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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한 시인'의 이야기.

불의한 시대를 용서할 수 없었던 '한 시인'이 있었다. 고교시절 그는 천재성을 인정받던 문학소년이었다. 부산 혜광고에 재학 중이던 77년부터 79년까지, 대구 대건고의 또 다른 소년 천재시인 안도현과 함께 고교생 대상 전국 백일장의 90%를 휩쓸었다.

문학이라는 나무에 목을 메기로 결심한 시인은 경희대 국문과에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한다. 일찌감치 가스통 바슐라르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경도됐던 시인은 80년대 초반 '그 유명한' 평론가 김현(90년 타계)조차도 혀를 내두르게 한 난해시 '존재의 놀이' 등을 <시운동> 동인지에 발표하며, 탁월한 모더니스트로서의 품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때는 군사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80년대. 부도덕한 정권의 학정과 폭압을 매일같이 목도해야했던 젊은 시인은 마침내 역사와 인간에 대해 또다른 눈을 뜬다. 고통과 번민의 시간이었다. '시는 세계를 구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자신이 미웠다.

이후의 시간은 어땠냐고? 보통의 가난한 집 똑똑한 자식들처럼 시인 역시 학생운동의 불길 속으로 겁없이 뛰어든다. 랭보(프랑스 표상주의 시인)와 블레이크(영국의 상징주의 시인)를 지향하던 그는 시를 버리고 자처해 대자보의 거친 격문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1984년 경희대 지하신문 <자유전선> 편집장. 응당 '불법·이적출판물 제작 및 배포'라는 죄명이 뒤집어씌워진다. 캄캄절벽이었다. 이어지는 수배와 4년에 걸친 기나긴 도피생활. 하지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그 4년 동안에도 시인은 침묵하지 않았다.

공안당국의 수배로 인한 도피생활이 3년째이던 86년. 시인은 인천지역 노동자들을 학습하고 조직하는 일과 민청련 선전국 사업을 동시에 맡고 있었다. 강팍한 시대였지만 버리지 못한 '문학에의 꿈'은 민족해방혁명을 위한 문예소조 활동에도 시인을 참여케 했다. 백두산의 항일투쟁에서 무등산의 광주항쟁에 이르는 민족해방 서사시 4부작을 구상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인은 닥쳐올 어마어마한 비극의 씨앗과 우연히 만난다. 조총련 오사카 지부 서열 4위의 사회주의자 김봉현이 쓴 <제주도 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를 지인을 통해 얻게된 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함부로 발설할 수 없었던 제주 양민학살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밤새 읽은 시인은 통곡한다.

걷잡을 수 없는 시인의 의로운 분노를 알고있는 출판사 사장이 제의한다. "이걸 시로 쓰면 어떻겠냐?" 고교시절 몰래 숨어 필사한 김지하의 '오적(五賊)'을 읽고, '언젠가는 나도 꼭 저런 시를 쓰고 말 것'이라 수차례 다짐했던 시인은 "휘발유를 뒤집어쓰고 불 속으로 뛰어들라"는 이 위험한 제의를 기꺼이 수락한다.

자료수집과 관련 일본자료 번역, 집필 작업이 병행됐다. 민족해방혁명 문예소조의 일원이었던 '또 한 시인'이 시인을 도왔다. 앞서 언급된 김봉현의 책과 현대사의 참고자료를 토대로 서사시를 쓰자는 시인의 제의에 또 한 시인이 체포와 감금, 고문과 투옥의 두려움을 떨친 채 흔쾌히 응한 것이다.

서시와 4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그 서사시는 '또 한 시인'이 그린 밑그림과 시인의 수정과 보완작업을 통해 마침내 세상의 빛을 본다. 이윽고 1987년 3월 민주주의 혁명과 제국주의를 특집으로 다룬 사회과학 무크 <녹두서평> 창간호에 그 시가 수록된다. 조금 과장해 이야기하자면, 나라가 발칵 뒤집힌다. 이어지는 공안당국의 탄압.

