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서거정이 "하계(下界)에서는 연기와 티끌을 피할 곳이 없건만, 절의 누각은 하늘과 가지런하다"고 감탄한 절. 수종사에 오르기 위해 자동차는 힘겹게 고개를 오른다. 하늘과 가지런한 절답게 가도 가도 거의 70도 경사의 오르막길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어 운전자를 불안하게 하는 곳이다.
한 두번 올라가는 길이 아니건만 수종사 오르는 길은 늘 운전자를 긴장시키게 하는 매력이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긴장감에도 불구하고 수종사는 서울 근교에서 보기 힘든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매력적인 곳이다.
마음이 심란할 때마다 나는 이 곳에 들려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북한강과 남한강을 굽어보곤 한다. 그 때마다 같은 강물이라도 물 색깔이 서로 차이나는 특이한 개성에 감탄하다가 그 개성들이 어울려져 무심한 듯 한가지 색깔을 만들어나가는 모습을 보며 자질구레한 일상사에 찌들린 번뇌를 찻잔 속에 털어놓고 마음의 위안을 얻곤 한다.
"그래, 세상사는 게 다 그런거지... 뭐 별 다른게 있으려구"
지금도 철이 없긴 마찬가지지만 철없던 어린 나이에 내가 가장 싫어했던 말이 바로 이런 류의 말이었다. 연세 지긋한 어른들이 자주 하시는, 적당한 체념과 타협이 뒤섞인 도피적이고 소극적인 이 말이 풍기는 분위기에서 왠지 돌 씹은 밥을 먹을 때와 같은 묘한 이질감과 거부감을 느끼곤 했는데, 요즘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류의 말을 뇌까리는 나를 보고 깜짝 깜짝 놀랄 때가 많다.
아니, 그보다는 아직은 이런 말을 할만큼 세상을 살아본 나이도 아닌데 뭐가 못마땅해서 겁없이 아무렇게나 무서운 말을 내뱉어내는지 자문자답할 때가 빈번해졌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무심한 흰나비는 오락가락하고
오늘도 나는 여전히 나 자신과의 설익은 교만과 체념을 꾸짖기 위해 수종사에 오르는 중이다. 수종사 오르는 이끼 낀 돌계단은 여전히 변함없는데 어디서인지 보지 못하던 자그마한 흰 나비들이 이름모를 흰색 야생화에 앉아 오락가락 노닐고 있었다.
저네들도 이 곳이 조카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세조의 말년의 참회와 자책, 뿌리치기 힘든 정치적 야심이 얼키고 섥혀있는 복잡한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카의 왕위를 무력으로 찬탈하고 권력의 정점에 서서 평생 야망을 이룬 수양대군 세조, 그 앞에는 이제 무소불위의 권력과 포부가 놓여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야망을 실현한 달콤함보다는 어린 조카를 살해했다는 자책감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러한 정신적인 콤플렉스가 부스럼이라는 형태로 발병하게 되었는데 이 부스럼을 치유하기 위해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되는 임금의 신분임에도 팔도 방방곡곡 좋다는 곳은 빠지지 않고 요양차 돌아다닌 것으로 유명하다.
어느날 세조가 병 치유차 오대산에 다녀오는 길에 이곳 두물머리에서 하룻밤을 쉬어가게 되었는데 어디선가 바람에 실려 은은한 종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소리의 행적을 찾아보니 바로 이곳 동굴 속에 물이 떨어지는 소리였고, 이곳에서 18나한상이 발견되었기에 왕명으로 절을 짓고 은행나무를 심고 이름을 수종사라 하였다는 절의 유래에서도 보건대 말년의 세조의 참회의 정성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참회라... 사람들은 누구나 매일 매일 실수를 밥먹듯 할 수 있기에 그만큼 뉘우치기도 잘하지만 막상 잘못을 인정하고 서슴없이 제자리로 되돌린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닌 것같다.
문득 만약 말년의 세조에게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잘못을 바로 잡으라고 신이 기회를 주었다고 한다면 과연 세조는 과거로 돌아가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조카가 임금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까? 내 생각으로는 아마 말로는 참회한다지만 다시 옛날로 돌아간다면 또다시 똑같은 왕위찬탈의 행동을 반복하고 여전히 신에게 자기 행동의 명분과 정당성을 주장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마치 정치에 염증 느낀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권력의 주변에서 배회하는 기성 정치인들의 행적처럼 하면 할수록 빠져든다는 정치라는 것의 마약적인 속성이 빚어낸 중독 때문은 아닐른지….
수종사에 어김없이 서있는 거대한 은행나무의 뿌리만큼이나 얽히고 설킨 세조의 정치적 논리와 개인적 애증에 관해 추측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머리가 실타래 얼킨 듯 복잡해진다.
이렇게 머리 복잡할 때는 차가 제격이다.
더더구나 이런 빼어난 풍광 앞에서 맡는 은은한 차 향기는 더 말 할 나위가 없기에 일찍이 물맛이 빼어나기로 유명해서 여러 시인 묵객이 차를 마셨다는 수종사의 전력을 알려주는 찻집 삼정헌에 앉아 지리산 작설차가 들어 있는 대통에서 조심스럽게 차 잎을 꺼내 다기에 넣고 차를 우려내는 동안 무심히 유리창 너머 양수리 전경을 굽어보았다.
삼정헌 창가에 앉아 작설차를 마시다
장마 때라서 그런지 유독 진흙 물 색깔을 보이는 북한강과 그와 대비되는 파란 남한강의 물색깔이 뒤섞여 온통 진흙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갑자기 "까마귀 노니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라는 초등학교 때의 시조 한구절이 생각난다.
문득 시조처럼 맑은 물과 진흙물이 뒤섞인다고 해서 그 자체를 모두 진흙물이라 단정하는 방식이 위험한 발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뒤집어 생각하면 맑은 물과 진흙물이 섞임으로 인해 진흙물이 한층 맑아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그래, 세상 사는게 다 그런거지..."
아, 무심결에 또 이 말이 튀어나온다. 그래, 세상 사는게 어차피 다 그렇게 어울려져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라면 평범할망정 바르고 깨끗한 마음가짐을 지니며 살아가리라. 비록 이 세상이 그리 깨끗한 세상은 아니여서 적당히 뒤섞여 산다할지라도 스스로 바르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면 세상이 깨끗해지지는 못하지만 더 이상 더러워지지 않도록 중화시킬 수는 있지 않을까?
아니, 아직까지도 이 혼탁한 세상이 건재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착하게 살라는 부모님의 가르침을 늘 실천하며 평범하게 살고 있는 우리네 이웃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희망적인 확신을 가지면서 말이다.
"잔설과 이끼 낀 성긴 돌계단에 서서
돌아가는 사람 쌍을 이룬 것이 부럽지 않네
노승은 달과 함께 한가롭게 기대어 서고
마른 잎은 바람에 날려 창에 부딪히네
종소리만이 맑은 세상에 울리는데
누대의 그림자가 찬 강물에 떨어지네
행장 속에 산중의 물건이 아직 남아있어
가져 온 질그릇에 차를 달여 마신다"
(望水鍾寺 /홍현주)
오늘 따라 지리산 작설차의 향기는 멋진 양수리의 풍경과 함께 더욱 그윽해 보이고 이끼 낀 수종사 돌계단에서 만난 무심한 흰나비는 여전히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오락가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