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죽어 장례를 치를 경우 땅 속에 시신을 묻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초분'은 낯선 풍습이다. 그도 그럴 것이 초분은 망자를 땅속에 묻지 않고 지상에 뉘어 놓은 채 짚으로 엮은 이엉으로 덮어 놓는 장례방식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엉으로 가려놓았다지만 시신이 지상에서 육탈(肉脫)되어 가는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섬뜩한 두려움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초분에 망자를 모시는 이런 방식은 현대인에게나 익숙치 않을 뿐, 조선말기까지만 해도 전국적으로 행해지던 장례풍습이었다. 현재도 전국의 어디를 가나 '초분골'이란 지명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집중적으로 초분을 두었던 곳이 있었음을 증명해준다. 10여년 전만 해도 서남해안의 도서엘 가면 초분을 쉽게 만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소멸되어 발견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왜 시신을 땅 속에 바로 묻지 않고 초분장(草墳葬)을 했던 것일까. 그것은 부패한 살이 신성한 땅을 더럽히지 않게 하기 위한 목적과 신성한 영혼이 살이 아닌 뼈에 깃들어 있기 때문에 더러운 살을 지상에서 탈육(脫肉)시킨 다음 깨끗한 뼈를 땅 속에 묻고자 하는 염원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 외에도 불결한 살이 붙은 채로는 영혼이 좋은 곳으로 갈 수 없다고 믿었는가 하면 죽은 뒤에 바로 매장하는 것은 박정한 행위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지상에 두고자 하는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겨울에 땅이 얼어 매장이 불가능하거나 전염병으로 사망했을 때 집 안에 두지 않고 초분에 모셨으며 익사한 시신의 물을 빼기 위해서, 정해진 액일(厄日)을 피해 길일에 맞춰 장례를 치르기 위해,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은 경우 부자간의 서열을 맞추기 위해, 고기잡이를 나간 식구가 돌아와 망자의 모습을 보고 난 다음 매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경우 등이 있었다.
이 같은 복장제(復葬制)는 유교식의 일반적인 장례가 한 번의 매장으로 끝나는 단장제(單葬制)임에 반해 이장의 과정을 거치는 이차장(二次葬)인데, 그 역사는 지석묘(고인돌)나 옹관묘가 발굴되는 백제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뿌리 깊은 습속이다.
근래에 와서는 '조상들의 묘소 옆에는 썩은 냄새를 풍기므로 절대 날송장으로는 묻지 못한다'거나 '무덤에 바로 모신 집치고 후손들이 화를 입지 않은 집 못 봤다'는 등 반드시 육탈을 거쳐 이장해야 액을 막고 복을 받는다는 믿음으로 전해지고 있다.
초분은 최하 3년에서 10년까지 유지하는데 가을걷이가 끝나고 나면 볏짚으로 지붕에 이엉을 얹듯 새로 초분을 이었다. 제사나 명절 때가 되면 보통의 묘소와 마찬가지로 성묘를 하고 제물을 올렸다.
선친을 10년째 초분에 모시고 있는 신안군 도초도 외남리의 김영복씨(67세)는 "형수를 한 5년 초분에 모셨는데 애를 먹었어요, 뼈를 추려 한지로 깨끗이 닦아내야 하는데 일찍 이장을 하는 바람에 육탈이 덜 되어서 고생했제. 젊은 사람들은 무섭다고들 하는데 나는 묘 속에 계시는 것보다 지상에 계신다고 보니까 훨씬 더 정 있습디다. 아무래도 더 자주 와서 봐지고, 나는 공동묘지에서는 못자도 초분 옆에서는 자요"라고 말했다.
도초도 발매리의 배동욱씨(46세)는 "초분 생각하믄 머리 끝이 쫑긋쫑긋한디 어려서는 귀신 나온다고 무서워서 옆에도 못갔지라. 그래도 땅꾼들은 구렁이 잡는다고 초분을 다 쑤시고 다녔제. 안이 따뜻한 게 큰 구렁이가 꼭 한 마리씩 있었어라"라고 말했다.
이렇다 보니 일제시대 징용을 피하거나 전쟁통에 쫓긴 이들 중에는 초분이 집단적으로 모여 있는 초분골로 숨어 들어 목숨을 부지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장례는 이승에서 죽은 이를 저승에 가서 다시 태어나게 하는 통과의례요 이별의 의식이다. 사랑하는 이가 저 세상에 가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지만, 그보다 이별을 인정하기 힘든 게 먼저이고 보면 작은 초가집을 지어 이승에서의 인연을 연장하고자 한 것이 초분을 만든 이들의 진짜 속내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신안군 비금, 도초도는 초분뿐 아니라 전국에서 가장 맛있는 시금치의 산지이고 국내 최대 규모의 천일염전이 있으며, 번잡스럽지 않고 아늑한 분위기의 멋진 해수욕장도 여럿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