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새벽의 섬진강
새벽의 섬진강 ⓒ 오창석
어둠의 자락을 헤치고 번져 나오는 미명(微明)을 받아, 새벽 섬진강의 물안개는 환영(幻影)처럼 피어오른다. 짙은 물그늘을 드리운 미류나무의 숲은 자신에게 오라는 듯 유령처럼 손짓하고, 강물은 깊고 깊은 바닥에 제 몸뚱이를 부벼대고 울며 살 냄새를 풍긴다. 그 내음이 유혹적이다. 그만 그곳에 몸을 섞고 싶어진다.

새벽강가에 서면 왜 어김없이 이방인이 되고 마는 것일까? 먼데 홀로 내버려진 듯한 고적함에 더욱 바람은 차고 몸서리가 쳐진다. 강물이 가슴속에 차 오르며 “그렇게 마음이 남루해지도록 지금까지 무얼하다 이제 왔느냐고” 묻는다.

강물이 상처를 어루만지고 회한의 눈물이 그 위에 부서진다.

전북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봉황산의 데미샘에서 발원하여 섬진강은 수많은 물줄기들과 합쳐지며 구례, 하동을 거쳐 광양만에 이르기까지 530리(212km)를 흐른다.

어디로 흐르다가 이제는 끝인갑다 싶으면 살짝 수줍은 듯 고운 몸을 드러내는 산골 색시 같은 강, 잊어버렸다가 생각났다가 산골 깊숙이 굽이 돌며 아름다운 산그림자 솔그림자를 제 몸 안에 청청하게 그릴 줄 아는 강, 강물 가까이 끝없이 작고 예쁜 마을들을 거느린 강 (김용택.섬진강이야기1)

굽이도는 섬진강
굽이도는 섬진강 ⓒ 오창석
전국에서 아홉번째로 긴 강인 이곳은 모래가 많아 옛부터 모래가람, 다사강(多沙江)으로 불렸으며 전설에 의하면 고려 우왕(1385년)때 왜구가 강 하구에 침입하였을 때 수십만마리의 두꺼비가 울부짖어 그들이 광양 쪽으로 피해갔는데, 이때부터 두꺼비 섬(蟾)자를 붙여 섬진강(蟾津江)이라 불렀다고 한다. 개발의 혜택을 덜 누린 덕에 이 곳은 전국에서 가장 깨끗한 강이자 아름다운 강으로 불린다.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해 저물면 해 저무는 강변에/쌀밥 같은 토끼풀꽃/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김용택.섬진강1중에서)

섬진강은 여러 지류들을 보듬어 흐르다 보성강과 합류하면서 큰 강다운 면모를 보여주는데 모래사장으로 유명한 압록에 이어 구례구를 지나면 지리산 자락과 만나는 구례에 이른다.

줄배
줄배 ⓒ 오창석
지리산 피아골에서 내려온 물과 만나는 곳에서 노부부가 줄 배를 끌며 힘겹게 강을 건너고 있었다. 젊은 날에는 단단한 팔뚝과 억센 손아귀의 힘으로 손쉽게 강을 건넜으련만 숨만 가쁘게 몰아 쉴 뿐, 배는 이쪽 나루에 쉽게 닿지 못하고 어지러이 흔들리는데, “할아버지! 배타고 오시는 것 사진 좀 찍을게요”했더니 두 분이 이구동성으로 “늙은이들 꼴이 뭐가 좋다고, 안돼!” 버럭 화를 내며 호통을 친다.

힘들어 죽을 지경인데,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사진이나 찍어 대려는 이기적인 젊은 놈들의 심보가 오죽 얄미웠을까. 줄배는 섬진강을 대표하는 풍경 중의 하나였지만 지금은 우악스런 다리들이 곳곳에 놓여지고, 이용하는 이들이 적어 곧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갈 운명이다.

화개장터
화개장터 ⓒ 오창석
이곳을 지나 얼마 가지 않아 화개나루에 당도하면 강 전체에서 폭이 가장 넓어 지는데, 최고의 재첩산지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재첩을 잡는 이들은 하나도 볼 수가 없어 인근 마을의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요즘엔 배를 이용해서 대량으로 채취하기 때문에 재첩잡이를 구경하기가 힘들다고 전한다.

전라남도와 경상남도는 여기 강물을 경계로 나뉘는데, 가수 조영남의 노래로 더 유명해진 화개장터가 이곳에 있기도 하다. 전라도와 경상도 사람들이 모두 어우러져 큰 장을 이루었다던 화개장터의 융성한 옛자취는 찾아 볼 길 없고 현재는 그 모습이 전국 어디서나 똑같은 진부한 관광지로 남아있다.

곳곳의 다리공사로 강은 몸살을 앓고 있었다. 여기 저기 골재재취로 아름다운 모래사장들이 사라지고 더불어 물까지 혼탁해지는 바람에 재첩의 수가 현저히 줄어들고, 하구 쪽에서는 물의 역류 때문인지 강에서 미역이 자라는 기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은어
은어 ⓒ 오창석
섬진강에는 악어가 살지 않는다. 대신 이 땅 사람들의 선하고도 고운 심성을 닮은 은어가 산다. 물빛 은어가 사는 섬진강이 진짜 섬진강일터인데 정부의 계획대로 또 하나의 댐을 지어 수량이 줄어들고, 골재채취는 그것대로 계속된다면 방류한 연어가 돌아올 곳은 어디며 은어, 참게, 재첩은 어디에 살 것인지 걱정이 앞선다.

토시를 낀 듯한 참게
토시를 낀 듯한 참게 ⓒ 오창석
강은 정말 흐르고 있는 것일까? 강은 그 자리에 있는데 정작 흘러가는 건 나를 남겨두고 가는 세월일지 모른다. 석양빛에 물들은 저문 강을 바라보며 소주잔을 기울인다. 살아가는 일에 지치고 고단할 때 목놓아 울어도 말없이 안아주는 넉넉한 강. 한잔에 취해 몸을 담그고 그대로 강이 되고 싶다.

ⓒ 오창석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