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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뇽축제를 알리는 포스터, 그러나 축제는 막을 올리지 못했다
아비뇽축제를 알리는 포스터, 그러나 축제는 막을 올리지 못했다 ⓒ 아비뇽축제
지난 6월초, 라파랭(Raffarin) 프랑스 총리는 '연금 개혁'이 불러온 범국민적 항의 시위를 무마하기 위해 2600만 가구를 대상으로 편지를 보낸 일이 있다. 분명 2600만 가구다. 그러나 주변에서 이 편지를 받았다는 사람이 없다. 왜 그랬을까. 대답은 '우체부가 파업 중이었으니까'. 요즘 떠도는 농담이다.

파업이 없는 5월은 5월이 아니라고 했던가. 프랑스의 5월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연금개혁 항의 시위를 시작으로 교사 시위, 이어서 터진 문화예술 부문 비정규직 노동자(이하 문예비정규직자) 시위까지 프랑스 정부는 잠시 숨을 돌릴 여유조차 없어 보인다.

지난 6월 27일, 프랑스민주노동동맹(CFDT), 프랑스기독교노동자동맹(CFTC), 관리직총연합회(CGC) 등 3개 소수파 노조와 고용주협회가 새로운 문예비정규직자 실업수당 제도 개정안에 합의하고 7월 1일 쟝-쟈끄 아야공(Jean-jacques Aillagon) 문화부장관이 개정안을 공식 발표, 즉각적인 시행에 들어갈 것임을 시사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정부 실업수당제 개정안 발표, 문예 비정규직자들에게는 노예문서

상공업고용촉진협회(ASSEDIC)에 따르면 2002년 실업보험을 납부하는 문예비정규직자(아티스트, 공연기술자, 영화계 종사자 포함)가 13만5천명에 달하며 이중 단 한 번이라도 실업수당 혜택을 받은 사람이 10만2600명인 것으로 조사돼 2002년 한 해 8억2800만 유로(euro, 한화 2조원 상당)의 적자를 기록했다고 한다.

2003년 10월부터 적용될 개정안은 문예비정규직자들의 사회분담금을 2배로 인상함으로써 2억600만 유로를 절감하겠다는 계산에서 나온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11개월 동안 최소 507시간 이상 문화예술 관련 행사에 참여해야만 온전히 실업수당을 챙길 수 있던 것을 개정안은 8개월로 축소했다.

문예비정규직자 입장에서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우선 이들을 왜 비정규직이라고 부르는가.

지난 6월 29일 쟝고라인하르트 재즈축제, 파업사태를 피해간 올해의 마지막 축제로 기록
지난 6월 29일 쟝고라인하르트 재즈축제, 파업사태를 피해간 올해의 마지막 축제로 기록 ⓒ 박영신
공연 문화 행사에 종사는 하고 있지만 매일같이 공연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공연이 없으면 이들은 실업자나 매한가지인데 11개월 동안 507시간을 순전히 문화예술 분야에서만 일하기도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개정안에 따라 8개월 동안 규정된 507시간을 채울 수 없는 노동자들은 고용주들과 노동시간을 흥정하거나 심지어는 무료로 노동을 제공해야 하는 사태까지 유발할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나마 문예비정규직자의 지위를 인정받아 실업수당을 받고 있는 이들도 전체 문예종사자의 3-40%에 불과하다. 또 극장 청소부라든가 유명연예인의 운전수처럼 실질적으로 문예노동자라고 판단하기 어려운 이들이 법을 악용해 그 3-40%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번 개정안은 문예비정규직자들에게는 말 그대로 '노예문서'로서 문예비정규직자들의 허약한 경제 상태를 악화시키는 결과만 초래할 것이라고 개정안 합의를 거부한 노조 노동자의 힘(FO)과 노동총동맹(CGT)은 평가하고 있다.

자신들의 미래가 걸린 실업수당 개정안에 굴복할 수 없었던 문예비정규직자들은 2일부터 실력행사를 감행했으며 문화부장관은 초기 일주일 동안 3차례에 걸쳐 노조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결렬됐다.