출판사 관계자들은 줄줄이 구속되거나 잠수함(도피)을 타야했고, 안기부 지하밀실로 끌려간 시인의 선배 안수철과 후배 두산은 "시인의 소재를 대라"는 협박과 함께 끔찍한 전기고문, 물고문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그들에게 87년 봄은 죽음에 비견할 고통이었다.

시인을 검거하기 위해 혈안이 된 채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안기부와 치안본부, 시경의 대공요원들. 좁혀오는 그들의 포위망에 결국 대통령선거를 한 달 앞둔 11월 11일 시인이 체포·구속된다. 국가보안법 위반혐의였다. 나아가 공안당국은 시인을 '간첩의 지령으로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시를 쓴 이적단체의 수괴로 묶어 넣으려 한다. 이른바 '87년 대선 용공조작사건'이었다.

재판을 받아야했지만, 나서는 변호사가 아무도 없었다. '곧 있을 선거를 통해 김대중이나 김영삼에게로 정권이 넘어가면 군사독재시대의 인권변호사라는 꼬리표를 달고 한 자리씩 할 사람들이 간첩을 변호했다는 오명을 얻기 싫어서 그럴 것이다'라고 판단한 시인은 절망한다. 게다가 대부분의 문인들 역시 법정의 증인석에 서기를 거부한다. 시인의 절망은 분노로 바뀌었다.

시인은 구치소에서 '전국의 애국청년 문학도들에게 보내는 한 시인의 편지'라는 제목으로 써둔 200매의 항소이유서를 갈갈이 찢어버리고, 달랑 1장의 종이에 "장백산 줄기줄기 피 어린 자욱"으로 시작되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적어 고등법원 재판부에 제출한다. 모두가 "미친 짓"이라 칭했던 그 행동은, 동시대를 사는 지식인의 용기없음과 가식을 향해 쏜 시인의 불화살이었다.

시간은 흘렀고, 시인은 감옥을 나왔다. 서사시의 완성을 위해 찾은 제주도. "산에 올라간 아비대신 다섯 살 꼬마아이를 철사줄로 감아 목 졸라 죽이고, 빨치산의 아내라는 죄명을 씌워 며느리로 하여금 시아버지의 성기를 핥게 했다"는 증언을 들은 시인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환멸을 느낀다.

주저 없이 붓을 꺾는 시인. 이후 1998년 '날지 않고 울지 않은 새처럼'을 발표할 때까지 시인은 9년간 단 한 줄의 시도 쓰지 못했다. 아니, 쓰지 않았다. 시를 못한 시인의 세월은 손가락을 잘린 피아니스트의 세월과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5년이 흘렀다. 1987년 발표 당시 자기검열에 의해 삭제되거나, 수정한 대목을 모두 되살린 복원판 '그 시집'이 출간됐다. 2003년 6월 초순이었다. 시인은 현재 국제민주연대가 발행하는 인권 월간지 <사람이 사람에게> 편집위원장이다.

그리고 '또 한 시인'의 이야기

어린 시절 심하게 말을 더듬었던 '또 한 시인'의 말더듬증을 치료한 건 문학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전라남도의 끝마을 장터의 시끌벅적함 속에서 자라난 시인에게는 바로 그 장터의 언어를 다루는 탁월한 재주가 후천적인 선물로 주어졌다. 말더듬이 소년의 가슴에서 자라난 문학에의 꿈.

광주고등학교에 진학한 시인은 문예반에 가입하자마자 동문 선배시인 박봉우와 강태열, 조태일과 이성부의 뒤를 이을 소년문사(文士)로 주목받는다. 그 역시 수많은 백일장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상장을 탔다. 문학을 통해 일찌감치 삶의 비의를 체득한 시인은 스무 살이 되기 전 세상과 인간에 절망해 훌쩍 집을 떠나는 조숙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시인이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바꾼 건 광주항쟁을 통해서다. 대학 2학년이던 1980년. 공수부대의 대검에 찔려 쓰러지는 노인을 계림동 헌책방 골목에서 직접 목격한 시인. 충격과 공포, 나서지, 말리지 못했던 자신의 비겁함에 대한 부끄러움은 시인으로 하여금 말과 글을 버리게 한다. 절필이었다.

