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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타인벡은 소설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에서 소작농과 자본주와의 팽팽한 대립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은행의 빚을 갚지 못해 농장에 위치한 집을 철거당할 위기에 처한 소작농과 집을 철거하러 트랙터를 몰고 온 기사와의 긴박한 대화내용은 분명 여러 가지를 의미하고 있다.

그 소작농은 기사에게 향하여 으름장을 논다. 만일 내 집 가까이 다가오면 총을 쏴 죽여 버릴 것이라고 말이다. 동시에 농부는 절규한다 “나는 앉아서 당하기 보단 나를 굶주리게 하는 사람을 먼저 죽여 버릴 거야” 그러자 트랙터 기사는 말하기를 “너를 궁지에 몰아 놓고 있는 것은 결코 사람이 아니야. 그것은 다름아닌 자본이라는 괴물이야”라고.

이 짧은 대화는 돈의 문제로 인한 인간소외와 계급갈등의 일면을 함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부채를 못 갚아 생존의 터전마저 위협당하고 있는 소작농과 단지 자본주의 명령에 충실한 트랙터 기사와의 대화 속에서 목격되는 사실은 오로지 자본의 회수를 둘러싼 첨예한 갈등과 대립뿐이다.

채권회수를 위해 생존권마저 서슴없이 강탈하려는 채권자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살인까지도 불사하겠다는 소작농의 완강한 태도를 바라보면서 나는 몇 가지 물음을 던지게 된다. 과연 자본은 얼마만큼 사악한 것인가. 자본과 노동과의 선한 연대는 가능한 것인가. 자본의 윤리란 없단 말인가. 자본이 선량해질 수 있다면 사회에 어떠한 변화를 몰고 올 것인가.

어찌 보면 산업혁명이후 인류역사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막시스트들은 자본을 사악한 것으로 규정하여 노동의 입장에서 해법을 찾으려 했다면 자본주의자들은 자본의 자정(自淨)능력에 믿음을 두고 그 체제를 발전시키며 그 답을 찾으려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해묵은 물음에 대한 일정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바로 9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사회책임투자(Socially Responsible Investment)의 정신이 바로 그것이다.

사회책임투자란 자본가의 투자 원칙을 말한다. 즉, 돈을 투자함에 있어서 단순히 재무적 이윤의 견지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적, 윤리적 측면까지 고려하여 사용하라는 것이다. 따라서‘반사회적’이며 ‘환경 적대적’이고 ‘비윤리적’인 기업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식으로든 자본가들이 감시와 제재가 가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2000년 7월 3일부터 영국은 사회책임투자법안을 발효함으로써 이 분야의 선도적 위치에 서게 된다. 이것은 단순한 정치적 제스처가 아니라 사회책임투자를 원하는 사회의 점증하는 요구에 대한 불가피한 응답이었다.

이 법안은 사회책임투자와 관련한 아주 정교한 투자원칙을 규정함으로써 런던금융시장의 투자자들을 긴장시킨다. 이 때부터 사회책임투자는 고루한 종교단체의 주장에서 일약 메인스트림의 중심 투자원칙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어 다른 국가들에도 유사한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독일, 스웨덴,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영국의 사회책임투자법안과 같은 법이 제정되었으며 현재 유럽공동체의회에서도 이의 도입을 검토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6월 3일,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열린‘유럽사회책임투자 포럼’의 자료에 의하면 현재 전세계적으로 사회책임투자 펀드의 규모는 약 2.7조 달러에 달하고 있다고 한다. 영국의 경우 이러한 자금규모는 97년도 340억 달러에서 지난 2001년에는 3,367억 달러로 불과 4년 사이 약 10배에 달하는 성장세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영국에서 이러한 투자가 정착되기까지는 기업연금 펀드가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즉, 현재 영국 주식시장에 있어서 최대 자본가는 총 발행주식수의 60%을 보유하고 있는 연금 펀드들이다. 그리고 이 연금펀드의 자금은 근로자들의 봉급에서 나온다.

따라서 이 펀드의 실질적 소유주는 아이러니 하게도 전통적 의미의 자본가들이 아닌 바로 근로자들 자신들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최대 자본가가 근로자들이며 근로자들은 곧 최대 자본가로 군림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이렇듯 연금 펀드를 매개로 하여 자본과 노동이 상호 의존적인 접점을 마련하고 있다. 펀드의 투자 수익률이 노후 생활의 보장과 맞물려 있는 상황이기에 근로자들은 연금펀드의 투자정책 입안시의 참여를 통하여 기업들에 대해 역설적으로 고 배당을 요구하며 임금인상의 억제를 주장하기도 한다. 즉, 근로자가 자본가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는 입장의 전도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저에는 지속 가능한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이라는 투자철학이 자리잡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사업을 영위하고 있는 이 세상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후세로부터 빌려 온 것이기에 그대로 물려 줘야 한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또한 기업의 이윤과 사회의 이윤이 조화를 이루며 돈을 벌더라도 인권과 윤리가 존중되는 틀 안에서만 이익을 추구할 때 지속적인 기업과 사회의 발전이 담보될 수 있다는 원칙인 것이다.

좋은 돈의 좋은 사용이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은 이미 오래 전 영국의 한 성직자의 주장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는 1760년 출간된 ‘돈의 사용법’(The Use of Money)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일갈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신체와 세계를 해치는 사업엔 돈을 사용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과 나라의 법에 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돈을 주셨다면 그것은 잠시 맡기신 것이지 소유하라고 주신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이세상의 소유자(proprietor)가 아니라 잠시 맡고 있는 관리인(Steward)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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