반작용으로 곳곳에서 각종 공연과 행사들이 파행 운영되거나 취소되는 사태까지 발생하면서 프랑스는 문화대공황 사태를 맞았고 여름 대축제인 아비뇽(Avignon)축제 개막일을 며칠 앞둔 지난 5, 6, 7일은 각계의 우려가 도출되면서 비상국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지난 7월 5일 플로랄공원에서 열린 파리재즈축제 중, 쟝 필립 비레 트리오가 관객들에게 문예비정규직노동자 투쟁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지난 7월 5일 플로랄공원에서 열린 파리재즈축제 중, 쟝 필립 비레 트리오가 관객들에게 문예비정규직노동자 투쟁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 박영신
세계 최고 연극제 아비뇽축제 무산, 전국에서 문화행사 취소 사태 이어져

아비뇽(Avignon)축제는 결국 취소됐다. 축제 개막 하루 전인 7일 월요일, 문화부 장관이 2003년 말까지 문예비정규직자 실업수당제 현행유지와 개정안을 2005년부터 시행하는 대체법안을 제안했으나 '우리가 원하는 것은 기간 연장이 아니라 개정안의 조건없는 철회'라며 완강한 입장을 밝힌 노조와 협의점을 찾지 못해, 축제 개막 당일인 8일로 계획됐던 대규모 파업과 시위가 강행된 것이다.

마침내 7월 10일 베르나르 패브르 다르씨에(Bernard Faivre d'Arcier) 축제감독이 공식 기자회견에서 '유감스럽게도 제 57회 아비뇽축제는 개최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축제는 시작도 하기 전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다르씨에는 이미 7월 5일자 일간지 르몽드(Le Monde)를 통해 개정안의 무조건적인 철회를 요구한 바 있다.

'아비뇽축제가 취소되면서 가장 피해를 본 쪽은 문예비정규직자들이다. 아비뇽 상인들이 입을 피해는 문예비정규직자들의 미래 앞에서 미미할 뿐'이라고 다르씨에 다음으로 단상에 오른 노동총동맹의 미셸 고트랑(Michel Gautherin)은 역설했다.

이보다 앞선 7월 2일 르몽드와 가진 인터뷰에서 연극연출가 빠트리스 셰로(Patrice Chereau)가 '아비뇽축제를 보이콧하는 것은 자살행위'라며 만약 올해 행사가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한다면 '앞으로 2년 동안 아비뇽축제가 회생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프랑스 문화계에서 아비뇽축제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인식돼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부장관은 수요일 '프랑스 문화에서 무시할 수 없는 축제들을 볼모로 잡는 것은 결코 허용할 수 없다'며 강경한 입장만을 되풀이했다.

1947년 배우 쟝 빌라르(Jean Vilar)에 의해 시작된 아비뇽축제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연극축제로 1968년 5월 혁명의 혼란 속에서도 멈춤없이 계속돼왔다. 역사상 처음으로 올해 축제가 취소된 것.

지난 7월 6일 세느강가 바또 파에서 열린 인도음악축제 '세느의 인도', 한해동안 개최되는 800여 문화행사 중 600여개가 6-10월에 집중돼 있을만큼 프랑스의 여름은 축제의 계절이다.
지난 7월 6일 세느강가 바또 파에서 열린 인도음악축제 '세느의 인도', 한해동안 개최되는 800여 문화행사 중 600여개가 6-10월에 집중돼 있을만큼 프랑스의 여름은 축제의 계절이다. ⓒ 박영신
7월 9일 수요일에는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에서도 제 55회 국제오페라축제가 무산됐다. 같은 날 라로셸(La Rochelle)의 프랑코폴리(Francofolies) 축제와 뚜르(Tours)거리축제도 취소를 알렸으며 파리와 리용 오페라를 비롯해 프랑스 전역에서 다수의 공연이 연기되거나 취소되는 사태가 줄을 이었다.

7일 저녁 파리의 벡시(Bercy)에서 열린 롤링스톤즈(Rolling Stones) 공연도 파행적으로 진행됐다. 무대시설과 조명, 음향 담당 기술자들이 작업을 거부해, 공연 주최측은 급히 90명의 기술자를 대치했으며 이어진 수요일 프랑스스타디움 공연에서는 아예 시위대들이 공연에 초청되기도 했다.

예정대로 진행된 다른 공연에서도 아티스트들은 관객들에게 문예비정규직자들과 함께 할 것을 독려하는 내용의 연설을 빠뜨리지 않았다. 비엔느(Vienne)재즈축제와 앙쥬(Anjou)연극축제, 뻬르피냥(Perpignan)여름축제도 개막이 불투명한 상태다.

