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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학교 측백나무가 심어진 뒤쪽 개구멍을 통하면 쉬지 않고도 단숨에 집으로 달려와 점심을 먹고 갈 수 있는 지근 거리에 있었다. 우리 마을 아이들은 아침에 늦을 때는 이 개구멍을 통해서도 등교를 하기도 한다.
신작로를 이용하면 오리가 조금 안 되는 1.7km나 된다. 논두렁길로 마구 달리면 몇 백 미터를 절약해 절반 거리인 800여 미터니 같은 마을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집에 매가 닭을 채 간다며 수업하다 집으로 달려간 아이도 있었다. 겨울철에서 이른봄에는 그 작은 길을 자주 이용했다.
이 길도 모내기가 끝나면 미끄러져 넘어지기 쉽다. 발이 논으로 푹 빠지기도 한다. 뱀이나 지렁이를 만나는 수도 있다. 게다가 어른들께서 그 길로 다니면 콩이 다친다며 야단을 치시니 다급할 때만 몰래 다니던 길이었다.
수업을 마칠 무렵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동무들도 대부분 아침에 날씨가 걷히는 듯 해서 우산 없이 학교에 왔다. 그러니 누구와 같이 쓰고 가자고 얘기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런 날이면 종례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마구 달리는 게 최선의 방법이다.
남자아이들은 어깨에 대각선으로 책가방을 단단히 둘러 묶어 메고, 여자아이들은 허리춤에 흘러내리지 않게 붙들어 맨다. 준비가 되면 동시에 교실 문을 나서 쉬지 않고 달리는 것이다. 가장 큰 마을이었던 우리 동네 아이들이 먼저 출발했다.
“하나, 둘, 셋! 출발~”
“야~”
큰 동네가 먼저 출발했다. 열 두어명씩 혹은 너덧 명씩 각자 마을로 나선다. 다섯 마을 아이들은 운동장이 논물 대놓은 듯 첨벙거리는데도 아랑곳 않고 집으로 향한다. 큰 고무신을 신은 아이는 돌부리에 미끄러져 신발이 벗겨진다. 어디선지 노끈을 구해와 동여맨 아이도 눈에 띈다.
“같이 가~”
“얼른 와 색꺄!”
필통과 빈 누런 양은 도시락에서 나는 “달그락 덜그럭” 소리가 요란하다.
정문을 빠져나왔다. 학교 앞 점방(店房)을 돌아 다섯 호밖에 없는 작은 마을을 거의 빠져 나오는데 순식간이었다. 그런데도 이미 물이 튀어 바짓가랑이는 물론이고 배꼽 위까지 흥건하다. 책보는 빵 가마니 봉지 속에 든 비닐을 구해와 쌓았지만 걱정이 태산이다. 목덜미를 타고 빗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려 사타구니 쪽을 적셨다.
“야, 안되겠다.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가자.”
병주의 제안에 다들 마지막 집 대문간 처마 밑에서 비를 잠시 피했다. 아이들 머리는 남녀 할 것 없이 꽁지머리가 되어 있다. 옷은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고 김이 모락모락 난다. 이 김마저 식으면 곧 추워질 것이다.
“누구 좋은 방법 없냐?”
“야, 이판에 뾰족한 수가 있겠냐?”
“내가 좋은 방법이 있지. 근데 해섭이 엄마한테 야단 맞을 것인디.”
“뭔데야?”
“쩌기 보이쟈? 쩌기 말야.”
“응, 근데?”
“밭 빼고 더 있냐 임마.”
“긍께 거기 토란대 하나 씩 꺾어서 쓰고 가면 되잖냐?”
“아따! 그거 좋은 생각이다. 해섭아, 말 안 할 거지?”
“응.”
“참말로 말 안 할거냐고?”
“진짜지?”
“알았어야~.”
여럿이서 나서는 통에 해섭이는 자기네 밭인 줄도 모르고 승낙을 했다.
“그럼 누가 가서 꺾어 올래?”
“야? 누가 가냐? ‘가위 바위 보’ 하자.”
“그래.”
여자아이들은 빠지고 남자 7명 중 2명을 뽑았다. 나도 뽑혔다.
그곳은 마을 쪽으로 가는 길에 유일하게 하나 있는 밭이다. 달려가서 보니 긴 장마철에 물과 양분을 맘껏 먹고 대단히 크게 자라 있었다. 키는 1m쯤 이나 되고 잎사귀 넓이는 소반(小盤) 만 했다. 그리 크지 않은 밭에 토란을 한 귀퉁이에 심어 놓았으므로 ‘열세 개를 꺾으면 금방 들키고 말겠지’라는 생각에 미쳤다.
“승호야, 그만 꺾고 가자.”
“나머지는?”
“여기서 많이 꺾으면 혼난다니까.”
“글면 어떡 할라고?”
“좀 전에 오면서 보니까 오동나무 있더라. 남자아이들은 오동잎 쓰고 가면 되지 뭐.”
그 시간과 그렇게 비 다 맞는 바에 차라리 그냥 가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온몸이 빠짐없이 젖었다. 까만 고무신에는 흙과 물로 범벅이 되었다. 아이들 있는 곳으로 돌아오면서 새 순으로 나온 넓고 큼지막한 잎을 땄다. 오동잎은 “톡톡” 소리를 내며 잘도 끊어진다.
곧 돌아와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줬다.
“야, 내 책보 줘.”
“허벌나게 애썼다.”
책보를 다시 들춰 메고 동네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뺨을 마구 때리는 빗방울을 한 손으로 막고 다른 한 손은 오동잎을 들고 뛰어 집으로 돌아왔다. 발바닥은 찢기고 터져 피가 조금 나고 있었다. 말이 신작로지 산림도로 만도 못한 돌길을 뛰었으니 그럴 만 했다.
어른들은 비 설거지하시느라 우산 가져오실 형편이 못되었다. 마당에 가득 고인 물을 빼는 일을 돕고 빗물에 신발 흔든 후 미리 길러 놓은 물을 한바가지 “확” 끼얹고 방으로 들어갔다. 마침 눅눅한 때라 군불을 약하게 때 놓아 아랫목은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난, 아직도 그 때 토란잎을 잊지 못한다. 토란잎에는 물이 고이지 않고 또르르 굴러 떨어진다. 그 날 가져온 오동잎은 변소 통에 넣어 파리 들끓는 걸 막았다.
내일은 도롱이나 비바람에 뒤집어져 대나무 살이 부러진 파란 비닐 우산이라도 수리해 챙겨가야겠다.