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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많은 굴곡 중에는 '연대보증'에 의한 시련도 있다.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의 월급과 내 알량한 고료 수입으로 매월 200여 만원씩 빚잔치를 하며 5년동안 1억 4천여만원을 갚았다.
집도 담보 제공을 했다가 법원 경매로 넘어가게 되어서, 내 집을 내가 낙찰 받아 빚을 얻어 다시 사는 묘한 과정도 겪었다. 사업자에게 멋모르고 내 이름까지 빌려준 바람에 세금 문제에 시달리고, 경찰 검찰 등 수사기관에 일곱 차례나 불려가 참고인 조사를 받는 등 많은 곤욕을 치렀다.
자연 스트레스가 쌓이지 않을 수 없었다. 스트레스가 중첩되는 상황을 몇 년씩이나 겪다보니 내 건강에 난조가 온 것은 정한 이치였다. 스트레스가 당뇨병의 주요 원인 중의 하나라는 말을 일찍이 들은 적이 있지만, 설마 하는 생각도 버리지 못했다.
결국 당뇨 환자가 되었을 때 나는 내 생활의 난조, 그 질곡 속의 스트레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나의 당뇨와 고혈압이 베트남 전쟁 고엽제의 영향 탓이라는 것을 스스로 확신할 수 없었다.
내 몸의 질병이 전적으로 고엽제의 영향에 의한 것이 아님에도 내가 만일 고엽제 후유증이나 '의증'으로 판정을 받아 국가로부터 혜택을 보게 된다면, 그것에는 양심 문제가 결부되는 것 아닐까? 하느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는 사항이 아닐까? 나는 그것을 많이 생각했다.
그리하여 1999년 7월 홍성보훈지청에 처음 고엽제 후유증 검진 신청을 할 때도 그 문제를 많이 의식했고, 그 후 아무런 연락이 없을 때도 사유를 알아보는 일을 적극적으로 시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3년의 세월이 지난 후 딸아이를 외지 고등학교에 진학시키는 시점에 이르러서는 생각을 달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빠의 모교이기도 한 고향 학교를 외면하고 굳이 교회 '복자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천안 복자여고 진학을 고집하는 딸아이가 원망스럽기도 했으나 내 경제사정만을 생각하고 딸아이의 소망을 억누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생각하면 딸아이 덕이었다. 지난해 12월말 신입생 소집이 있어 딸아이와 함께 천안에 갔다가 돌아올 때 딸아이의 제의로 서해안고속도로 서산휴게소에 들렀던 것이 행운의 시작이었다. 거기에서 우연히 만난 파월전우이기도 한 지인(知人)은 앞으로의 학비 부담을 걱정하는 내게 고엽제 검진 관련 사항을 물었다.
그로부터 핀잔과 채근을 들은 나는 다음날 홍성보훈지청에 고엽제 검진 신청을 할 수 있었고, 올해 2월 4일 대전보훈병원에서 정밀 검진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딸아이의 입학식을 보러 천안에 간 3월 3일 홍성보훈지청 관계자로부터 내가 고엽제 후유증 판정에 의해 제7급 국가유공자로 결정되었다는 통보를 받게 되었다.
국가로부터 받는 여러 가지 혜택 중에서도 가장 다행스러운 것은 올해 고등학생이 된 딸아이와 중학생이 된 아들녀석의 학비를 대학교까지 전액 면제받게 된 사실이었다.
이 상황에서 나는 매월 20만6천원씩 받게 되는 보상금을 어떻게 사용할까 궁리하다가 조카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엔 그 돈을 딸아이의 원룸 월세(25만원)를 해결하는 일에 쓸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주신 이 선물을 나 혼자만 독점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남동생이 둘이다. 막내 동생은 부부가 중등 교원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용접 기능공인 가운데 동생은 현재 일당 13만원을 받고 일을 하지만 매일 8천원씩 차 연료비가 들고, 비정규직이니 신분보장도 되어 있지 않고 장래 퇴직금도 없다. 나처럼 기본재산도 없고 23평 연립주택이 재산의 전부다. 올해 초등학교 4년과 유치원에 다니는 두 아이가 장차 대학에 갈 때쯤이면 학비 부담이 심각해질 터였다.
그 학비 해결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매월 20만원씩 나오는 내 보상금을 조카들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보상금을 처음 수령한 4월 15일 두 아이의 이름으로 각 10만원씩 장기 적금을 들고 두 개의 적금 통장을 제수씨에게 건네 주고 매월 15일 은행에 가서 통장정리를 하라고 했다. 제수씨는 깜짝 놀라며 말을 하지 못했다.
아내가 선뜻 동의를 해주어서 한 일이지만, 그것은 올해 팔순이신 내 어머니를 몹시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었다.
나는 지금도 내 몸의 질병이 전적으로 베트남 전쟁 고엽제의 영향 탓이라고 확신하지 못한다. 그것에서 묘한 양심의 불편을 느낀다. 내가 그 시절 행정병이 아니고 정글을 누빈 전투병이었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기는 하지만….
만약 내 몸의 질병이 생활의 난조에서 온 스트레스 영향 탓이 더 크다면, 훗날 내가 이 세상을 떠났을 때 하느님은 정확히 아실 내 양심 문제가 관련되는 그 심판 상황에서, 국가의 혜택을 조카들에게도 나누어준 그 일을 하느님께서는 감안해 주시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요즘도 거의 매일같이 오후에는 등산을 한다. 284m의 백화산을 오르는 것은 내 건강(당뇨 관리)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기도를 하기 위해서이기도 한데, 매일 백화산을 오르고 내리며 '묵주기도'를 30단씩 바치니 참으로 복된 일이 아닐 수 없다.
묵주기도를 하며 여러 가지 지향을 두는데, 요즘의 한 가지(맨 마지막 지향)는 내 건강을 청원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죽는다 하더라도 내 아이들의 대학까지의 학비 면제 혜택은 변동이 없지만, 매월의 보상금은 지급이 중단되니 내 조카들은 혜택을 보지 못하게 된다. 조카들을 생각해서라도 좀 오래 살았으면 싶은 것이다.
매일같이 산을 오를 수 있는 복터진 팔자에는 그만큼 많은 기도의 몫이 부과되어 있음을 안다. 그 기도 의무를 생각하면서 오늘도 갖가지 지향들을 가슴에 아로새기며 묵주를 손에 쥐고 산을 오른다. 진심으로 하느님께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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