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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회장이 된 스님들의 수행도량
음악회장이 된 스님들의 수행도량 ⓒ 전영준
그것은 아마도 이날의 행사가 그냥 노래 몇 곡 듣자고 열린 단순한 음악회가 아니기 때문이리라.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 환경이 망가지는 것을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 그래서 천성산을 붙들고 지키는데 앞장서겠다는 사람들이 서로 의기투합함으로써 비 오는 산길을 그렇게 오르고 또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도 많은 비가 왔는데 계곡을 흐르는 물이 어찌 저리도 맑을 수 있담?”
“그러게 말일세. 그런데 이 밑으로 땅굴을 뚫고 거대한 쇳덩어리(기차)를 굴러다니게 하겠다니 이 계곡인들 어디 온전하겠어.”
“더구나 저 산 정상에는 국내에 몇 안 되는 산지습원이 있는데 이 밑을 파헤치겠다니 천혜의 자연보고를 다 말려버려는 무식한 발상이 아니고 뭐겠나.”

환경에 대해 남다른 식견을 가지고 있는 듯한 일행이 혀를 끌끌 차면서 발길을 서둔다.

“천성산의 ‘화엄늪’과 ‘밀밭늪’처럼 중ㆍ고층지대의 습원은 특수한 환경에 적응된 생물들이 살고 있는 특수한 생태계라 할 수 있죠. 이 생태계가 파괴되거나 훼손되면 이들 습원의 생물들은 멸종하여 다른 어떤 장소에서도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입니다.”
‘천성산 환경보존 대책위’와 함께 ‘산사 달빛 음악회’를 공동 기획한 ‘양동이’ 운영위원장 김명관씨가 한 마디 거든다.

양동이 '김명관' 위원장
양동이 '김명관' 위원장 ⓒ 전영준
“중ㆍ고층 습원 보존을 위한 연구는 멸종되어가는 생물들의 보존에 의한 종 다양성 유지와 앞으로 개발의 가능성이 무궁한 유전자 자원의 보존 및 습성천이계열의 유지, 습원생태계의 보존, 고생태학과 고기후학(古氣候學) 등의 연구 차원에서 꼭 필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지요.”
김 위원장의 말은 계속 이어진다.

그의 말에 의하면, 현재 학계에 보고 된 우리나라의 고층 습원지는 강원도 양구 ‘대암산 용늪’과 울산시 ‘정족산 무제치늪’ 경남 산청군 ‘왕등재늪’ 경남 양산시 ‘취서산 단조늪’ 등 네 군데에 불과하다고 한다. 말하자면 천성산의 화엄벌 산지 습원은 우리나라의 다섯 번째 고층 습원지에 해당되는 셈이다.

식충식물과 습원식물이 자라는 ‘화엄벌’은 천성산의 정상부임에도 불구하고 푹신한 이탄층 틈으로 용천수가 뿜어져 나온다. 용천수가 흐르는 물웅덩이에는 물자라가 수중동물을 잡아먹기 위해 바삐 움직이는 것도 볼 수 있다.

그러나 1999년 9월 식물학자 정우규(식물분류학) 박사와 사진작가 김종호씨에 의해 화엄벌이 처음 발견된 이후 등산객의 발길이 더욱 잦아지면서 화엄벌도 눈에 띄게 훼손되고 있어 뜻있는 이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이 소중한 자연의 보고를 원천적으로 망가뜨리려는 거대한 음모가 획책되고 있으니….

천성산의 밑바닥을 뚫고 고속철을 달리게 하겠단다.

천성산 지킴이 ‘지율스님’

“천성산을 사수하자!”
16km이상의 장대터널을 건설함에도 불구하고, 지하수와 지질에 대한 제대로 된 조사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 천성산에는 늪지가 하나도 없다’는 엉터리 환경영향평가서를 작성한 사업시행자와 보고서작성자, 그리고 아무런 대책 없이 이를 협의해 준 환경부의 부도덕성이 드러나면서 양산을 비롯한 부산ㆍ경남지역의 양식 있는 시민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일어선 것이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이 곧 내원사 ‘지율스님’.

천성산 지킴이 '지율스님'
천성산 지킴이 '지율스님' ⓒ 전영준

지율스님은 다 알려졌다시피 고속철도 천성산·금정산 통과 반대를 위해 목숨을 건 38일간의 단식투쟁을 감행했던 비구니스님이다. 스님의 이런 결행이 있음으로 해서 그때까지만 해도 일부 환경운동가들의 관심권 안에만 있던 ‘천성산문제’가 비로소 일반 대중의 눈길을 끌게 된 것이다.

스님은 단식을 끝내고도 천성산 지킴이로서의 활동을 멈출 수 없었다. 천성산을 ‘사수’하려는 마음은 오히려 더 급해졌다.

“천성산을 지키려는 노력은 생명의 소중함을 알리는 과정이며, 이 모든 것이 수행이고 만행이라고 봐요.”
당시 스님이 언론을 통해 밝힌 소회다.

