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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3집 '기억상실'(1993)
부활의 3집 '기억상실'(1993) ⓒ kpopdb.com
그리고 김태원은 부활의 이름으로 새 앨범 '기억상실'(1993)을 녹음한다. 2집 이후 6년 만이다. 김태원은 '작은하늘'의 보컬이던 김재기와 함께 작업을 시작했으며, 2집의 멤버들이었던 정준교, 김성태가 합류했다. 건반은 '봄여름가을겨울'과 주목할만한 연주앨범을 녹음했던 최태완이 도와주었다. 명 엔지니어 마크 코브린이 녹음하여 사운드의 질감도 상당히 뛰어나다.

A면은 히트곡 '소나기'로 시작한다.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를 소재로 삼아 만들어진 이 곡은 그 애절함으로 무척 인기를 얻었는데, 김태원의 공간감있는 연주와 김재기의 호소력있는 보컬은 이 곡을 명곡으로 만들기 충분했다. 다음곡 '흑백영화'도 이 앨범에 담길만한 블루지한 곡인데 연주들 사이사이에 담긴 빈 공간들은 이 곡을 애상적으로 만들고 있다.

타이틀곡 '기억상실'은 단절된 기억들을 단편적으로 떠올리는 듯한 가사의 조각들이 김태원의 블루지한 기타 연주 위에 흐르는 곡으로 기타리스트 김태원의 연주를 만끽할 수 있는 곡이다. 1분 정도 밖에 안되는 마지막 곡 01-08-01의 어쿠스틱 기타연주는 A면을 깔끔하게 마무리짓고 있다.

B면의 첫 곡인 '사랑할수록'은 '소나기'만큼이나 인기를 얻은 곡이다. 김재기의 보컬은 고음역으로 치솟으며 지난 사랑을 노래하는데, 그의 담백한 목소리는 담담하게 슬픈 이 곡에 무척 잘 어울린다. 연주곡인 '별'은 역시 드라마틱한 감정의 반전을 가지고 있는 블루지한 곡이다. 이렇게 조용한 곡에서도 연주에 따라 얼마든지 격정적인 전환을 묘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김태원은 직접 들려주고 있다.

'흐린 비가 내리며는'은 마치 풍경화처럼 들린다. 허스키한 김태원의 목소리가 돋보이는 곡으로 이 앨범의 숨겨진 명곡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말의 예쁜 어감을 살린 제목의 '그리운 그리움 그림'은 앞 곡을 이어받아 비슷하게 차분한 분위기로 앨범을 마무리짓는 연주곡이다.

이 앨범을 다 들어보면 김태원은 데이빗 길모어(DavidGilmour)나 게리 무어(GaryMoore)처럼 자신의 색깔이 분명한 기타리스트가 되고자 했던 것 같다. 김재기의 보컬도 중요한 요소이지만 어쩌면 김재기의 존재는 의도적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보컬이 빠진 음반이 성공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을 김태원은 알고있었을 것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 상업적 성공이 필요하다는 것은 밴드 '게임'의 실패에서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김태원은 기타리스트로서 초기에 비해 분명히 성숙했고, 그런 자기만의 톤을 담고 싶어했으며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앨범이다. 연주곡/보컬곡, 히트곡/비히트곡에는 관계없이 이 앨범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기타리스트로서의 자의식인 것이다.

또하나 이 앨범에서 주목할 것은 소리의 공간감이다. 헤비 사운드를 추구하던 초기 부활의 곡들에서 소리의 공간감을 느끼긴 어렵다. 하지만 이 앨범에서는 그런 것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그 덕분에 그는 마치 캐멀(Camel)이 Stationary Traveller 앨범에서 만들었던 것 같은 매끈한 사운드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사실 여백이라는 것은 한국 전통 예술의 가장 기본적인 것이 아니었던가. 덕분에 색깔이 분명한 앨범을 찾기가 쉽지않은 가요계에서 이 앨범은 빛나는 존재가 될 수 있었다.

김재기는 이 앨범을 녹음한 직후 교통사고가 나서 죽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그는 소나기의 소녀처럼 금방 가버린 것이다. 이후 공연은 김재기의 동생인 김재희가 보컬을 맡아주었으며 부활은 몇몇 공연을 하고 나서 그 멤버들 그대로 다음 앨범을 녹음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잡념에 관하여'(1995)였다. 하지만 부활의 미래는 그다지 순탄치 않았는데 2003년 현재까지 부활에서 두 장 이상 앨범을 녹음한 보컬이 이승철밖에 없다는 사실이 그 상황을 잘 말해준다.

이 앨범은 부활의 역사 중에서도 매우 독특한 위치를 점하는 앨범이다. 핑크 플로이드(PinkFloyd)의 명반들 속에서 블루지한 이색작인 Wish You Were Here(1975)가 대표작으로 당당히 꼽히는 것처럼 이 앨범도 부활의 앨범들 중 가장 독특한 앨범임에도 불구하고 명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음악적 깊이를 가지고 있다. 기분이 나직하게 가라앉을 때 꺼내 들으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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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서재 출판사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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