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 남북정상회담 3주년과 특검수사 기간연장을 앞두고 제2차 특검 논란이 정치권을 뒤흔들고 있다. 이기호, 임동원, 박지원 등 김대중 전 대통령의 측근이 잇달아 소환·구속되는 상황을 두고보고만 있던 민주당이 억눌렸던 울분을 일거에 토해내고 나섰기 때문이다.
특히 한화갑·정균환 등 구주류 쪽 핵심 의원들이 노무현 대통령을 직접 겨냥, "정상회담 특검은 수준 이하의 국가경영"이라며 원색적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또 특검 수사에 비교적 타협적이었던 신주류 쪽과 청와대도 항로를 이탈하고 있는 특검호(號)를 정면 공격하면서 방향타 조정을 요구하는 등 모처럼만에 같은 화음을 내고 있어 파괴력은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13일 민주당의 잇단 성명공세는 전날 KBS <일요스페셜> 녹화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북송금 문제가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는 발언과 6·15 남북정상회담 3주년이 임박했다는 점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특검 쪽이 이기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을 구속하고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마저 소환해 사법처리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에 대한 사전 방어책의 성격이 크다고도 볼 수 있다. 결국 이같은 정치권과 청와대의 협공으로 진퇴양난에 빠진 특검은 상당한 부담을 떠안게 된 셈이다.
현재 민주당 신·구주류와 청와대의 요구는 'DJ 수사 반대'와 '햇볕정책 훼손 반대'로 모아지고 있다. 다만 비판의 수위에 있어서는 신주류와 구주류가 조금 달랐다. 신주류는 '깃털'에 해당하는 특검에 '원죄'가 있다고 주장한 반면, 구주류 쪽은 특검의 '몸통'인 노 대통령에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한화갑 고문은 13일 발표한 성명을 통해 "민족화해와 상생의 길을 개척한 주역들을 단죄할 수는 없다"며 김대중 전 대통령을 포함한 국민의 정부 측근들에 대한 특검을 '국가경영의 미숙함을 보여주는 수준 이하의 행위'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정균환 원내총무는 같은 날 기자회견에서 정경분리 원칙과 추가적 조치 동의 등으로 햇볕정책의 원칙이 훼손되고 있다며 노 대통령은 '햇볕정책의 계승과 발전'이라는 공약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신주류 쪽 이상수 사무총장도 이날 오후 기자간담회에서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나 국민감정을 봐서라도 해서는 안 된다"며 DJ 수사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고, 이해찬 의원도 "정상회담 부분은 사법처리가 돼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청와대 쪽도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만은 방관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문희상 청와대 비서실장은 이날 오전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특검법 수용을 공포할 당시의 여야간 공감대를 감안할 때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조사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해, DJ 수사 불가론에 힘을 실었다.
비록 문 실장이 "개인적 의견"이라며 노 대통령의 재가를 부인하고는 있지만, 노 대통령이 특검 문제에 관해 문 실장 명의로 입장을 표명할 것이라는 소문이 돈 뒤의 발언이라 노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특검의 수사 기간 연장 여부에 대해서는 청와대와 민주당이 엇박자를 내고 있어 갈등의 불씨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민주당은 13일 오전 당무회의에서 노 대통령이 특검의 수사기간 연장에 반대해 줄 것을 정 대표를 통해 건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특히 임채정 의원은 특검 수사 저지를 위한 법률안을 국회에 제출하겠다고 공언하는 등 청와대를 압박했고, 정세균 정책위 의장도 "합법적 접근방법으로 개정안을 신속히 내는 것이 중요하다"며 임 의원을 거들었다.
하지만 청와대 쪽은 "이제까지의 수사내용과 활동 계획을 종합 판단해 결정하는게 좋겠다"며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오히려 특검의 연장 요청을 거절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분석이 지배적이다. 게다가 임 의원의 특검 연장 저지 법안에 대해서도 상당한 거부감을 피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상수 사무총장도 "실무적 수사검사가 연장 요구를 했는데 대통령이 안 된다고 할 수 있겠느냐"며 노 대통령이 반대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그 자신도 "수사 연장 반대를 건의하기로 했다는 당의 결론은 존중하지만 과연 그것이 정치적으로 현명한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며 다소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음은 한화갑 고문의 성명 전문이다.