장기간의 단식 후, 병원에 가시라는 지인들의 충고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원사에서 된장 국물과 쌀 끓인 묽은 미음으로 건강을 회복한 그는 곧바로 천성산의 아름다움을 담은 동영상 제작에 들어갔다. 그러는 가운데 홈페이지(www.cheonsung.com)도 운영하면서 대중들과 더불어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명의 소중함을 함께 공부하기 위해 ‘초록의 공명’ 모임을 만들어 생태문화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식을 줄 모르는 ‘천성산 사랑’을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
이 날의 음악회도 바로 그 열정의 연장선상에서 펼쳐진 ‘천성산 지키기 운동’의 한 가닥인 것이다.

달님이 구름 속에 숨어 ‘달빛 음악회’는 ‘법당 음악회’가 되고

처음 내원사 일주문 앞 주차장에서 열기로 했던 음악회는 내리는 비 탓으로 법당 안으로 옮겨졌다. 그래도 참석자들의 얼굴은 마냥 밝기만 하다.

“비 오는 산사의 체험도 괜찮지 뭐”‘지율스님’이 날씨를 걱정하는 어느 불자를 오히려 위로한다.

사회를 맡은 ‘양동이’ 김명관 위원장이 마이크 앞에 서고 마침내 ‘달빛 음악회’ 아닌 ‘법당 음악회’가 시작된다.

환영인사하는 '주지스님'
환영인사하는 '주지스님' ⓒ 전영준
“이 자리는 종교도 성별도 지위도 초월하여 오로지 자연을 사랑하고 ‘천성산’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인 자리입니다. 비록 작은 공간, 짧은 시간이지만 함께 음악과 자연을 느껴봅시다.”
주지스님 ‘혜등스님’의 인사말에 참석자들의 눈길이 일제히 거기 함께한 수녀님(예수성심전교수녀원)들께로 쏠린다.

절집에 수녀님이라?

포크가수 '이성호'
포크가수 '이성호' ⓒ 전영준
주지스님 말마따나 자연사랑에 불교면 어떻고 천주교면 어떨까만 비구스님들 앞에 공손하게 앉아있는 수녀님들의 고운 자태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포크가수 ‘이성호’씨의 '직녀에게‘와 '찔레꽃’ 열창으로 분위기는 후끈 달아오른다. “앵콜!” 누군가 했더니 바로 주지스님이다.
절간에서의 음악회도 흔치 않은 일이겠지만 때는 마침 스님들의 하안거(夏安居) 기간이라 세속의 음악가락이 자못 번잡스러울 터인데 스님들 얼굴은 그저 해맑기만 하다.

“괜찮아, 이것도 공부여.”
대장부 같은 주지스님의 화통한 말씀에 한바탕 웃음보가 터지고 참석 대중들 모두 하나 되었다. 여기 승ㆍ속이 어디 따로 있겠으며 사바와 선계가 무슨 경계가 있으랴. 이곳이 곧 극락이고 천당이 아닌가 싶다.

법당에서 노래하는 '수녀님들'
법당에서 노래하는 '수녀님들' ⓒ 전영준
앵콜곡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에 이어 통도사 ‘정법스님’의 수화무(手話舞). 가사장삼을 휘날리며 온몸으로 구현하는 것이 희열이고 열락인가 하면 어느새 애욕이요 번뇌다. 다들 수화무를 처음 보는 듯, 스님의 현란한 춤사위에 매료돼 모두 넋을 놓고 장내는 일순 적요해 진다. 원장수녀님의 눈을 피해 왔으므로 9시까지는 돌아가야 한다던 수녀님들은 이미 늦은 시간인데도 앵콜도 사양하지 않는다. 분위기에 푹 빠지셨나 보다.

수녀님들이 쏟아지는 박수세례를 받고 자리로 들어가니 웬 배불뚝이 아저씨들이 무대를 꽉 채운다.

장르를 넘나들며 열창하는 향토 예인들. 왼쪽에서부터 '최대호' '홍성모' '진상호'
장르를 넘나들며 열창하는 향토 예인들. 왼쪽에서부터 '최대호' '홍성모' '진상호' ⓒ 전영준
아는 이는 알고 모르는 이는 모르는 향토 예인들

이 중의 한 사람, ‘홍성모’ 씨.
그는 1980년 서울 국립극장 대극장 무대에 선보인 이후 550여 회 공연, 1백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해 살아 있는 뮤지컬의 대명사로 불리는 ‘지저스 크라이스트’를 연출하기도 한 꽤 알려진 연극인이다. 주연배우였던 윤복희씨와 함께 하와이, LA, 뉴욕, 괌 등지로 해외공연을 떠날 땐 배우가 부족해 직접 연기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견습아이들’ ‘하늘로 간 고래’ ‘덜구소리’ ‘늙은 도둑이야기’ ‘의원님과 도둑님’ 등 연출하는 작품마다 큰 호응을 얻었으며 또 ‘94년 대전엑스포’ ‘제1회 광주 비엔날레’ ‘제1회 부산바다축제’ ‘제2회 동아시아경기대회’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 개·폐막식’ 등 굵직한 행사의 기획과 연출을 도맡아 했다는데, 지난날의 대학가요제 출신이라는 사회자의 소개가 있으니 노래실력 또한 물어보지 않아도 될 터.

