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1999년 8월 1일(일) 마침내 중국 일대 항일 유적지 답사 길에 올랐다. 우리 일행이 첫 기착지를 베이징(北京)으로 삼은 것은 이곳이 중국으로 가는 교통 요충지일 뿐 아니라, 독립운동 원로인 이태형(李泰衡) 선생을 찾아뵙고 그분의 인생 역정과 독립운동에 대한 증언을 듣고자 함이었다.
서울발 베이징행 아시아나 여객기는 김포공항을 이륙한 지 두 시간 후 베이징공항에 사뿐히 내렸다. 베이징 시내 빈관에 여장을 풀고는 곧장 베이징 교외에 있는 만리장성과 명13릉을 다녀왔다.
8월 2일(월) 오전 8시에 우리 일행이 머물고 있는 빈관까지 이태형 선생 손자 내외가 승용차를 몰고 영접하러 왔다. 우리 일행은 손자 내외의 안내로 베이징시 해정구에 있는 이태형 선생의 아파트로 찾아갔다.
손자 내외는 우리 일행을 위해 그 날 하루 직장에서 휴가까지 받았다면서 고국에서 온 손님을 위하여 정성을 다하는 마음이 역력했다.
아파트는 10여 층 고층으로 서울의 아파트보다는 좀 칙칙했지만, 이곳에서는 고급 아파트로 상류층이 산다고 했다. 이태형 선생의 아들 이대만(李大万)씨는 중국 정부의 고위층으로 정년 퇴직하였기에, 지금은 편안한 노후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공무원이 정년퇴직을 해도 현직 때와 똑같은 대우와 연금을 받고, 1945년 8월 3일 이전에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국가를 위해 봉사하다 퇴직한 사람은 한 달 보름치의 연금을 더 줘서 매달 115 퍼센트를 받는다고 한다.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복무원 아가씨가 깍듯이 절하며 인사를 했다.
이런 복무원들이 엘리베이터마다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일이라 얼떨떨 했다. 어찌 보면 인력 낭비로 볼 수 있겠으나, 국가유공자에 대한 예우 차원과 한편으로는 실업 인구를 줄이기 위한 한 방안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파트에 이르자 온 식구가 문 앞에 나와서 우리 일행을 맞아 주었다. 4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제 집안으로, 어린아이부터 아흔 살 노인까지 함께 살고 있었다. 손자까지는 우리말로 인사를 했지만 4대 증손들은 중국말로 인사했다.
아랫대로 내려갈수록 중국에 더욱 동화하는가 보다. 어쨌든 한 집안에서 4대가 오순도순 사는 대가족제의 전형을 보아서 못내 흐뭇했다. 이태형 선생은 아흔의 나이답지 않게 정정했고 깨끔했다.
왕년에 만주 벌판을 누비던 독립투사의 모습이라기보다 인정 많고 덕이 높은 곱살한 노인의 풍모였다. 이미 마련된 과일과 차를 들고는 소파로 가서 대담을 나눴다.
"요즘에는 가는 귀도 먹고 기억력도 쇠퇴하여 인명이나 지명도 오락가락해서 별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산 귀신이나 다름없지요. 왜정 때 내가 한 일이라고는 석주 선생을 비롯한 어른들 일하시는데 먹줄 잡는 심부름 정도밖에 한 일이 없어요."
첫 마디부터 당신은 별로 한 일이 없다고 겸손하게 말씀했다. 당신의 손자뻘 되는 나는 돋보기 안경을 끼고 기록하는데 춘추 93세인 당신은 안경을 끼지 않은 채, 내 기록을 보완해 주셨다.
원로 독립운동가의 증언
나는 1907년 경북 안동 용상동에서 태어났다. 만 6세 되던 1913년에 우리 가족(부모, 조모)네 식구는 고향을 떠나 만주로 왔다. 그때 우리는 한일 합방 후 왜놈을 피한 삼피(三避: 세 번째 피난) 행렬이었다.일피(一避)는 합방 이듬해인 1911년 1월에 석주 선생이 인솔한 행렬이었고, 그 이듬해 이피(二避) 행렬이 이어졌다.
우리 가족은 안동에서 김천으로 가서 거기서 기차를 타고 경성에 도착한 후 일박하고, 만주행 기차를 타서 의주를 지나 단동에서 내렸다. 그 곳에서는 네 바퀴 마차를 타고 육로로 통화현에 도착하자 먼저 도착해서 을밀에서 살고 있던 외사촌 배재형(裵在衡, 후일 신흥무관학교 교관)형이 마중을 나와서 외가에서 며칠을 묵었다.
거기서 모저구(母猪泃)란 곳으로 가서 노래민(老來民, 오래 전에 이주해온 조선족)의 도움으로 밭을 얻어 한 해 농사를 지었다. 그때 만주에는 벼농사는 없었고 순전히 밭농사만 하였는데, 평지는 토지 얻기가 힘들어 원시림으로 우거진 산비탈을 개간하여 불을 놓아 화전을 이룬 후 감자 보리 옥수수를 심었다.
