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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입석열차를 타고 물안개에 젖다

▲ 앞뒤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물안개가 자욱한 남이섬 가는 길
ⓒ 김정은
아침 7시 10분 청량리행 경춘선 입석 기차에 오른다. 이렇게 입석열차를 타보는 것이 정말 얼마만인가? 예전 경춘선 완행열차 입석을 탔을 때의 귀를 두드리는 소음과 젊음의 땀냄새를 느껴볼 수 있을까 하는 가벼운 기대감과 함께 열차에 올랐다. 하지만 기차는 나의 그같은 기대를 저버리고 시원하고 넓은 공간으로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하기야 그때 그 기억은 좌석 없이 누구에게나 표를 팔던 완행열차(비둘기호)였기에 가능했다. 비둘기호가 대부분 사라지고 입석도 좌석처럼 제한을 두는 요즘의 열차운행시스템에서 그런 기억은 정말 오래된 낡은 추억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추억은 추억으로 끝나야 아름다울 터, 열차가 출발하고 얼마 안 돼서 나는 바로 좌석을 예매하지 못하고 즉흥적으로 행동한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만큼 가평까지 1시간 30분 정도의 여정은 서 있는 나에겐 추억을 되새기기보다는 육체적인 아픔(?)이 더 컸다고나 할까? 이런 육체적인 아픔을 겪으면서까지 일요일 아침 일찍 서둘러 경춘선 기차에 오른 이유는 바로 남이섬의 물안개를 보기 위해서이다.

▲ 점점가까워지는 남이섬, 가까이 있으나 안개 속에 가려진 남이섬의 모습이 몽환적이다.
ⓒ 김정은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인기척과 함께 곧 들키고 말지만
안개 속에서는
가까이 있으나 그 가까움은 안개에 가려지고
멀리 있어도 그 거리는 안개에 채워진다
산다는 것은 그러한 것
때로 우리는 서로 가까이 있음을 견디지 못하고
때로는 멀어져감을 두려워한다

(중략)

그러나 안개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머무를 수 없는 것
시간이 가면
안개는 걷히고 우리는 나무들처럼
적당한 간격으로 서서 서로를 바라본다
산다는 것은 결국 그러한 것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시작도 끝도 알지 못하면서
안개 뒤에 나타났다가 다시 안개 속에 숨는 것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류시화 안개 속에 숨다)


남이섬에 들어가는 배를 타자 곧바로 사방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뽀얗게 핀 물안개의 촉촉한 미립자가 내 살갗을 부드럽게 건드리고 있다. 그 축축하면서도 몽환적인 느낌이란...

물안개가 자욱한 이 곳에는 먼 곳도 가까운 곳도 존재하지 않는다. 안개에 채워진 세상만이 존재한다. 문득 사람의 인생 또한 안개와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분명히 우리가 가는 앞에 존재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철저히 가려져 있다가 그 앞에 도달해야 비로소 형체를 알 수 있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고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안개 속 여행, 약간은 환상적이지만 앞을 알 수 없기에 불안한 우리네 인생이라고 말이다.

그럭저럭 배는 남이섬에 도착했다. 낯익은 선착장, 벌써 10년이 넘게 흘러 강산도 바뀌었을 법하지만 남이섬 선착장과 '남이섬'이라 쓴 한글 현판은 늘 그대로 변치 않은 채 손님들을 마중하고 있었다.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가벼운 친밀감을 느끼며 걸어가다 보니 드라마 겨울연가의 영향때문인지 중국어 일본어로 각각 겨울연가 타이틀을 써붙여 놓고 관광객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어디를 가나 모두 겨울연가 타령인 것이... 이곳이 남이섬이 아닌 겨울연가 세트장이 아닌가 하는 느낌조차 들 정도였다.

