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고 미루며 지나쳤던 그곳, '추사적거지'를 찾기까지는 많은 시간을 흘러보낸 뒤였다.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고 떠나면 그만큼 공감하는 부분이 많아진다는 사실.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부분까지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말이다.
가지 부러진 노송이 모진 풍운에 시달리면서도 푸르름을 간직하고 절개를 지키듯, '추사적거비' 옆에는 노송 두 그루가 6월의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었다.
우선 입구 오른편에 마련된 전시실에 들려 추사의 작품 세계를 먼저 감상했다. 그쪽 분야엔 까막눈인 내가 무얼 감상한다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떠나기 전 자료에서 보았던 추사의 생애에 대한 아픔과 기쁨을 되새기며 한 걸음 한 걸음 작품세계로 빠져 들어갔다. 그리고 중국까지 명성이 자자했던 '추사 김정희'가 '추사체'를 완성한 곳이 바로 이곳이라 생각하니 그 감회가 남달랐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와 인연을 맺은 것은 1840년 윤상도의 옥사에 관련되었다 하여 사형을 면치 못하게 되었을 때, 우의정 조인영으로 겨우 목숨만을 부지하여 금부 하졸에 끌려 먼 유배의 길에 오르게 된다.
처음 제주 땅 화북에 발을 들여놓은 추사는 남제주군 대정으로 가서 교리 송계순의 집에 적소를 정하여 나중에는 강도순의 집으로 옮겨 살았다.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추사 김정희( 1786-1856)는 자는 원춘. 호는 완당. 추사. 예당. 시암. 과파로 문과에 급제하여 충청우도 암행어사와 성균관대사성. 이조참판을 역임하고 24세때 연경에 가서 경학. 금석학. 서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추사적거비' 뒤로 보이는 초가가 왠지 낯익어 보였다. 고향집 대문에 들어서는 기분이다. 정낭이 내려져 있는 것으로 봐서 그냥 들어와도 좋다 신호인가 보다.
많은 세월이 흘러서일까. 당시 추사가 묵었던 방은 허름했으나 어디에선가 묵향이 묻어 나왔다. 유배지라는 선입감 때문인지 마당 끝에 쌓아놓은 돌담이 누군가를 구속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안거리에는 당시 추사가 사용했던 뒤지와 옷장 등의 민구가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리고 밖 거리에는 " 이곳에 9년 적거하는 동안 글을 배우러 오는 유생과 아울러 주민들을 가르치고 식객을 위하여 원래 3칸 초가 2채를 1채를 4칸으로 증축한 변형초가"라 쓰여져 있었다.
그를 증명이라도 하듯 부엌에는 시커먼 솥 여러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만큼 만은 식객들과 같이 살았다는 증거다.
밖 거리에 있는 방에는 그 당시 지방 유생들과 같이 공부하던 모습을 그대로 재현 해 놓아 그 당시 유배 생활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적거 생활을 하며 추사는 밭과 초목을 감상하며 외로운 심정을 위로 삼았으며 특히 수선화를 매우 즐겨서 수선화를 한 시도 남겼다.
특히 '세한도'는 추사가 제주에 유배당했을 때 제자인 이상적에게 그려준 걸작으로 국보 180호로 지정되어 있다. 귀양살이의 어려움 속에서도 추사체를 완성하였다는 사실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또한 '혼서지'는 김정희가 1840년 제주도에서 유배할 당시 아들이 혼인하게 되자 아들에게 보낸 것이다. 이밖에도 생원시권, 부이선란, 단연죽로시옥, 산심일장란, 산수도, 묵란도 등의 작품이 유명하다.
추사적거지는 제주도 기념물 제 5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초가집 5동과 민구류 142점등이 있으며 전시실에는 85점의 소장품이 전시되어 있다. 추사적거지는 남제주군 대정읍 안성리에 있다.
추사적거지 찾아가는 길은 제주공항- 서부산업도로- 중문관광단지- 창천삼거리- 안덕계곡- 화순해수욕장. 제주조각공원- 추사적거지로 1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또한 모진 풍운에 시달리면서도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는 추사 김정희를 기리기 위해 매년 음력 6월 3일은 추사 탄신일을 기념하고 추사문화예술제. 추사탄신기념 제행행사와 추사서예대전 등의 행사를 개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