우리 가족은 살 집이 없어서 틀방 집을 지었는데 통나무를 우물 정(井)자로 쌓고 지붕은 돌이끼로 덮었다. 이듬해 다시 거기서 100리 거리 떨어진 청구(靑泃)로 이사했다. 이곳은 파저강(波猪江) 상류로 합니하 신흥학교와 멀지 않았다.
8세 때 그곳에 있는 동진소학교에 입학했다. 마을에 조선사람이 40~50호 살았는데 비록 망명 생활이었지만, 교육열은 대단해서 조선 사람이 사는 마을에는 으레 학교가 있기 마련이었다.
이곳에서도 틀방집을 짓고 살면서 밭농사를 했다. 특히 메밀이 잘 되었는데 풀밭에 '미친 놈 널 뛰듯' 메밀을 뿌려도 생명력이 강해서 잘 자랐다. 메밀은 겨울 양식으로 요긴해서 국수를 뽑아 많이 먹었다.
만주는 워낙 땅이 넓은 곳이라 집이 드문드문 들어섰고 집집마다 가축을 많이 길렀다. 우리 집도 닭은 수백 수 길렀는데 농사지은 강냉이로 사료를 줬다. 손님이 오면 닭을 잡아 대접했고, 계란은 아이들 군것질로 많이 먹었는데 실이나 삼으로 계란을 칭칭 감아서 구워서 먹기도 했다.
그때 만주에는 석유와 소금이 귀해서 밤에는 전나무 뿌리를 캐서 불을 붙여 등잔불로 대신했고, 강냉이 한 짐과 소금 한 줌을 바꿨다.
그 이듬해 다시 거기서 80리 정도 떨어진 마록구(馬鹿泃)로 이사해서 조선 사람이 세운 협창학교에 다니다가 12세 되던 1918년에 졸업했다. 1919년 해룡현(海龍縣)의 동흥학교 고등과(초등학교 5~6년 과정)에 입학했다. 거기서 오광선 선생을 만났는데 대단한 민족혼을 지닌 분이었다. 그분은 뒤에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부임해서 많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그 이듬해는 1920년, 바로 경신참변의 해였다. 일본군 토벌대가 덮쳐 온다는 기별을 받고 도망 다녔다. 나는 나이가 어려서 선망했던 신흥무관학교에 끝내 입학하지 못했다.
16세 되던 1921년 다시 길림성 액목현(額穆縣)으로 이사했는데, 나는 혼자 화전(樺甸) 만량하(萬兩河)에 있는 석주 선생 아드님 동구(東邱)공으로부터 한문과 조선독립 교육을 받았다.
당시 석주 선생은 서로군정서 독판이었는데 어느 하루 신흥무관학교 교관이던 김창환(金昌煥) 선생에게 의용대장을 임명할 때, 내가 먹을 갈아드리고 그 임명장 수여식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김창환 선생은 구한국시대부터 교관으로 목청이 대단히 좋아서 구령을 하면 산천이 울리는 분이었다.
석주 선생이 그분에게 임명장을 주면서 주의한 바, "첫째 중앙기관의 지시없이 동포로부터 의연금 모금을 절대하지 말 것이요, 둘째 '대동 통일'이니 '작전 연락'이니 따위의 명의로 중앙기관의 지시없이는 일체 회의 참가를 못한다"라고 지시하는 걸 목격했다.
그 뒤 석주 선생이 상해임시정부 국무령으로 가실 때까지 곁에서 도와드리고 이듬해 상하이에서 돌아오신 후, 운명하실 때까지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석주 선생은 대인 풍모로 안광이 매우 빛났으며 앉은 키가 보통사람보다 더 컸다.
임시정부 국무령으로 추대 받아 상하이(上海)로 가는 데 그때 이광민씨가 수행했다. 다롄(大連)에서 일본 관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상인으로 가장하여 영국 상선을 타고 갔다.
나는 일송 선생이 세운 백서농장에도 직접 가 본 적이 있는데 그곳은 아주 험한 산골로 둔전제를 실시했다. 독립운동을 위한 원대한 계획으로 산지를 개발하여 논을 만들어 벼농사를 보급했다. 지금 동북지방에는 논이 없는 곳이 없을 만큼 벼농사가 보급되었는데 이는 모두 우리 조선족들이 보급한 것이다.
내가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한 후의 심경을 묻자 노 독립운동가는 말을 잇지를 못한다. 한참 만에야 말문을 열었다.
처음에는 해방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간악한 일본놈들이 거꾸러져서 얼마나 시원하고 통쾌한 지 그저 춤을 추고 싶도록 좋았다. 우리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해서 나라를 세울 줄 알았는데, 미군 당국이 임시정부를 인정치 않고, 그들의 귀국도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그때 심정을 어찌 말로 할 수 있겠는가? 얼마 가지 않아 강대국이 시루떡 자르듯 38선을 만들고, 남조선에서는 이승만씨가 단정을 주장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이승만씨는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재직하면서, 조선을 미국에 위임 통치 하에 둘 것을 청원하다 당시에 임시정부 의정원으로부터 불신임 탄핵을 받아 물러난 인물이라 대단히 우려했다. 곧 그 우려가 사실로 드러나서 마침내 조국이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싸우고 있으니 ….