다음은 연극제작자로 알려진 ‘최대호’씨.
지난해 9월에 창작곡과 리메이크곡을 섞어 첫 음반 'In My Memory'를 내고 11월 6일, 부산문화회관 소강당에서 1시간 동안의 라이브 무대를 통해 'Danny Boy' 'More Than I Can Say' 등을 자신의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하는 음반발표회를 가짐으로써 정식으로 가수로 데뷔한 그는 이미 그 이전부터 중후하고 감미로운 음색으로 부산의 언더그라운드를 지켜온 인물.

또 한 사람, 진상호씨.
울산에서 치과의원을 개원하고 있는 그는 재즈기타실력이 수준급으로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뮤지션이다. 울산지역사회에서는 유능한 치과의사로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한다. ‘낮에는 치과의사, 밤에는 재즈카페의 기타리스트’라는 사회자의 맨트에 좌중엔 또 웃음보가 터진다.

‘아, 과연!’
재즈와 하드록과 포크. 장르를 넘나들며 세 배불뚝이 사내들이 펼쳐내는 소리판은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다. 가슴이 얼얼한가 했더니 곧 아련한 향수. 그렇게 감동의 물결이 출렁이고 이어진 순서는 즉석 출연.

임산부도 한 곡조 뽑고
임산부도 한 곡조 뽑고 ⓒ 전영준
‘웬 또 배불뚝이?’ 세상에, 산달이 내일 모레쯤이지 싶은 젊은 임산부다. 흔들고 꺾고 넘기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싶었더니 불교청년회 가요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단다.

“저러다가 아(아이) 떨어지면 우짜노(어쩌나)?”
한 참가자의 공연한 걱정에 또 웃음바다.
“노래를 잘 하려면 아무래도 배가 불러야 하나보다” 라는 사회자의 너스레에 다시 ‘까르르…’.

필자도 단순한 방관자가 되기 싫어 ‘시낭송’으로 음악회의 첫 순서와 마무리 순서를 맡았다. 진상호씨의 기타반주를 배음으로 자작시 ‘하늘의 뜻이려니’와 신현득님의 교실을 노래한 연작시 ‘철수가 결석하던 날’을 읊었다.

필자도 '시낭송'으로 한몫 거들었다
필자도 '시낭송'으로 한몫 거들었다 ⓒ 전영준
"뭐 이리 가축(?)스럽고도 즐겁노?"
"이 사람들이 과연 '천성산 지키자'고 심각한 마음으로 모인 사람들 맞나?"
취재 나온 기자들도 덩달아 어깨를 들썩이며 한마디씩 객쩍은 소리를 내뱉는다.

다시 세속으로

자, 이제 돌아갈 발걸음이 바쁜데 스님들이 배고픈 중생들을 위해 라면을 준비하셨다고 한다. “안 먹고 가면 우리 스님들이 다 들어야 되니까 꼭 먹어야 한다”고 누군가가 으름장을 놓는다. 비 오는 밤, 절간의 법당에서 콩나물이 들어간 시원한 라면을 먹는 맛이라니…. 안 먹어 본 사람은 모르리라. 라면으로 출출한 배를 채우고 나니 되레 돌아갈 발길이 무겁다. ‘청산에 살고파라’가 절로 나온다.

그래도 다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일상. 절간 문을 나서니 숲길 가장자리며 돌다리 난간에 촛불들이 너울거리고 있다.

‘아하, 우리 밤길 밝히라고 스님들이 이리도 마음을 쓰셨구나!’
다들 음악회를 즐기고 있는 동안에 누군가는 이런 수고를 하였구나 싶으니 갑자기 목젖이 뜨거워진다. 중생들 돌아가는 밤길을 염려하는 스님들의 속 깊은 마음을 아는 듯, 빗속에서도 촛불은 꺼지지 않고 앙증맞게 팔랑거리고 있다.

귀갓길 발길을 밝히는 촛불이 앙증스럽다
귀갓길 발길을 밝히는 촛불이 앙증스럽다 ⓒ 전영준
노래와 춤과 시가 어우러지고 사랑과 우정이 무르익었던 비 내리는 산사의 여름밤은 그렇게 깊어만 가고 저 사바를 떠나왔던 사람들은 또 거기로 돌아가고 있다.

‘오늘밤 비 젖은 산사를 그윽하게 울려 퍼졌던 초록의 공명도 시방 내 발길을 따라 함께 따라 흐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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