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이 작열하는 지난 7월 6일 오후 1시.
서울 강동구에 자리잡은 주몽재활원 건물 옥상에 난데없이 검은 모직 코트의 사내가 등장했다. 그는 검은 선글래스로 눈을 가린 매트릭스의 네오. 감독의 사인을 기다리고 있다.
한 시간째 계속되는 촬영.
전화벨이 울릴 때 고개를 어느 쪽으로 돌려야 할 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전체 흐름을 아우르는 콘티는 없다. 현장에서 시행착오를 거쳐 완성할 뿐이다. 네오가 매트릭스의 세계로 들어가는 장면에서 좀처럼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지 않는다.
네오 역을 맡고 있는 하승철(23·뇌성마비)군의 얼굴에 어느새 송글송글 구슬땀이 맺힌다. 땀으로 척척 감기는 모직 코트를 금방이라도 벗어버릴 만도 한데 작은 움직임도 없이 감정을 잡고 있다.
카메라 감독과 작가의 눈빛이 오가고 '레디 고' 사인이 떨어지자 붉게 달아오른 네오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돈다. 일순 스태프들의 시선이 네오에게 쏠린다. 10번의 NG 끝에 터져나오는 박수 소리.
인터넷 방송국 '꿈샘방송'(이하 꿈샘 www.dnn.or.kr)의 제작현장은 7월의 더위보다 뜨거웠다. '꿈샘'은 중증 장애청소년 보호시설인 '주몽재활원' 원생들이 자발적으로 설립한 인터넷 방송이다.
지난해 5월. 10명의 친구들이 의기투합해 인터넷 방송 '꿈샘'을 설립했다.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은 '장애인 청소년 인터넷 방송'답게 여타 인터넷 방송에서 보기 어려운 소재와 시각을 만날 수 있다.
패러디 <매트릭스>의 메가폰을 잡고 있는 회장 유상희(19)군은 꿈샘이 여타 인터넷 방송과 차별성이 있냐는 질문에 마치 준비했던 답안을 읽어 내려가듯 생각을 막힘없이 풀어놓는다.
"다른 인터넷 방송은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어요. 작년에 꿈샘방송을 개국한 직후 저희 역시 보여주는 데 열중했거든요.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게 아니다 싶어요. 우리의 욕구와 세계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흔히 왜 방송을 하냐는 질문에 장애인들이 살기 편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답하잖아요. 하지만 우리는 아니에요. 무엇을 변화시키기보다는 단지 우리가 꿈꾸는 사회, 우리가 느끼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봐요."
주로 일상 속에서 프로그램의 아이템을 얻는다는 그들은 영화, 방송 등 대중매체에 민감하다. 개봉관에 걸리지도 않은 신작을 인터넷에서 다운받아 보고 다양한 정보를 수집해 다음 작품을 구상한다.
그들의 제작영역은 넓다. 패러디, 영화, 오락물, 다큐, 뮤직비디오까지 그들이 제작하지 못할 장르는 없다. 그들은 넘치는 의욕과 열정을 갖고 있다. 하지만 프로그램을 제작하며 느끼는 어려움은 남다르다.
부회장을 맡고 있는 박건희(20)군은 "무거운 장비를 옮기거나 촬영장소를 답사할 때 어려움이 많다"고 토로한다. 제작에 들어가면 꼬박 1주일 동안 강행군을 하는 데다, 체력이 약한 장애인들에겐 그것이 큰 여파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벌써 두 시간째다.
네오와 요원이 격돌하는 장면에서 네오의 통쾌한 발차기가 나오지 않는다. 이를 피하는 요원의 동작도 좀 어색하다. 거듭되는 NG에 NG… 네오는 수도 없이 넘어지고 발길질하는 요원은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두 번째 결투장면에서 다시 브레이크가 걸리며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그래도 어느 누구 하나 대충 찍고 끝내자는 불평 한마디 없다. 정석으로 가야 좋은 작품을 찍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올해로 4년째 자신의 손끝으로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는 건희군은 화려한 수상 경력을 가지고 있다. 작년까지 제작본부장으로 '꿈샘'을 이끌어왔던 건희군의 첫 작품은 <동화 만들기>다.
이 작품은 2001년도 청소년미디어대전에서 '한국방송진흥원상'을 받았다. 작년에는 장애인영화제 시나리오 공모전에 출품한 작품이 당선되기도 했다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대한 문제를 다루었어요. 사람들은 장애인들이 자신의 아픔이나 성격 때문에 사회와 단절되고 고립되어 간다고 봐요. 하지만 장애인들이 겪어야 하는 소외와 편견은 일반인들의 그릇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잖아요."