▲ 남이섬 중앙에 곧게 뻗은 은사시나무가로수길, 이곳에서라면 절로 자전거가 타고 싶어진다.
ⓒ 김정은

▲ 은사시나무 가로수 아래서 바라다 본 하늘
ⓒ 김정은

그런 느낌도 잠시, 물안개가 사라지기 전에 자전거를 빌려타고 섬 한바퀴를 돌기로 했다. 자전거는 드라마의 배경이 되었던 은사시나무 가로수길과 메타세콰이어길을 배우가 된 듯한 느낌으로 달리다가 어느 사이 아직 물안개의 잔상이 남아 있는 강변 산책로를 따라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 남이섬이 자랑하는 죽죽 뻗은 메타세콰이어길
ⓒ 김정은

가끔은 자전거 길로 채 다듬어지 않아 자갈돌이 이리저리 구르는 탓에 요철이 심해 덜컹덜컹 자전거가 쓰러질 듯 위태롭게 소리를 나는 곳도 있었지만 아침 이슬이 맺힌 나무에서 쉴새 없이 뿜어나오는 신선한 공기의 내음을 맘껏 느끼면서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이 모든 것이 보이지 않은 곳에서 나에게 베풀어준 자연과 신의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전거로 섬 일주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넉넉하게 잡아도 삼사십분이면 충분했다.

그 사이 이미 물안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잔잔한 수면 위에 온통 강렬하고 뜨거운 햇빛이 쏟아지고 있다.

동화 속 노란우산에 풍덩 빠지다

▲ 남이섬 안델센 홀에서 전시되고 있는 안델센 원화전
ⓒ 김정은

때마침 남이섬에서는 안델센 원화전과 한국인 최초로 2002 뉴욕 타임스가 선정한 최우수 그림책 10선에 선정된 류재수씨의 그림책 노란우산의 원화전이 함께 열리고 있었다.

동화책 하면 생각나는 그 이름, 누구나 어렸을 적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이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안델센의 동화 '인어공주'와 '엄지공주', '미운오리새끼' '벌거숭이 임금님' '성냥팔이소녀' 등의 동화 속 캐릭터를 나라마다 어떠한 느낌으로 묘사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도록 인쇄 전에 정성스럽게 그려진 각 국의 대표적인 작가 22인들의 그림책 원화 250여점을 볼 수 있는 이 전시회는 모처럼 어릴 적 동심으로 돌아가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특히 이 전시회에는 안델센의 깨알같이 적힌 육필원고 2점과 안델센의 생애를 담은 유품, 영상자료와 함께 안델센 생전에 그의 작품을 주로 그린 윌헬름 페델센과 로렌스 프로리히의 초판본 오리지날 일러스트레이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작품중에는 유독 일본작가의 원화가 많았는데 그림 말고도 자수로 세밀하게 동화의 느낌을 표현하고 있는 몇몇 일본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서 역시 서구의 작가들에 비해 오밀조밀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나라 작가로는 류재수씨와 강우현씨의 작품이 있었는데 강우현씨의 작품벌거숭이 임금님을 보면서 어딘가 많이 본 듯한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왕관을 쓰지 않고 사모관대를 쓴 우리나라식의 벌거숭이 임금님... 비록 색감이나 표현기법에서 다른 작품에 비해 세련된 느낌은 없었지만 내 어릴 적 그림책에서 주로 볼 수 있었던 낯익은 그림이기에 정감이 더 갔다.

전시회를 본 후 곧바로 옆의 레종 갤러리에서 전시되고 있는 류재수의 노란우산 원화전을 보러갔다. 안델센 원화전을 본 사람은 무료로 볼 수 있는 전시지만 나는 솔직히 안델센보다는 노란우산 원화전에 더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노란우산'이란 그림책은 한마디로 열린 시청각 그림책이다. 그림책에 부록으로 첨부되어 있는 CD를 틀고 신동일씨가 작곡했다는 음악을 들으며 글자 한 자 없는 파스텔 톤의 그림책 속 노란우산의 시선을 따라가다보면 여러 가지 느낌을 받게 된다.

