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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적도 자갈 해수욕장에서
ⓒ 김은주
지난해 여름이었다. 휴가 날짜를 받아 놓고 섬으로 가리라 마음은 먹었는데 폭풍 소식이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갑자기 산이나 강으로 가겠다고 쉽게 마음이 바뀌지도 않았다.

할 수 없지, 비바람이 아무리 휘몰아친대도 배만 떠 준다면 무조건 떠나겠다고 작정을 했다. 다행히 제주도 언저리에서 태풍이 잠시 한숨을 돌리는 사이, 덕적도행 배에 오를 수 있었다.

▲ 파도에 동글동글 씻겨 나간 자갈들
ⓒ 김은주
바다 위에서 배는 요동을 쳤다. 파도가 한 번씩 밀려올 때마다 바이킹 타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려서 아주 혼이 났다. 덕적도는 인천에서 75km 떨어져 있는 섬이다. 덕적군도에서 가장 큰 섬이란다.

그 전날 파도가 높아 배가 뜨지 못해서 덕적도 선착장에는 발이 묶인 관광객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울릉도에 갔을 때 내가 직접 겪은 일이기도 해서, 그 사람들이 얼마나 초조했을지 이해가 갔다.

덕적도 주민은 천 명 안팎이라는데 여름 한철만 서울 사람들이 들어와 장사를 많이 한다고 했다. 민박집마다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서로 데리고 가려고 난리였는데, 배가 뜨지 않는 동안 장사를 공치는 바람에 임대료도 내지 못하게 생겼다고 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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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적도에 하나밖에 없는 학교, 덕적초중고등학교.
ⓒ 김은주
서포리 해수욕장에는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이 입술이 파래진 채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일상을 벗어난다는 것은 얼마나 달콤한 일인지. 이 섬에 하나밖에 없다는 덕적초중고등학교도 둘러보고, 북리 자갈 해수욕장에도 들렀다.

한갓진 섬을 어슬렁거리는 일은 언제까지라도 즐겁기만 할 것 같았다. 바닷가에서 쏟아지는 별을 보리라던 호언장담은 흐린 하늘 덕분에 헛장담이 되고 말았지만, 파도 소리를 끼고 잠드는 것 또한 무지하게 기꺼운 일이었다.

▲ 덕적도 교회로 들어가는 이쁜 길
ⓒ 김은주
다음 날, 진리 선착장으로 가서 굴업도행 배를 탔다. 1994년에 핵폐기물 처리장 후보지로 선정되는 바람에 찬반 여론이 갈려서 시끄러웠던 곳인데 지진대라고 판명이 나는 바람에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지킬 수 있게 되었다.

굴업도행 배에 함께 탔던 우편 배달부 아저씨는 배가 작은 섬들에 닿을 때마다 온갖 우편물들을 내리고 올리는 일을 반복했다. 편지는 물론이고 도시 사는 자식네가 보내 온 옷가지며, 먹을거리들이 오직 이 아저씨 손을 통해 전해지고 있었다. 아저씨를 반기는 섬 사람들의 웃음이 참 밝고도 환했던 기억이 새롭다.

▲ 저만치 선착장에서 사람들이 배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굴업도.
ⓒ 김은주
굴업도는 고작 10여세대가 살고 있는 아주 작은 섬이다. 섬이 작아서 자동차는 한 대도 없고 대신 경운기 몇 대가 유일한 운송 수단이다. 배에서 내린 사람들 짐을 실어나르는 것도, 산 너머 마을까지 손님들을 태우고 가는 것도 경운기가 다한다. 굴업 해수욕장 바로 근처에 있는 깨끗한 민박집에 짐을 풀고 종일을 바닷가에 나가 놀았다.

▲ 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굴업 해수욕장
ⓒ 김은주
언제 태풍 이야기가 있었냐는 듯, 거짓말처럼 맑게 개어 버린 하늘 덕분에 800m 백사장이 좁을세라 뛰어다녔다. 사람들이 넘치게 찾아오는 섬이 아니어서 바닷가를 통째로 전세낸 기분이었다. 낙원이 따로 있으랴.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그 힘에 몸을 맡기고 두둥실 떠오르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 일이었는지.

돌아와야 할 곳이 있다는 것이, 일상에 머무르기 위해 그 곳을 떠나와야 한다는 것이 며칠 동안의 여행을 더 찰지게 만들어주었던 것 같다. 꼬박 1년이 지나 다시 휴가철, 섬의 고즈넉함에 섞여들고 싶은 이들에게 덕적도와 굴업도를 권한다.

▲ 덕적도에서
ⓒ 김은주

▲ 매미는 목숨을 걸고 울어 대고....
ⓒ 김은주

▲ 굴업도의 경운기
ⓒ 김은주

▲ 저기 섬이 보인다!
ⓒ 김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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