여덟 살 때부터 근육병을 앓고 있는 건희는 '꿈샘' 동아리의 맏형이다. 올해 상희에게 회장 자리를 넘겨준 건희는 수년 동안 동아리를 이끌어 왔다. 그래서일까. 4년 경력이 입증하듯 그는 촬영장 전체를 조망하는 시각을 갖고 있었다.
"아직 상희가 전체 친구들을 통솔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요. 올해 제 역할은 상희가 회장으로서 바로 서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아이들도 잘 따라주었으면 하고요. 아이들이 초심을 잃지 않고, 아프지도 않고, 지금처럼 열심히 같이 갔으면 해요."
동생들 얘기를 꺼내자 그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무엇이 아이들에게 타인을 품을 넉넉한 가슴을 준 것일까. 그들은 한 쪽 날갯죽지가 찢어졌지만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어두운 골방, 자신의 독무대에서 작아져만 갔던 아이들이 하나의 꿈을 향해 보폭을 맞출 수 있게 된 것이다. 조금 늦더라도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내딛는 힘을 어느새 알아버린 것이다.
"웃음을 만들고 싶어요"
꿈샘 친구들은 그 나이 또래가 구사할 수 있는 언어와 사고의 깊이를 훌쩍 뛰어넘고 있다. 자신의 일상을 통제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것이다.
이미 너무 많은 세상의 단면들을 경험해서일까 아니면 장애로 인해 받게 된 차별이 주는 반대급부였을까. '영상이 자신들에게 어떤 의미인가'라는 다소 생뚱맞은 질문에 "영상은 자유 그 자체"라는 답변이 되돌아왔다.
꿈이 화가인 이옥동(18)군은 느리고 어눌하지만 야무지게 대답한다.
"자기표현이에요. 전에는 불만이 생기면 속으로 꾹꾹 눌렀는데 이제는 모든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됐어요. 머릿 속으로만 떠오르던 생각들을 다 풀어놓게 된 거예요.
영상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돈이나 명예가 될 수 있잖아요. 하지만 저에겐 그렇지 않아요.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내 속에서 하는 얘기를 꺼내놓기 위해서 제작에 참여하는 거죠. 나를 표현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는 거잖아요."
<매트릭스2 리로리드>를 패러디한 <매트릭스>는 어쩌면 이러한 '꿈샘'친구들의 바람을 오롯이 품고있는 작품일지 모른다. 그들은 작년에 이어 매트릭스 시리즈를 패러디하고 있다. 왜 이 작품에 이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매트릭스 패러디 버전의 줄거리 속에 대답은 이미 숨겨져 있다.
패러디 버전은 평범한 장애인이 자신의 진정한 자유를 찾기 위해 매트릭스의 세계로 들어가 '키메이커'를 찾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 평범한 장애인은 바로 그들 현재 모습을 반영하는 것일터. 그들에게 있어 방송은 신나게 놀 수 있는 놀이터인 듯 했다. 카메라는 반복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고 창조할 수 있는 마술봉이고, 카메라가 잡아내는 프레임 안은 그들이 꿈꿔온 현실 보다 더 현실같은 가상현실, 매트릭스였다.
그렇다면 가상현실에 접속해 찾는 키메이커는 무엇일까. 더위에 지쳐 슬슬 그늘을 찾기 시작하는 기자와 달리 아이들은 못박힌 듯 그늘 한 점 없는 옥상에서 몇 시간 째 촬영을 이어가고 있었다. 넌지시 '힘들지 않아요'라고 물으면 말간 웃음을 띠며 재밌다고 한다. 피부 속까지 태울 듯한 더위 속에서 스스로가 "즐기지 않으면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그들은 체득한 것이다.
'어떤 장르를 꼭 해보고 싶냐'는 질문에 종합 오락프로그램과 시트콤을 꼽는다. 그들이 제작해 온 작품들이 비교적 장애인들의 일상을 담거나 사회성이 가미된 다큐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의외의 답변이다.
시트콤을 제작하고 싶다는 상희군은 "일반인들이 장애인하면 우울하고 암울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데, 밝고 명랑한 영상을 통해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싶다"고 말한다.
장애는 선택의 여지없이 다가온다.
차이가 차별의 근거가 되는 사회에서 사회의 편견과 차별은 그들에겐 억압이다. 그것은 장애인들이 삶의 형태를 선택할 가능성과 의지를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일반인들이 만들어놓은 편견과 차별의 벽을 뛰어넘고 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모든 변화의 단초가 되었듯이 변화의 지점은 여기 그들에게 있다.
"웃음을 통해 장애인들도 밝고 명랑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하는 그들 속에서 이미 변화는 일고 있다. 그 변화의 시작은 웃음이었고, 그것이 아이들을 자라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