두 정상이 합의문에 서명(수표)하기까지는 양측의 '비공개 접촉 라인'이 물밑작업을 한 흔적이 뚜렷했다.

즉 남북정상회담 개최가 최종 결정된 것은 박지원 장관과 송호경 부위원장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특사회담에서가 아니라, 국정원과 아태평화위가 세 차례에 걸쳐 접촉했던 비밀회담에서였기 때문이다.

이는 2000년 4월 7일 이전에 국정원과 아태평화위측이 물밑에서 진행한 비밀접촉에서 정상회담 개최를 합의했고, 나중에 공개된 남북 특사회담은 양측이 작성해 놓은 합의서를 박지원-송호경 두 사람이 서명하는 자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지원-송호경 2000년 3월 8∼9일 싱가포르에서 최초 접촉

최초로 남북한 양측이 정상회담 개최 문제를 가지고 극비회담을 가진 것은 3월 8∼9일 싱가포르에서였다. 김대중 대통령이 유럽 순방 중 '베를린 선언'을 발표한 그 시점에 싱가포르에서는 국정원-아태 관계자들이 정상회담 개최 문제를 논의하는 비밀접촉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세 번에 걸쳐 진행된 싱가포르 비밀접촉에는 당시 국정원의 김보현 대북전략국장(현 3차장), 서영교 단장(현 대북전략국장)과 아태의 송호경 부위원장, 황 철-권 민 참사 등이 참석한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3·9 싱가포르 남북 비밀회담의 지휘 사령탑은 당시 임동원 국정원장이었다.

남북 정상회담 이면의 '숨은 그림'이었던 국정원의 대북 'KS라인'(김보현-서영교 라인)은 그해 7월 1일 북한 및 남북관계를 총괄하는 3차장직 신설을 골자로 한 국정원 직제개편을 계기로 모습을 드러냈다. 김보현 국장과 서영교 단장은 이때 각각 대북3차장과 대북전략국장으로 승진해 현재까지 현직에 있다.

대북 접촉경험이 전무한 박지원 문화부장관이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비밀회담의 대표로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김보현 국장 같은 대북전략 전문가가 '수행원'으로 회담장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검찰에 출두하는 '국보급' 대북 전문가 6월 10일 오후 2시 서울 강남구 대치동 특검사무실로 자진출두하고 있는 김보현 국정원 3차장.
검찰에 출두하는 '국보급' 대북 전문가 6월 10일 오후 2시 서울 강남구 대치동 특검사무실로 자진출두하고 있는 김보현 국정원 3차장. ⓒ 오마이뉴스 유창재
실제로 김 국장을 포함한 국정원 대북전략팀은 회담에 임하는 박 장관에게 구체적인 지침과 회담전략을 제공해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래서 박 장관은 정상회담 후 몇몇 공개적인 자리에서 이 비밀접촉의 주역들을 "국보급"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다음은 당시 박지원 장관이 한 얘기다.

"베이징에서 회담 직전 북측이 이 얘기를 할 것이며, 이렇게 나올 것이라고 그분들이 미리 한 얘기가 회담장에서 순서도 안 틀리고 정확하게 맞았다. 그래서 나는 이분들이 혹시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 아니면 점쟁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분들의 분석은 가히 국보급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박지원을 특사로 낙점했다"

이처럼 북의 대남전략을 꿰뚫고 있는 '국보급' 전문가인 김보현(金保鉉·60) 차장이 6월 10일 오후 대북송금 특별검사팀에 소환되었다. 그가 한때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대북 비밀회담을 측근에서 보좌했던, 그래서 누구보다도 대북 협상과정을 잘 알고 있는 박지원 전 문광부장관의 '싱가포르 행적'을 조사받기 위해서다.

김보현 차장은 대북송금 사건의 진상을 실무적으로 가장 잘 꿰뚫고 있는 '전문가'이다. 그래서 특검은 이미 일찌감치 김보현 차장으로부터 '소명자료' 형식의 사실상의 서면조사를 한 바 있다.

김종훈 특검보는 "특검 관계자들이 박지원 전 장관을 사법처리 하기 위해 '면책'을 대가로 관련자들을 회유하고 있다"는 <오마이뉴스> 보도(6월 1일) 이후 "김보현씨를 조사한 적 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조사한 적 없다"며 "본인이 진술서 비슷한 것, 소명 자료를 보내온 적은 있다"고 답변한 바 있다.

특검이 김보현 차장을 소환한 것은 그때 남측의 박지원 특사가 북측의 송호경 특사에게 정상회담 개최를 둘러싼 비밀협상을 하면서 그에 대한 '대가'를 약속하지 않았냐는 증언을 듣기 위해서이다.

지금 특검은 당시 김보현 차장을 비롯한 국정원의 '국보급 전문가'들이 써준 협상지침대로 행동했던 '얼굴마담'에 불과했던 박지원 장관을 사법처리하기 위해서 협상지침을 써준 바로 그 '국보급 전문가'를 조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특검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박지원 장관을 대북 비밀협상의 대통령특사로 '낙점'한 것은 김대중 대통령이라는 사실이다.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이 지난 2000년 4월 10일 오전 정부종합청사 417호 통일부 회의실에서 남북정상회담 사실을 발표하고 있다.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이 지난 2000년 4월 10일 오전 정부종합청사 417호 통일부 회의실에서 남북정상회담 사실을 발표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3월 당시 국정원으로부터 "북측이 우리측의 정상회담 제안에 긍정적인 사인을 보내왔다"면서 "특사로 누구를 보내는 것이 좋겠냐"는 보고를 받자마자 입밖에 꺼낸 인물이 박지원 장관이었다.

당시로서는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첫 정부간 대화였기 때문에 접촉의 비밀을 유지해야 하기 위해서도 박재규 통일부장관은 처음부터 배제되었다. 김 대통령은 박지원 장관을 '낙점'하면서 덧붙인 말은 "박 장관이 사업(미국에서의 가발·무역업)을 오래 했기 때문에 협상능력도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현대의 정몽헌 회장을 연결고리로 이뤄진 박지원-정몽헌-송호경 회담에서 북한측이 7대 경협사업과 정상회담을 '연계'해 남측에 요구한 대가금은 10억 달러였다. '사업가 박지원'이 그 10억 달러를 5억 달러로 깎았다면 그는 '애국자'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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