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릉공원
선양[瀋陽(심양)]은 역사 유적지로 볼거리는 많지만, 날씨도 궂고 시간도 촉박했다. 선양은 청나라 초대 황제인 태조(누르하치)와 제2대 황제인 태종(홍타시)가 왕조의 기초를 다지면서 세웠다는 고궁(古宮), 그리고 태종과 그의 황후가 잠들어 있는 북릉공원(北陵公園)이 있다고 한다.
두 곳을 다 돌아볼 시간이 없어서, 고궁보다는 북릉공원이 볼만하다는 김 선생의 의견을 좇아 그곳을 찾았다.
그런데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장대비가 마구 쏟아졌다. 선양 시내 도로는 금세 하천처럼 물로 흥건했다. 문득 병자호란 때 볼모로 선양에 잡혀가면서 봉림대군이 읊었다는 시조 한 수가 나그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청석령 지났느냐 초하구가 어디인가
호풍도 차기도 차구나 궂은 비는 무슨 일인고
아무나 행색 그려내어 님 계신데 드리고쟈
북릉공원은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그 넓이가 자그마치 450만 평방미터라는데, 정문에서 직선으로 융은전(隆恩殿)까지 곧장 다녀오는 데도 한 시간은 더 걸렸다. 공원 안은 한여름의 녹음이 우거지고, 넓은 호수에는 날씨 탓인지 사람의 자취라고는 볼 수 없었다.
이곳에 누워있는 청 태종은 조선 인조 14년(서기 1636년)에 직접 12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그는 겨울철 결빙기를 타서 압록강을 건너, 조선 명장 임경업(林慶業)이 지키는 의주성을 피하여 파죽지세로 서울로 내리 닥쳤다.
인조 임금은 재빨리 남한산성으로 피했으나 곧 청군에게 포위되어 40여일 버티다가, 마침내 주화파 최명길의 의견에 좇아 청 태종에게 굴복하였다.
인조 임금은 한강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술잔을 받들어 항복하는 이른바, 성하지맹(城下之盟, 전쟁에 진 나라가 적국과 맺는 굴욕적인 강화의 맹약)을 맺는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스런 굴욕을 당했다.
청 태종은 이 자리에서 인조 대왕에게 군신의 예를 이행케 했다. 그는 인조 임금의 항복 문서를 받고도 못 미더워 두 왕자를 볼모로 데려가고, 척화 강경파인 삼학사 윤집, 오달제, 홍익한을 선양으로 데려다가 죽였다.
그때 이 선양[瀋陽]으로 끌려온 조상들은 얼마나 큰 고초와 굴욕을 당했을까? 사랑하던 두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보내고, 충성스런 신하마저 죽음의 길로 떠나보낸 인조대왕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나는 북릉공원 대리석 참도(參道, 북릉공원 정문에서 소릉까지 대리석으로 깔린 참배 길)를 거닐면서 청 태종에게 조금도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오랑캐라고 호령하다가 참형을 받고 이역에서 충혼이 된 삼학사들의 높은 절개를 기렸다.
예나 지금이나 국력이 약하면 이민족으로부터 침략을 당하고 백성들은 온갖 고초와 수모를 겪는다. 인류의 양심과 도덕은 성현의 말씀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서탑가
빈관으로 돌아오자 오후 5시 무렵인데 궂은 날씨 탓으로 어둠이 깃들였다. 마침 빈관 언저리가 조선족이 몰려 사는 서탑가(西塔街)라서 거리 곳곳에는 한글 간판이 홍수를 이루고 있었다.
두 분을 빈관으로 먼저 들게 하고 혼자 거리 산책을 했다. 이곳 거리는 마치 서울 청량리나 영등포 뒷골목을 연상케 했다.
현풍할매국밥집도, 청량리 순대국밥집, 한일관, 서울집, 서울노래방, 아리랑 커피하우스 등 온통 유흥업소로 어지러웠다.
거리의 가게에는 남대문 도깨비 시장처럼 온통 외제(주로 한국산) 상품들을 쌓아두고 팔았다. 서울에 있는 건 다 있어 보였다.
이 서탑가가 조선족 거리로 된 연유는 1930년대 항일투쟁으로 남편을 잃은 조선인 과부들이 이곳에다 국밥집을 열어 생긴 조선족 거리라고 했다.
마침〈조선문 서점〉이 눈에 띄기에 들렀다. 진열된 책들은 대부분 동북에서 발간되는 것들이었는데, 종이 질이나 인쇄가 거칠어 우리나라 1960년대 수준이었다.
서가에는 더러는 북한 책도, 한국의 책도 눈에 띄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낯익은 한국의 책을 폈더니, 한국에서 수입해서 온 책이 아니고 대부분 현지에서 찍어낸 해적판이었다.
북한의 금강산을 비롯한 명승고적 원색 화보가 탐이 났지만, 짐이 부담스러워 중국조선민족문학선집 외에 답사 목적에 맞는 몇 권만 샀다.
값을 치르고자 계산대 아가씨에게 돈을 건네자, 거스름돈이 부족하다면서 대신 <로동신문> 한 부를 주었다.
내가 받기를 주저하자 “선생님, 서울에서 오셨지요. 북조선도 알아야 균형 감각을 가져요”라면서 얼른 봉투 속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