군대를 다녀온 후에도 방황은 계속됐다. 시는 고사하고 어떤 일에서도 희망을 발견할 수 없었다. 시인의 마음을 돌린 건 문예반 시절 선배의 충고였다.

"여기서 이러다 죽을래?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민중에게 봉사해야할 것 아니냐."

그 말에 담긴 진실성을 읽은 시인은 84년 가을 상경한다.

'억눌린 사람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뭘까'를 고민하던 시인은 결국 다시 펜을 잡는다. 85년 <민중시 2>에 '배고픈 다리' 등을 발표하며 등단한 이후 백진기 등과 함께 진보문예지 <녹두꽃>을 창간하고 문학평론가 활동을 겸한다. 물론, 그 사이 앞서 언급된 '서사시'의 작업에도 참여, 자칫하면 '내란목적에 봉사했다'는 혐의로 옥고를 치를 뻔한 위기도 겪는다.

제주 4.3항쟁의 서사시화(化) 작업에 참여하기 전 민족해방혁명 문예소조 활동 때부터 시인은 "이론은 물론 실천적 태도 또한 빼어난 젊은 시인"으로 주위의 신망을 얻고있었다. 뿐이랴,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는 전국 대학 문예서클의 핵심 창작기조였던 '주사문예이론'의 핵심이론가로 활동했고, 그의 책 <자주적 문예운동>과 <동요하는 배는 닻을 내려라>는 당시 문학청년들의 필독서였다.

수많은 학생들이 민주화와 통일을 외치며 스스로의 몸에 불을 붙이던 91년. 김지하 시인이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글을 싣는다. 시인은 스스로 '시의 아버지'라 부르던 김지하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글을 <한겨레신문>에 게재한다. 지금 와서 생각해도 그건 대선배를 향한 후배의 눈물겨운 충정이고, 또 다른 용기였다.

"시는 시인의 개별의지가 아니라 세상이 만들어 주는 것"이며 "세상과 인간 내부의 비인간적인 측면과 항시적으로 갈등한다는 차원에서 시는 그 자체로서 이미 혁명"이라고 말하는 시인은 90년대 중반에는 소설로까지 활동범위를 넓혔다.

북한과의 화해무드가 조성된 2000년 이후에는 민족문학작가회의 통일위원장 자격으로 금강산을 방문, 남북 문학교류의 구체적 실천방안과 문인교류 방식을 논의했고, 월남전 참전군인의 고엽제 후유증을 다룬 소설 <슬로우 블릿>의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던 시인은 현재 또 다른 작품의 완성을 위해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그 역시 최근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독자들을 만난 '그 시집'을 보며 지나온 시대의 아픔과 자신의 운명에 관해 많은 생각을 떠올리지 않을까?

'한 시인'과 '또 한 시인' 그리고, '그 시집'은...

▲ 시인 이산하(우)와 김형수 그리고, 시집 <한라산>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짧지 않은 글을 맺을 때가 됐다. 의도적으로 시인의 이름과 책의 제목을 숨긴 채 무슨 비밀문건처럼 씌어진 형편없는 졸문을 여기까지 읽은 독자라면, 그들의 이름과 책의 제목을 알 자격이 있다. '한 시인'은 이산하(43)고, '또 한 시인'은 김형수(44) 그리고, '그 시집'은 <한라산>(시학사)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그 실체를 보여주는 한국현대사의 비극, 제주 4.3항쟁. 여기에 더해 이산하, 김형수 두 시인의 비극적인 운명까지 고스란히 담아낸 <한라산>을 만난다는 건 아름다운 고통 혹은, 피눈물 섞인 희망과 만나는 것에 다름 아니리라.

한라산 - 이산하 장편서사시

이산하 지음, 노마드북스(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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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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