6.15 공동선언 3주년을 맞이하여
특검, 누가 민족화해의 주역을 죄인으로 만들고 있는가?
6.15 공동선언 3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남북한의 두 정상이 냉전과 대결을 넘어 평화와 화해협력을 약속한 그날 이후, 한반도평화는 대세가 되었고 남북교류협력의 새시대가 열렸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전 생애를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에 바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룬 역사적 위업입니다.
그러나 이 감격적인 날을 맞이하면서도 우리 국민의 마음은 편치 않습니다. 2000년 6월 15일 남북의 두 정상이 맺은 민족화해의 서약이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것은 세계 정치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정상회담에 대한 특검 때문입니다.
민족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냉전과 대결 구도를 깨기 위한 정상회담을 범죄행위로 몰아가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세계 어떤 나라에서 정상회담을 특검하는 경우가 있습니까? 정상회담의 내막을 송두리째 파헤치는 특검이 정당하다면, 과연 어떤 대통령이 마음 놓고 정상회담을 할 수 있겠습니까?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한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정상회담에 관계했던 사람들도 모두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묻습니다. 누가 왜 그들을 죄인으로 만들고 있습니까?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평화를 가져온 죄, 화해협력의 물꼬를 튼 죄, 분단 50년 세월에 피멍든 7천만 겨레의 눈물을 닦아준 죄 말고는 없습니다. 민족화해와 상생의 길을 개척한 주역들을 단죄할 수는 없습니다.
남북 화해협력의 새시대를 열어놓은 남북정상회담을 우리 민족의 자산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도대체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입니까? 정상회담을 특검하는 것은 국가경영의 미숙함을 보여주는 수준 이하의 행위입니다. 지금 진행되는 특검은 냉전과 분단의 벽을 허물려는 우리 민족의 평화와 통일 지향을 범죄시하는 정치 비극입니다. 이 어리석은 정치놀음은 이제 그만두어야 합니다.
참여정부는 햇볕정책을 승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한미, 한일정상회담을 통해 북핵문제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대화를 통해 풀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한반도 정세는 긴장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이미 미국과 일본, 호주는 선택적 해상봉쇄라는 대북제재를 시작하였으며, 미국, 일본을 비롯한 서방 11개국도 대북제재를 위한 국제공조에 착수하였습니다. 한미정상회담에서 언급한 ‘추가조치’가 발동된 것입니다. 이 급박한 사태 앞에서 현 정부는 전쟁인가, 평화인가? 대화인가, 제재인가? 이 물음에 명확한 입장을 밝혀야 합니다.
참여정부가 진행하는 모든 대북사업과 대화의 출발점은 남북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입니다. 지금 국민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과 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냉정하게 비교하고 있습니다. 남북화해와 민족공영의 토대를 다진 햇볕정책을 부정하는 대북정책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정부는 미일의 대북제재가 진행되고 있는 지금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가 무엇인지를 밝혀서 국민들을 안심시키고 불안을 해소해야 합니다.
저는 이 순간 지난 남북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주최한 만찬사의 한 구절을 떠올려봅니다.
"이제 지난 100년 동안 우리 민족이 흘린 눈물을 거둘 때가 왔습니다. 서로에게 입힌 상처를 감싸주어야 할 때입니다. 평화와 협력과 통일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6월 14일에는 남북한의 경의선과 동해선 철도가 연결됩니다. 수십년 동안 녹슨 철마를 다시 일으켜 세운 민족의 힘과 지혜를 한데 모아 남북 공생공영의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6.15 공동선언의 정신을 이어받아 남북화해와 한반도의 평화를 이루어 나갑시다.
2003. 6. 13
새천년민주당 국회의원 한화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