문화예술직 파업의 여파는 영화계도 피해갈 수 없었다. 지난 9일 잭 니콜슨(Jack Nicholson), 키에누 리브스(Keanu Reeves), 다이안 키튼(Diane Keaton) 주연의 낸시 마이어스(Nancy Meyers, What women want의 감독)의 새영화 촬영이 있던 파리에서는 샤뜰레(Chatelet)에서 집회를 마친 650여명의 문예비정규직자들이 몰려들어 혼선을 빚었는데 니콜슨은 여기서 이들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흥분한 시위대와 대화는 불가능했다고 AFP 통신은 전했다.

영화는 단역배우, 기술자 등 300여명의 노동자들과 11일까지 총 12일 동안 촬영이 계획됐으나 이번 사건으로 불가피하게 기간을 연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에게는 <타인의 취향>(Le gout des autres)으로 알려진 아녜스 자우이(Agnes Jaoui) 감독은 또 시위대에 합류하기 위해 그녀의 두번째 장편영화 촬영을 포기했으며 관객들에게 문예비정규직자들과 연대할 것을 촉구하면서 솔베이그 앤스패치(Solveig Anspach) 감독은 자신의 영화 'Stormy weather' 시사회를 취소하기도 했다.

7.14 중대발표 앞둔 시라크, 문예비정규직 파업에 여론은 대체로 호의적

이처럼 전쟁과도 같은 축제 난국이 전프랑스를 휩쓸고 있는 가운데 지난 11일 금요일 라파랭 총리가 드디어 침묵을 깨고 정부의 입장을 밝혔다. '문화는 우리 모두의 것이고 우리 모두가 공유해야 하는 것'이라고 입을 연 총리는 일련의 축제 취소 사태들로 '얼마나 많은 문화예술인들과 관객들이 실망하고 상처받았는지 잘 알고 있다'면서 그러나 '프랑스는 문화를 제외하고는 진보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올해로 제 24회를 맞은 쟝고라인하르트 재즈축제에는 쟝고 사망 50주년을 기념해 유난히 많은 뮤지션들이 모여들었다
올해로 제 24회를 맞은 쟝고라인하르트 재즈축제에는 쟝고 사망 50주년을 기념해 유난히 많은 뮤지션들이 모여들었다 ⓒ 박영신
문예비정규직자 파업으로 초래된 적자를 만회하기 위해 1500만 유로(한화 200억원 상당) 지원 계획을 밝힌 총리는 아울러 오는 9월 국가문화고용회의에서 아티스트들을 더 이상 불안정한 작업조건에 방치하지 않기 위해 문화예술직 안정화 대책을 논의하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이것도 문화예술계 당사자들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며 대통령이 직접 나서 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총리에 앞서 지난 10일 쟈끄 시라크(Jacques Chirac) 프랑스 대통령은 오는 7월 14일 국경일을 기해 연금개혁과 교육지방분권, 문화대책이 포함된 사회보장제도와 관련해 중대발표를 할 것으로 알려져 전 국민의 기대가 7.14에 몰려 있는 상태다.

한편, 지난 7월 5일 발표된 여론조사기관 IFOP의 통계자료를 보면 프랑스의 여름축제가 희생되는 한이 있더라도 문예비정규직자들의 파업은 정당하다고 대답한 프랑스인이 64%에 달했으며 79%는 실업수당제도의 현행 유지를 옹호했었다.

그러나 프랑스 3대 여름축제-아비뇽축제, 프랑코폴리, 엑상프로방스축제-가 줄줄이 무산되는 상황에서 프랑스인들의 생각도 조금은 바뀐 듯 하다. 12일 토요일자 일간지 르빠리지앙(Le parisien)에 의하면 프랑스인 2명 중의 1명(51%)이 '문예비정규직자들이 너무 멀리 간다'고 대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프랑스에는 1년 한해 대략 800여개의 축제와 문화행사가 개최되며 그중 600여 행사가 6월에서 10월 사이에 집중돼 있다. 매년 5월 1일 테크니발(Teknival)이 여름의 시작을 알리듯 프랑스의 여름은 축제의 계절이다.

한낮의 태양 아래 특히 야외에서 크고 작은 축제들이 펼쳐져 더위도 잊은채 축제에 푹 빠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남아있는 행사들마저 정상적인 개최가 불확실한 올해, 프랑스의 여름은 무척 더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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