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보리 이삭 패서 누렇게 익어가던 망종 무렵은 아름다운 고향 들녘에서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그 때는 보리쌀 마저 떨어져 시일을 다퉈 수확해야 굶지 않고 살았던 힘든 시절이었다. 그런 삶이 70년대 말까지 이어졌다. 아이들은 보리가 익기 며칠 전 보리를 꼬실라 먹었다. 이젠 그 풍경도 접하기 힘들고 밀, 보리를 불에 구워 먹기도 힘들게 먼 옛날 이야기다.
어머니께서는 보리쌀 마저 떨어져 자주 옆집으로 꾸러 다니셨다. 됫박 하나 들고 집을 나서는 힘없는 여인의 모습을 지켜보던 어린 나마저 힘겨웠다. 꼬깃꼬깃 누런 됫박을 들고나서는 어머니를 몇 번이나 뵈었을까?
“엄마, 어디가세요?”
“응, 집에 쌀이 떨어져서….”
쌀이 떨어진 게 아니다. 쌀은 애초에 없고 보리가 없는 것이다. 보리쌀 마저 없으니 이웃집에 빌리러 가야하는 참담한 상황에 처한 것이다. 보리쌀 마저 없었다면 나는 굶어 죽었을 지도 모른다.
까만 줄 쫙쫙 그어진 그 보리쌀로 만든 밥은 ‘무시밥’이나 매한가지로 방귀 죽죽 나오게 하는, 드러내놓고는 못 먹는 밥이다. 다섯 살 위 누나도 보리밥을 곧잘 했다.
정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둠침침하고 나지막한 설강에 그릇들이 차곡차곡 포개져 있다. 그릇 마다 무척 크다. 간장 종지, 양념 통이 무리 지어 있다. 솥 단지는 달랑 두 개다. 설거지통엔 물이 가득 들어 있다. 뒤뜰로 나가자 ‘확독’에 보리쌀 몇 개 박혀있다.
보리밥은 ‘겉보리’ 보다 훨씬 도톰한 ‘쌀보리’를 찧어 밥을 짓는다. 그 땐 보리쌀의 흰 겨가 얼마나 만지기 싫었는지 모른다. 손에 만져지는 그 느낌을 아직 잊을 수 없다.
다음날 아침밥을 먹기 위해서 미리 잘 퍼지지 않는 보리쌀을 불려 놓아야 하는 수고까지 해야했다. 보리 한 되를 뒤뜰 확독으로 가져간다. 물을 붓고 5분 가량 득득 갈아준다. 까만 ‘볼태기’ 씨앗이 몇 개 섞여 있다. 적당히 갈아졌으면 퍼서 솥에 한소끔 끓였다가 물에 담가 불린다. 밥할 준비를 마친 셈이다. 다음날 보면 거의 두 배로 탱탱 불어있다.
아버지 몫으로 꼭꼭 숨겨둔 한 줌 멥쌀을 씻는다. 바닥에 보리쌀을 깔고 그 위에 쌀을 한 움큼 조심히 올려 뚜껑 닫고 불을 때면 된다. 정지 한 켠에 모아둔 잘 마른 나무 덕에 밥 짓는 건 어린 나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솥단지 안에서 보글보글, 뽀글뽀글 거품이 밖으로 기어 나오면 나무 넣기를 줄이고 유심히 살펴보다가 마른 김이 나면 ‘부삭’(아궁이) 안에 있던 잉걸을 재빨리 밖으로 꺼내 불 조절을 한다.
20여분 푹 퍼지기를 기다렸다가 불을 다시 집어넣고 나뭇잎 등 ‘검부적’ 조금으로 한 번 불을 살짝 때주면 밥 하기는 끝마친 것이다. 피식 소리를 내며 안에 남아있던 수분 마저 빠져 나온다.
2~3분 기다렸다가 뚜껑을 열고 흥부 뺨 때렸던 기다란 주걱으로 처음엔 아버지 드실 쌀만 휘휘 저어 흔들어 한 그릇 퍼 놓고 나머지는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휘저어 마구 뒤섞는다. 밥 푸기를 마치고 물 한 됫박 붓고 주걱으로 득득 문질러 놓고 불 한 번 싸게 때면 진짜 맛난 누룽지가 만들어졌다.
고봉으로 퍼 놓은 꽁보리밥이 여덟 그릇이나 올려져 있다. 김치에 간장, 된장, 멸치 고추조림, 된장국이 차려졌다. 간혹 호박잎이 올라오는 날에는 게 눈 감추듯 한다. 숭늉을 찾는지라 그새 어머니나 누이는 쪽문을 통해 부엌으로 가 솥바닥을 쭉쭉 밀 듯 문대서 누룽지를 양푼에 가득 퍼 온다.
“오늘은 누른 밥 참 꼬습고 맛있네!”
“후후” 불어가며 “후루룩” 소리내며 떠먹는 풍경이 어찌나 보기 좋던지.
집에서는 그 맛있고 하얗던 밥이 학교에 싸 가면 어찌나 까맣던지 도시락 뚜껑 열기가 겁났다. 선생님께서는 문교부 시책만 달달 외며 혼식(混食)을 말씀하셨다. 얼마나 밉던지.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우린 다들 꽁보리밥을 싸왔다. 풋고추 다섯 개에 된장 싸온 그날이 그립기만 하다.
그래도 난 그 맛을 잊지 못한다. 누룽지는 보리쌀로 해야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