▲ 류재수의 노란우산 원화전
ⓒ 김정은

그 느낌은 비오는 날 약간은 불안한 마음을 지니고 학교로 가면서 친구들을 만나 안도하는 초등학생의 시선일 수도 있고, 혹 빗속에 사고라도 없을까 전전긍긍하며 홀로 아이를 보내며 걱정의 눈으로 살펴보는 학부모의 시선일 수도 있고, 비오는 날 무심히 거리를 보다가 앙증 맞은 노란우산의 궤적을 유심히 내려다보는 낯선 사람의 시선일 수도 있다.

나 또한 나만의 시선과 느낌으로 노란우산의 원화를 보려 애썼지만 유감스럽게도 처음 그림책을 보았을 때 느꼈던 친밀감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 생각해보니 바로 전시기법의 문제인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란우산의 원화전을 하면서 중요한 매개물 중의 하나인 신동일씨의 음악이 빠졌고 원화 전시순서 또한 그림책의 순서와 약간 다른 듯하기도 하고 군데 군데 빠진 부분도 있는 것같아 몰입이 어려웠다고나 할까? 더구나 노란우산의 원래음악이 아닌 전혀 다른 느낌의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은 것도 커다란 큰 장애요소로 다가와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지만 그런 아쉬움 속에서도 내 마음 속에는 이미 빛깔도 선명한 노란우산의 잔상이 수줍게 들어와 버려 노란우산의 마법에 풍덩 빠져버린 신세가 되었다.

추억의 도시락의 맛과 추억을 되새김질 하다

▲ 카페메뉴중 하나인 양철도시락
ⓒ 김정은

예전 친구들 몰래 혼자 먹으라고 어머니께서 양철도시락 밥 밑에 꼭꼭 숨겨놓으신 계란 후라이의 기억... 점심시간을 기다리느라 약간은 출출한 속에 겨울철 난로가에 차곡차곡 올라가는 양철도시락 속에서 따끈하게 데워지는 밥과 계란후라이의 맛은 지금의 어떠한 진수성찬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특별한 맛이 있었다.

그 중에 짖궂은 친구가 뜨겁게 데워진 도시락 밥 속에 김치를 넣고 사정없이 흔들어 대면 겉보기에는 개밥처럼 보이지만 그맛 또한 그 어디에서고 맛볼 수 없는 개성있는 맛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남이섬에서 이 추억의 양철도시락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은 좀 의외였다.

대체 남이섬과 학창시절이 무슨 관계가 있길래 요즘 보기조차 힘든 양철 도시락을그리 싼가격도 아닌 가격으로 버젓히 팔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면서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도시락을 주문했다. 이윽고 나오는 초라한 모습의 양철 도시락, 그 흔한 장국도 없고 단무지도 없는 딸랑 도시락 하나인 초라한 상차림을 보고 솔직히 도시락 내부의 함량 또한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흔들어 먹은 도시락 밥의 맛은 의외로 괜찮았다.

도시락밥을 먹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엇다. 이 카페에서는 도시락밥의 맛을 파는 것이 아니라 도시락 밥 하나가 가져다 줄 추억의 구수하고 감칠 맛을 팔고 있는 거라고...

그만큼 나를 비롯한 우리 사는 세상이 추억이라는 이름이 지니고 있는 맛과 향기를 갈구하고 있기에 오히려 더 특별해보이는지 모르겠다. 식사하는 동안 나는 추억의 맛에 정신없이 빠져 추억이라는 이름을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오후 2시 30분 기차를 타기 위해 배에 올라탔다. 뿌연 물안개가 사라진 남이섬을 떠나 이제 또 다른 일상 속으로 천천히 되돌아가려는 것이다.

남이섬을 떠나는 배 안에서 나는 다시한번 점점 멀어지는 남이섬을 뒤돌아봤다.

"새와 안개가 떠나간
숲에서 나는 걷는다. 걸어가면서
내 안에 일어나는 옛날의 불꽃을
본다 그 둘레에서
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숲의 끝에 이르러
나는 뒤돌아본다"
(류시화 두사람만의 아침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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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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