해방이 되면 중국 땅에 살았던 우리 동포들은 으레 고국 땅을 밟을 줄 알았는데 …. 그래서 우리 가족은 귀국도 못하고 이곳에서 정착한 것이다. 해방 50년이 되던 해 소감을 써둔 게 있다.
조국 통일 승리 만세!
― 해방 쉰 돌을 맞으며―
오늘은 해방 쉰 돌이 되는 날이다.
참으로 화살같이 빠른 것이 세월이구나!
해방하던 날 태어난 아이가 수염이 가로 뻐드러지고
정정하던 장년도 구부러진 허리에 백발이 휘날린다.
어른들은 진정한 해방 고개를 넘는다고 오르고 오르다가 기진 맥진
원한과 한 가닥 희망을 품은 채 저 먼 곳으로 가시고
새로 태어난 아이들은 우리나라가 본래 동강난 강토 위에 이렇게 살았나
철모르고 자라고 있다.
본 세기의 8월(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1945년 8월 15일 해방)은 우리 겨레에게 비희극(悲喜劇)을 갖다주었고
세계 제2차대전의 결말은 또한 희비극(喜悲劇)을 남겼다.
세기말에 가서는 희극만 남겨 주려느냐.
강대국들이 자국의 지리상 그어놓은 17, 38선이
칼로 시루떡 나눠먹듯 금을 그어놓고
화약 폭발 도화선으로 백분 이용만 하였다.
이 무슨 노름판의 장난이더냐?
이족(異族)에게 짓밟혔다가 이름만이라도 해방을 얻었으니
산 좋고 물 맑은 살기 좋은 강산에서 오순도순 살아야 할
같은 말 같은 글 함께 쓰는 골육 동포들이
왜 송아지 제 형 보듯 뿔 머리 맞대고 밀었다 당겼다 하듯
서로 욕설을 퍼붓고 물고 차고 쥐어뜯고 싸우고 지지고 죽이고 뒹굴기만 하느냐?
그 지긋지긋한 몸서리칠 왜정 36년 세월의 피눈물과 한숨
골고루 다 맛보며 당하고 찢기고도 모자라서
이 얼빠진 노름판에, 무슨 악마의 장단에 춤을 추고 있는가?
깨어나야 한다. 뼈저리게 뉘우쳐야 한다.
장엄하고 수려한 천하 절경의 백두산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
청산을 감돌아 옥야(沃野)를 가로질러 흐르는 압록강 대동강 한강 낙동강
다같이 그 품에 안기어 즐겁게 살아나갈 우리들의 낙원이다.
왜, 남북이 마주 서서 눈 흘기며 서로 발걸음도 없느냐?
잘되었든 못되었든 월남의 17선, 독일의 베를린 장벽은 이미 없어졌지만
내 나라 38 장벽은 아직도 그대로 가로놓여 있는 채
분단의 대명사로 쓰이느냐?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 통분하기 그지없다.
분단을 슬퍼하고 단결을 갈망함도
통일을 이룰 진정한 억센 힘 덩이도
오로지 우리들 자신에게만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 주변 강대국들은 모다 무엇을 좀 얻어먹으려고
우리의 통일을 바라지도 않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겁도 주고 훼방도 놓고 별의별 연극을 다 벌이며 몰아친다.
제 일 자기가 해야지 남의 힘 믿겠나?
지난 쉰 해 동안 별의별 그 숨막힐 일들을 회상해 보라.
꿈을 깨고 정신을 차리자.
통일이 좋은 줄 알기는 쉬워도
그것을 행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 무슨 ‘네 못했네, 내 잘했네’라는 책임 전가와
요행이나 외세에 의존하려는 사대 근성은
이제 다 선을 그어 밀어 던지고
쉽고 작은 일부터 시작하자.
통일에 불리하다면 추호의 생각도 손대지도 말고,
통일에 이롭다면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결행하자.
잘못된 지난 일을 거울삼아 앞다투어 나가자.
우리의 시선을 가리는 연막을 헤치고
후세에 죄인 안 될 것을 굳게 다지면서
온갖 곤란과 장애를 박차고
눈물 한숨을 참다운 굳센 힘으로 바꿔서
분단 마굴에서 용감히 뛰쳐나와
현시(現時)의 단란한 생존을 위하여
미래 자손 만대의 번영을 위하여
인류 공동 발전을 위하여
인류 대세가 벌여놓은, 우리가 꼭 가야 할 합리적이며
화려한 삶의 터전을 건설하는 성스러운 길을 따라
민족 단결의 새 깃발을 휘두르며
조국 통일 승리 만세!
우렁차게 외치는 소리에 발맞추어
씩씩하고 힘차게 나아가자!!
최후의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